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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한국성소수자연구회 지음, <무지개는 더 많은 빛깔을 원한다>

한국성소수자연구회 지음, ⟪무지개는 더 많은 빛깔을 원한다⟫, 창작과 비평, 2019

 이야기를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모든 고해성사가 그러하듯 글이 조금 장황해질 것 같다.

 나는 시스젠더 이성애자로서 평생을 살아왔다. 내 성적 지향이나 성별 정체성에 대한 단 한 번의 의심도 없이 어린시절과 사춘기를 통과했다. 꾸밈노동에 대해서도 전혀 거부감이 없었다. 모두가 맨얼굴로 활보하는 기숙사 학교에서 아이라인을 그리고 등교하곤 했고, 한 번도 화장 경험이 없는 여자아이들 중 화장을 원하는 아이들에게 각종 도구의 종류와 사용법을 '설파'하는 데서 뿌듯함을 느끼기도 했다. 여성에게 요구되는 전형적인 성별 표현의 규범을 외부에서 부과된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이 스스로의 내면으로부터 자연스럽게 원하고 승인한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내가 남학생들에게 욕망의 대상이 되는 일을 부정적으로 표상한 적도 없었다. 내 외모에 자신감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쟤는 멀리서 보면 예쁜데 가까이서 보면 못생겼어'라는 말을 들은 뒤로 무척 속상했던 기억이 있다--예쁜 외모로 인기를 끄는 여자애들을 선망했고, 그 이유로 '저렇게 이쁨 받아서 나쁠 건 없겠지' 같은 얕은 생각을 댔다. 요컨대 나는 소위 나의 여성성이나, 무엇보다도 소수자성 일반에 대해 조금의 고민도 없이 학창시절을 종결했다. 인권 이슈에 대해 전반적으로 무지했으며, 단지 서구 사회이론을 공부하겠다는 일념으로 사회학과에 진학했다. 현실로부터 차단된 채, 정확히 말하면 보호받는 채 이론의 거미가 되어 내 안전한 거미줄 안에서만 거니리라는 생각으로.

 그러나 사회학을 선택함으로써 나는 나처럼 자의식에 골몰하기보다 세상의 문제에 눈과 귀를 열고 열성적으로 목소리를 내는 친구들, 선후배들을 많이 만났다. 그들은 소심한 나로서는 상상조차 하기 어려울 정도로 단호한 어조로 불의에 항거하는 대자보들을 써붙였으며, 인권과 관련한 세미나를 종종 열어서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돌이켜보니 새내기 오리엔테이션의 내용도 거의 대부분이 대학 내에서 폭력과 인권 침해를 방지하기 위한 교육으로 이루어졌었다. 머릿속이 거의 백지에 가까웠던 나는 서서히 주변 사람들의 관점을 학습하고 체화하기 시작했다. 졸업하기 직전엔 학교를 다녔다고 해도 5학년 2학기가 되었을 늦은 시기에 휴학을 하고, 학내 비정규직 노동자의 노동인권동아리의 공동부장을 맡기도 했다. 그때도 소심한 성격 탓에 대외적인 성명이나 피켓 시위 등은 나보다 세 학번이나 아래였던 공동부장에게 맡기고 뒤에서 잡일을 도맡았고--나의 불안 성향과 정치적 실천의지를 조화시킬 수 있는 길은 그뿐이라고 믿었다--무지와 여전한 둔감함로 인해 이런저런 실수를 저지르긴 했지만, 고등학교 시절의 나와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풍부해진 인권 감수성을 가진 채로 대학을 졸업할 수 있었다...고 스스로에 대해 좋게 생각하려고 애를 쓴다.

 다시 졸업 이전으로, 그리고 이 책과 관련도가 높은 이야기로 돌아가면, 나는 내가 성소수자의 인권과 관련해서도 고등학교 때보다 훨씬 많이 알게 되었다고 자부했다. 자신감의 근거는 빈약했다. 이곳저곳에서 많은 이야기를 '주워들었고', 성소수자를 말도 안 되는 이유로 혐오하는 대자보들에 경멸을 퍼부을 줄 알았다는 것 정도. 나는 내가 성소수자의 든든한 앨라이가 될 수 있고 심지어는 이미 되어있다고 성급하게 짐작했다. 하지만 그것은 오만이었다. 지금으로부터 3년 전, 활동하고 있던 문예창작동아리에서 합평을 하다 정말이지 성소수자의 인권에 대한 감수성을 결여했다고밖에 말할 수 없는 피드백을 내놨던 것이다. 나의 피드백은 성소수자의 인권에 대해 제대로 공부하지도 않았고 공부를 하지 않았다고 시인할 정직성도 없는 사람이 '반만 아는 채로' 멍청하게 입을 놀릴 때나 할 법한 말이었다. 나는 합평작으로 선정된 어느 퀴어소설에 대해서, 어째서 동성애자들의 고유한 고통은 다루지 않고, 이성애와 다를 바 없는 방식으로 서사를 전개시켰느냐고 물었다.

 나는 그로부터 몇 달이나 지나서야 박상영 작가의 소설을 읽다가 불현듯 내가 그때 누군가에겐 상처가 될 수도 있는 잘못을 저질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와 더불어 내가 성소수자 인권에 대해서 똑똑한 남들의 언행을 따라했을 뿐 실제로 제대로 공부하려고 한 적은 없다는 사실 또한 깨달았다. 몇 달이 지난 시점에 갑작스럽게 공식적으로든, 사적으로든 사과의 말을 전하는 것은 이상스럽고 침투적으로 느껴졌고--성인이 돼서 깨달은 슬픈 사실들 중 하나가 바로 어떤 사과는 설령 진심이더라도 사과 받는 이에게 새로운 상처를 남길 수 있다는 것이었다--나는 자책감만을 안은 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실질적인 공부는 미룬 채 무책임하게 지냈다. 3년이 지나서 ⟪무지개는 더 많은 빛깔을 원한다⟫를 구입하고 완독하고 나서야 비로소 마음의 짐을 조금 덜었다. 동시에 앞으로도 계속해서 성소수자 인권에 대해 공부해나가는 것이 나 스스로를 보다 깊이 반성하는 길이라고 느끼게 됐다.

 이 책은 나처럼 성소수자 인권의 문제에 대해 관심이 있고, 아주 기본적인 지식은 갖췄지만 구체적인 문제상황이나 전문 용어 등에 대해서는 무지한 사람들에게 탁월한 가이드가 되어준다. 굉장히 풍부한 사례와 통계자료, 논증들로 구성되어있기 때문에, 그리고 법학, 정치학, 종교, 교육, 심지어는 논리학까지 아주 다양한 시각에서 이슈를 조명하고 있기 때문에 평소 성소수자의 인권을 짓밟아온 사람들에게마저 '회개'의 계기가 될 수 있을 정도로 좋은 책이라고 생각한다. 누군가 내게 성소수자 인권과 관련해 입문서를 추천해달라고 부탁한다면 나는 망설임 없이 기꺼이, 이 책을 그에게 사줄 것 같다. 아래는 내가 읽고 오랫동안 기억해두고 싶었던 대목들을 추린 것이다.

 - 성적 지향이 선천적으로 비롯하는 것이든 후천적으로 비롯하는 것이든 간에 '완전히 자유롭게 선택'되는 대상이 아니라는 점. 선천/후천 논쟁보다 중요한 것은 엄연히 우리의 이웃으로 존재하는 성소수자들을 차별과 혐오로부터 보호하는 것이다.

 - "치료기술의 발달로 HIV/AIDS는 당뇨나 고혈압처럼 관리 가능한 만성질환"이 되었다는 점(45). 애초에 동성애자만의 질병도 결코 아니라는 점. 에이즈와 관련하여 동성애자를 잠재적, 현실적 환자로 낙인 찍고 혐오하는 것이 오히려 적절한 정보와 치료에 대한 접근성을 저하시키고, 이성애자 감염자로 하여금 자신은 절대 HIV/AIDS에 걸리지 않았으리라는 생각을 유발해 유병률을 높인다는 점.

 - 동성 파트너십은 법률혼 관계로 인정받지 못해 기업과 국가의 복지제도의 혜택으로부터 제외되며, "파트너가 아파도 돌봄휴가나 가족돌봄휴직을 신청할 수 없어 연차휴가 같은 제도를 이용"해야 한다는 점(79). "동반자 관계에 있는 파트너나 그밖의 다양한 보호자 관계들은 장례를 치를 수 있는 권한조차 부여되지 않는다"는 점(187). 소중한 사람의 의료 관련 정보에 대해서도 접근성을 획득하지 못한다는 점. pp.231-232의 법적인 쟁점들도 참고할 것.

 - "이성애 규범성은 단순히 이성애를 정당화하는 제도뿐 아니라 이상적인 가정의 모습, 재생산 중심의 미래, 성적 낙인과 성별이분법, 자연적인 성애적 결합을 통한 결혼의 가치를 공고히 하는 사회적 규범이다. 이성애 규범성은 퀴어에 대한 낙인뿐 아니라 싱글맘, 이주노동자, 장애인 등 무수한 타자를 '문제적인' 삶으로 내몰아왔다. 이러한 맥락에서 가족 제도를 급진화하는 것은 이성애 규범적인 삶의 질서를 재배치하는 과정이며, 가족의 '정상성'을 통해서 구성되어온 좋은 시민/나쁜 시민의 경계, 그리고 가족제도 안과 밖의 공고한 위계를 정치화하는 과정이다.(190)" '가족'의 의미는 자유롭게 재사유될 수 있어야 하며, 혈연이 아니라 서로를 헌신적으로 돌보는 관계가 곧 가족관계라는 점.

 - "[...] 동성결혼이 퀴어 권리의 잣대로 이해되는 현상에 대한 논란 또한 존재한다. 여전히 혼인이라는 제도를 통해 합법적 커플임을 승인받고 가족을 구성한다는 동성혼-가족 연결성이 과연 퀴어적인 운동인가라는 비판이 제기되기 때문이다. [...] 또한 커플 중심의 삶과 아이 양육이라는 프레임 또한 계급적이며 인종적인 가치를 담고 있기 때문에 결코 전복적인 실천이 될 수 없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최근 퀴어진영에서 '동성애 정상성'(homonormativity) 개념이 등장하는 것 또한 이런 맥락이다. 동성애 정상성은 퀴어 커뮤니티에서조차 정상, 바람직한 것, 이상적인 것으로 간주되어 유통되는 가치가 매우 이성애적 규범을 닮아있거나 닮아가고 있으며 매력, 성역할, 멋진 퀴어의 이미지를 구성한다는 점을 비판한다. [...] 동성결혼은 퀴어운동의 성취와 한계를 동시에 노정하고 있다."(215)

 - "항문 성교 반대가 터무니없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누구도 타인의 사생활을 함부로 재단할 수 없다는 점이다.(103)"

 - "한국의 경우 군대 내로 한정하여 동성 간 성행위를 처벌하는 군형법상추행죄가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다. [...] 그런데 이 법은 처벌 대상이 군인이기 때문에 군대(병영). 바깥에서 이루어지는 군인의 행위에도 적용되고 있으며, 이성 간 성행위에는 적용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처벌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동성 간 성행위 자체를 위험한 행위로 규정하고 접근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230)

 - 트랜스젠더들은 주민등록번호 뒷자리의 앞자리와 자신의 성별 표현이 불일치하는 데 따르는 차별이 두려워 투표, 보험 가입, 은행 방문 등 삶을 영위하는 데 필요한 공적인 행위를 포기한다는 점. 공중화장실 사용이 두려워 집을 나서지 않거나 화장실 가기를 참는다는 점. 그들의 인권을 증진시킬 수 있는 '차별없는 화장실'이 성범죄율을 높였다는 통계자료는 없고, "여성 혼자 사는 집이 범죄의 표적이 되는 것처럼 [...] 공간의 절대적 분리"(31-2)가 성평등사회를 만드는 해답은 아니라는 점. 우리 사회는 성별이분법을 넘어서 사유할 줄 아는 역량을 집단적으로 키워야 하고, 그 사유의 결론을 행정에 반영할 수 있어야 한다.

 - "트랜스젠더는 태어났을 때 지정된 성별과 현재 자신이 인식하고 표현하는 성별정체성이 일치하지 않아서 발생하는 성별위화감(gender dysphoria)을 겪는다"는 점. 그러므로 그들의 의료적 '트랜지션'은 미용을 위한, 즉 단순한 기호에 따른 행위가 아니라 성별위화감이라는 커다란 심적 고통 해소와 사회생활 적응을 위한 조치이거나 조치이기도 하다는 점. 의료적 트랜지션 (그리고 그런 트랜지션을 요구하는 법적 성별 정정)에는 만만치 않은 비용이 드는데, 트랜스젠더가 혐오와 차별로부터 안전한, 안정적인 일자리를 구하기 어려운 현 상황에서 비용 마련에 어려움이 존재한다는 점. 의료적 트랜지션을 국가 건강보험으로 보장해야 하며, "의료적 트랜지션을 하지 않고도 법적 성별정정이 가능하도록" 제도를 개선해야 한다는 해당 챕터의 저자 이혜민 선생님의 주장에 동의하게 되었다(63).

 - "트랜스젠더 남성이면서 '여중', '여고'라는 이름이 명시된 학교를 다니는 것은 어떤가. 이건 단지 학교를 다닐 때뿐 아니라 졸업을 한 뒤로도 평생 짊어져야 하는 부담이 된다. 트랜지션을 해서 법적 성별을 남성으로 바꾼다 해도 출신학교 이름은 남기 때문이다.(138)"

 - 인터섹스 유아가 태어났을 때 당사자가 모르게 성기 교정 수술이 강제되는 경우가 잦다는 점. 성별이분법의 폐해를 가장 극단적으로 보여준다고 느껴 충격적이었다.

 -  "학교의 교육과정에서 성소수자 개념을 제거하려는 보수시민단체의 끈질긴 노력"이 있어왔다는 점. "[...] 교육당국과 주요 교육기관들이 [당사자들의 고통 완화나 교육이 아닌] 사회적 합의를 판단 기준으로 삼아 공교육 안에서 학습자가 성정체성 개념을 객관적으로 접할 기회를 차단하고, 학교 안의 성소수자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간과하고 있다는 점을 드러낸다.(151-2)"

 - "[...] 수사 담당자의 편견에 기초한 수사가 진행되고 사건 관계자에 대해 모욕적인 언사와 사건 외 질문 행위, 아우팅 등의 인권침해도 벌어진다. 이는 성소수자들이 문제가 생겨도 공적인 해결을 기피하는 현상으로 이어지고 있다."(248) 성소수자 파트너 간 폭력의 피해자의 권리 또한 전담부서가 없어 적절히 보호되지 못한다고 한다(249).

 - "성소수자 퍼레이드나 축제의 가장 대표적인 특징은 '차이를 드러내기'(가시화)와 '자긍심'이다. 성소수자 축제는 차이를 공적인 장소에서 내보여 자신들의 존재를 드러내는 가시성의 실천이며, 참여자가 개별적 혹은 집단적으로 자신의 자긍심을 수행, 연행하는 과정"이다(254). 퀴어문화축제의 정기적 의례에는 "성소수자 부모모임의 프리허그"와 "성소수자를 지지하는 기독교단체와 교회의 성직자들이 축제에서 행하는 예배와 성소수자 축복식이다."(266)

 - 성소수자의 건강 문제, 인권 문제 일반에 대한 학술적 연구의 기반을 닦기 위해 "국가가 생산하는 사회조사에 성적 지향, 성별정체성의 질문을 포함"시키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296).


 마지막으로 누군가 어째서 이 책을 철학 카테고리에 넣었느냐고 묻는다면, 타인의 아픔 그리고 나 자신의 잘못에 대해 사유할 수 있게 해준 책을 철학 책이 아니라고 할 순 없다고 답할 것이다. 부족함이 많은 나에게 독서를 통한 성찰의 길이 늘 열려있다는 것은 무척이나 감사한 일이다. '철학도'로 나 자신을 정체화하는 사람으로서, 앞으로도 늘 스스로의 무지를 경계하고, 부단한 공부를 통해 앎을 확장해야 한다고 느낀다. 내가 세계에 무해한 존재가 되는 것을 넘어, 진선미를 더하는 사람이 될 수 있을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