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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충분조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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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 언니의 그릇에 또 다른 S 언니가 사온 케이크를 먹었던, 오늘의 오후. 둘은 동명이인이다.

 유학일기 같은 것을 정기적으로 쓰고 싶다는 생각에 새 카테고리를 파게 되었다.


 서울대입구역 3번 출구 근처에 내가 정말 좋아하는 분위기의 술집이 있다. 지난 해 봄에 쓴 ⟪바다 망령의 숨⟫에서 주인공이 모르는 남자와의 사랑에 마음을 의지하려다 그와 같은 행위의 절대적 무의미함을 깨닫고 관둔 술집의 이미지는 그곳에서 따왔다. 철학과의 동료이자 친구들을 그곳으로 이끌고 갈 때마다 나는 그곳이 혁명을 모의하기 좋을 만큼 음습해서 맘에 든다고 말하곤 했다. 저녁에 들어가 새벽까지 머무르기도 하고, 타임킬링에 불과했던 수다에서부터 진지한 대화까지 모두 나눌 수 있었던 곳으로, 내 대학원 생활을 한 개의 장면으로 집약해야만 한다면 그곳 구석의 이미지를 나는 택할 것이다.

 어느 날의 새벽, 그곳에서 술을 마시다 내가 했던 말이 오늘 불현듯 기억이 났다. 죽기 전에 내가 이루고 싶은 세 가지가 있는데, 철학자로서는 좋은 현상학 교과서를 쓰는 것이고, 하나의 인격으로서는 치부와 자랑거리 모두를 포함해 내 삶의 전부를 솔직하게 털어놓아도 온전히 이해 받을 수 있는 그런 사람의 곁에 나란히 존재하는 것이며 소설가로서는 딱 다섯 사람의 삶을 바꿀 수 있는 장편소설을 출간하는 것이라고.

 지금에 와서 그때의 소망들을 돌이켜보니 셋 모두를 수정하고 싶다. 첫째, 현상학 교과서를 쓰기보다는 내 세계관이 개념들의 체계로써 표현되는 어떤 모노그래프를 남기고 싶다. 그 모노그래프를 통해 나는 인식과 실재가 일치하며, 생활의 구조 자체에 의미가 깃들어있고, 정의와 자비가 공존할 수 있는 인간적 삶의 모습을 묘사할 것이다. 둘째, 전적인 고백의 욕구는 유아적인 데다 혼자만의 비밀을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자족성이 약한 사람의 성질이라고 생각한다. 충분히 강인한 사람이라면 자신의 생이 누군가에게 투명하게 공유된다는 가능성으로부터 그 어떤 쾌락도 느끼지 않을 것 같다. 마지막으로 누군가의 삶을 내가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만을 넘어 나르시시즘에 가까워 보인다. 당장으로서는 자기표현에 대한 강박적인 집착을 버리고 자아보다는 세계의 편에 서는 소설, 아름다운 문장보다는 무게 있는 내용을 중시하는 소설, 내성보다는 관찰로 이루어진 소설을 쓰고 죽고 싶다(쓰다 죽고 싶다). 나는 내가 나라는 사실에 너무 많은 관심을 갖고 살아왔다. 지나온 삶 가운데서 내가 끝내 철저하게 망가뜨려버린 순간들이 있다면, 그 지나친 관심이 패인이었을 것이다.

 한 가지 덧붙인다면 그 소설이 누구에게도 읽히지 않는다 할지라도 만족할 수 있을 정도로 타인의 사랑에 대해 무심해진 내가 되고 싶다. 언젠가 연보라색 원피스를 입고 모두에게 사랑을 받는 소녀의 꿈을 꾸고 있다고 쓴 적이 있다. 하지만 나는 그런 꿈을 자동적으로 꾸게 되는 것일 뿐 그 꿈을 꾸고 싶지는 않다. 내가 꾸고 싶은 꿈은 은은한 라일락 향기가 나는 방 안에서 혼자 즐겁게 번역에 몰두하는 애서가의 꿈이다. 꾸는 꿈과 꾸고 싶은 꿈 사이의 괴리가 내 슬픔의 기원이다.


 어떤 삶을 산다 해도 종국에는 가치가 있으리라는 생각과, 모름지기 생명의 특정한 양태는 다른 양태보다 더 가치 있다는 생각 사이에서 끊임없는 진자운동을 거듭한다. 어떤 조건 x가 있어 그 x를 충족한다면 다른 모든 조건들은 충족되지 않아도 좋은 삶을 살았다 말할 수 있는 그런 조건에 대한 앎을 소유하고 싶다. 달리 말해 살아 마땅한 삶의 충분조건에 대한 지식을 갖고 싶다. 예전에는 한 해에 한 권의 시집을 읽는 것을 x의 후보로 생각했던 것 같고, 그 생각은 지금에 와서도 유효하다. 올해에는 허수경의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가 그 역할을 해주었다.


 "인간 종에 속하는 집단의 그리고 개인의 구원 모두를 위해 예술은 의심할 여지 없이 철학보다 더욱 중요하며, 예술 가운데서 무엇보다도 문학이 가장 중요하다. 그러나 순수하고, 규율이 잡혀있는 데다 전문적인 사변의 대체물이란 있을 수 없다. 그리고 예술과 윤리학, 바로 이 두 분야들이야말로, 강해져가는 과학의 힘을 지도 및 억제할 만하고 또 그렇게 할 수 있는 개념들을 그로부터 생성해낼 수 있기를 우리가 희망해야만 하는 그런 분야들이다."(Murdoch 1971:74)


Iris Murdoch. (1971). The Sovereignty of Good. Routledge: New Yo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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