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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용기에 관하여

최근에 읽은 것들에 대한 기록

 이 도시에는 허구한 날 비가 내린다. 테라스에 나가 하늘을 가득 메우고 있는 구름 사이로 햇살을, 적어도 그것의 흔적이라도 찾아보려고 고개를 들면 머지않아 빗방울이 내 콧등을 때린다. 약하지만 끈덕지게 이어지는 빗줄기야말로 이 도시의 상징이다. 모두가 사진기를 꺼내게 만드는 고딕 양식의 오래된 시청 건물은 사실 지나치게 아름다워서 이 도시의 음습한 기운을 진실되게 반영하지 못한다. 도처의 음기를 겨우 상쇄시켜주고 있는 것은 대학생들의 다채로운 옷차림과 특히 밤거리에 은근하게 퍼져있곤 하는 담배 냄새, 돌길에 떨어져 깨진 초록색 맥주병, 카페로부터 새나오는 묘령의 여자의 웃음소리 정도다. 하지만 단 하루, 모두가 새까맣게만 입고 금연, 금주를 하고 웃음을 삼가도 좋으니 햇빛이 났으면 좋겠다. 해가 보고 싶다. 늦가을에도 기꺼이 소매를 걷게 하는 뜨거운 햇빛이 살결에 와닿았으면 싶다. 여름이 벌써 그리운 내가 이 도시에서 맞을 첫 번째 겨울을 어떻게 날지 모르겠다. 목도리와 바라클라바, 니체와 도스토예프스키를 방한용품으로 구매해두었다.

 정체도 이유도 알 수 없는 기독교식 휴일을 맞아 도서관에 다녀왔고, 오가는 길에는 목도리 속에 파묻혀 걸었다. 발을 재게 옮기면 옮길수록 몸이 가벼워졌다. 아무리 추워도 다시 뛰러 나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너무 오랫동안 운동을 쉬었고, 그 때문인지 체력도 집중력도 단기 기억력도 떨어져가는 것을 느낀다. 글을 다시 쓰고 싶다는 생각도 했다. 소설을 읽고 쓰는 일에 미쳐있던 스물셋, 넷 때의 나는 얼마나 예쁘고 대견했는지. 등단과 같은 야심은 사라진 지금이야말로 글을 다시 쓰기 시작하기에 좋은 시기인지도 모른다.

 논문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동원하는 레퍼런스가 너무 많다 보니 밀도가 없고 깊이가 없게 느껴진다. 특히 두 번째 섹션은 논문이 아니라 에세이로 비춰질까 두렵다. 소위 대륙철학을 경유해 누군가를 해석하는 논문이 아닌 새로운 무엇을 산출한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바로 그 이유로 지도교수님을 존경하지만, 그는 나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다. 얼마 전 나는 고유명사로 불렸어야 마땅한 시점에 고유명사가 아닌 대명사로 불렸다. 며칠 뒤 그루지야에서 온 친구가 내 이름을 아주 정확한 발음으로 불러줘서 얼마나 감사했는지. 이런 것에 감사하기까지 한 내가 처량하면서도 서양인들 듣기에 낯선 이름을 가진다는 게 그저 이런 거겠지 싶다.

 한편 탑티어라고 생각한 저널에 투고했던 논문은 장장 8개월만에 피어 리뷰어의 조금은 가혹한 듯한 피드백에 의하여 수정의 기회도 없이 리젝당했다. 만일 리뷰어의 의견이 맞다면 나는 후설을 완벽하게 잘못 이해한 셈인데, 이미 여러 믿을 만한 사람들로부터 진지한 피드백을 받은 바 있던 글이었기에 조금 어리둥절하다. 일단 이곳에서 후설을 가르치시는 교수님께 리젝된 드래프트를 보내 피드백을 부탁드린 상태다. 데스크를 통과했다는 데 일단 감사하고, 아무쪼록 이 리젝션이 내게 성장의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 

 오늘은 며칠간 읽었던 글들을 짧게 요약하고, 논문 본론의 마지막 섹션을 쓰고, 기운이 남으면 도서관에서 빌려온 사르트르의 ⟪존재와 무⟫를 조금 들춰볼까 한다. 빨래도 하고 장도 봐야 한다는 건 흠.


1. Leslie Stevenson, "Sartre on Bad Faith", Philosophy, Vol. 58, No. 224, 1983, pp. 253-258: 반성적이며 객체를 정립하는 자기의식과 선반성적이며 객체를 정립하지 않는 자기의식 사이의 구분을 토대로 사르트르의 자기기만을 설명하려는 글이었다. 스티븐슨에 따르면 사르트르가 주장하는 바는 모든 주체가 의식작용 f를 수행함과 더불어 자신이 의식작용 f를 수행하고 있음을 안다는 것이 아니다. 그는 자신이 f를 수행하고 있음을 단지 선반성적으로만 인지하고 있을 뿐이며*, 이는 그가 f의 수행을 반성적으로 인지함을 내포하지 않는다. 한편 무와 동일시되는 대자존재로서의 의식은 자신이 아닌 바로 그 무엇**이기에, 모든 주체는 작용 f를 수행하지 않았을 수 있는데도 f를 수행하는 것인 데다 미래에는 f를 수행하지 않을 자유가 있다. 행위뿐 아니라 심지어는 지위나 감정[e.g. 슬픔]조차 결정되어있지 않으며 자유의 소관에 해당한다. 그리고 자기기만이란 자유를 선반성적으로 인지하면서도(be aware of) [이를테면 자신의 행위가 결정되어있다고 생각함으로써] 반성적으로 외면하는 것이다. 풀어 말해 자신이 [자유롭게] A임을 선반성적으로 인지하는 동시에 반성적으로 부인할 경우 자기기만이 성립한다. 요컨대 자기기만은 첫째, 선반성적 인지의 내용과 반성적 인지의 내용 사이의 모순을, 둘째, 자신의 무엇임 또는 무엇하고-있음이 언제든 중단될 수 있다는 자유[의 절대성]에 대한 부인이다. 자기기만은 자유에 대한 반성적 의식에 해당하는 불안(anguish)[으로부터의 탈피]다.

 

2. Stalin Joseph Correya, "Not Just Lying to Oneself: An Examination of Bad Faith in Sartre", Journal of Indian Council of Philosophical Research, Vol. 38, 2021, pp. 103-121: 자기기만을 모든 종류의 '자신을 속임' 또는 '자신에게 거짓말함'으로부터 세련되게 구분해내는 논문이다. 코레야에 따르면 자기기만은 의식과 무에 대한 사르트르의 특정한 존재론을 근거로 해서만 성립하는 아주 특별한 유형의 자기-속임수(self-deception)이다. 구체적으로 말해 자기기만이란 자신의 실존적 조건(의식의 자생성 & 재귀성*** & 투명성(↔︎의식에는 알려지지 않고 숨겨져있는 무엇이 있다고 주창하는 정신분석), 무=자유에 대한 인지가 유발하는 불안)에 대한 부인이다. 이를테면 두려움에 휩싸여 이제부터는 안전을 추구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스스로의 의식을 외부 요인에 의해 결정되어있는 즉자존재로 오해하는 자기기만에 해당한다. 그 의식은 당장 절벽 아래로 그저 낙하하기로 결정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처럼 자신의 의식이 사실은 모든 결정권을 쥐고 있다는 사실이 주는 불안 및 자유가 요구하는 책임으로부터 탈피하기 위해 자기기만에 빠진다. 중간에 무에 대한 경험과 단순한 부정판단을 서로 연결하면서도 구분하는 부분, 진정성에의 시도조차 자기기만에 해당한다는 사르트르의 주장에 대한 해설이 흥미로웠다. 중요한 것은 자기기만에 빠지지 않으려면 대자존재인 [그리고 스스로가 대자존재임을 선반성적으로 인지하고 있는] 의식이 마치 자신이 즉자존재인 양 생각해선 안 된다는 점이다.****

 

*선반성적 자기의식의 존재는 반성의 가능성을 통해 입증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정확히 선반성적 의식이 무엇인지 모르겠다고 느꼈다. **자기가 시간적으로 쇄신되어서인가, 아니면 자신이 아닌 즉자존재로서의 대상을 향하기 때문인가? ***담배의 개비 수를 세는 사르트르의 예시를 이해하지 못했다. ****동성애자에 대한 사르트르의 예시를 이해하지 못했다. '초월'에로 도피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

 

3. Christian Lotz, "Action: Phenomenology of Wishing and Willing in Husserl and Heidegger", Husserl Studies, Vol. 22, 2006, pp. 121-135: (실현이 불가능한 대상을 단지 이론적으로 가능하다고 생각하며) 소망함과 (행위를 통해 대상 실현이 실천적으로 가능한) 의지함의 구분에 반영되어있는 이론적 가능성과 실천적 가능성에 대한 후설의 구분이 비본래성(비진정성)과 본래성(진정성)에 대한 하이데거의 구분으로 이어진다고 주장하는 탁월하고 창의적인 논문이었다. 후설과 달리 하이데거는 소망과 의지가 대상과의 관계[뿐 아니라] 자기의 존재의 이해, 즉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이해와 결부되어있다고 생각한다. 구체적으로 말해 소망은 비본래적인 자기이해와, 의지는 본래적인 자기이해와 결부된다. 이는 의지란 실제로 자신의 존재가 될 수 있는--그리고 될 것인--실천적 가능성과 관계 맺음으로써 현재와 미래를 연결시키는 반면 소망은 자신의 존재를 어떤 속성을 소유할 수도, 소유하지 않을 수도 있는 눈앞의-존재로 잘못 이해하기 때문이다. 풀어 말해 현존재가 자신의 가능성을 단순히 논리적인 가능성으로, 곧 자신의 활동으로부터 유리된 것으로 이해할 경우 비본래적으로 존재하게 되며, 이처럼 자신의 존재가능성=능력을 자신의 행위에 뿌리내리고 있지 않은 것으로 바라보는 일은 결의를 상실한 것이다.

 

4. Ulrich Melle, "Husserl's Phenomenology of Willing" in Phenomenology of Values and Valuing (Ed. by J. G. Hart & L. Embree), Kluwer Academic Publishers, 1997, pp. 169-192: 후설의 초기 윤리학을 후설리아나 28권과 사후 유고를 중심으로 요약한 아주 인포머티브한 논문이었다. 이성의 구분과 평행성(171), 의지나 욕망을 표상으로 환원하려는 제임스와 에렌팔스의 시도(176-177), 의지작용과 타 작용 사이의 정초관계(177), 의지적 정립의 세 가지 유형(결의, 명령, 행위의지, 180-184), 수동적 의지의 개념과 문제(188-190)가 흥미로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