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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의 각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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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엑스터시론 성악과를 나온 H 언니를 위해 바빌로프(카치니)의 성악곡을 반주하게 되었다. 구성요소가 좀 더 많고 화려한, 그러니까 연주자가 더 돋보일 수 있는 그리그의 곡을 치는 데 시간을 보내다 그래도 언니에게 폐가 되지 않기 위해 부랴부랴 악보를 바꿨다. 그렇게 정말 간단한 화음을 연주하기 시작했는데, 예상치 못하게 얼굴에 열이 올랐다. 누군가에게는 신파로 들릴 수 있는 세련미 없는 화음들 위로 ‘아베 마리아’라는 단일한 가사가 덧입혀 들리는 가운데 갑자기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찬송가들이 흔히 억지스럽게 전달하는 슬픔이나 두려움과는 무관했다. 지상의 시련에 슬퍼하고, 그 이후에 펼쳐질 지옥에 대한 경고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려면 여전히 ‘나’의 쾌고가 중요해야 한다. 그 ‘나’가 물질성을 보존하든, 아니면 소위..
6 일반적으로 죄책감이 행위에 부과되는 감정이라면, 수치심은 존재에 부과된다고들 배운다. 내가 무엇을 하거나, 말거나 대 내가 누구이냐 아니냐 사이 구분이 작동한다. 하이데거는 그 어떤 프로젝트나 커미트먼트를 선택해서 얼마나 탁월하게 처신하든 결코 해당 기투가 요구하는 바를 충분하게 해낼 수 없다는 데 따르는 존재론적 죄책을 말했다. 같은 논리로 우리는 존재론적인 수치에 대해 말할 수 있다. 어떤 존재의 가능성을 선택하든, 그 언제든 도대체가 충분히 '있을' 수 없다는 감각. 그러나 하이데거는 이런 개념화를 시도하지 않았다. 아마 존재론적 죄책은 보편적인 사정이지만, 존재론적 수치는 감각에 불과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전자는 모두에게 해당되는 사태고, 후자는 실존적으로 취약한 몇몇에게만 체험된다. 사실 존..
5 이인감에 시달리는 사람은 스스로를 존재하지 않는다고 느끼게 된다. 그러나 망상과 다르게 지각의 정당성이 유지되며, 비현실감과도 다르게 주위 세계 자체는 그 존재감을 잃지 않는다. 다만 마치 자신이 그 부분이 아닌 듯이, 또는 스스로의 몸으로부터 '영혼'이 빠져나온 듯이 감각하게 될 뿐이다. 내 식으로 표현하면 실재에 대한 경험은 유지되는데, 실존의 경험은 배제된다는 뜻이다. 내가 나로서 살아있다는 느낌, 달리 보면 내가 나의 주인이라는 느낌을 되찾기 위해서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이인감은 만성이 되면 정신장애에 해당하지만, 심각한 스트레스에 노출되면 누구나 겪을 수 있는 무엇이다. 이러한 병리가 가능함은 우리네 존재의 방식이 결코 눈앞의-존재가 아니라는 하이데거의 주장을 진실로 만든다. 철희도 영수도, ..
4 불안도 삶에 대한 사랑도 모두 간헐적인 발작과 같다. 그 속에 휩싸여 있을 때에는 도저히 다른 양태의 존재가 가능하기나 한지 의문스럽지만 그처럼 강력한 감정의 효력은 악하든 선하든 일시적일 뿐이다. 불안에 속아 삶을 저주해선 안 된다. 반대로 불 같은 의욕에 속아 너무 많은 미래를 약속해서도 안 된다. 믿을 것은 감정이 아니라 감정보다 훨씬 잔잔하고 지속적인 마음의 습관, 구체적으로는 내가 수동적 용기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일종의 덕성이다. 수동적 용기를 갖춘 인간은 도피적 사고나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당장의 쾌고가 삶을 지배하도록 두지 않는다. 대신에 그녀는 스스로가 가장 제정신일 때에 옳다고 판단한 일들을 의무로 생각하며 하나씩 수행해나가는 방식으로 삶의 시간을 채운다. 이를테면 폭음의 기회를 뿌리치고 ..
3 어떤 독서는 육체에 의하여 이루어진다. 지적인 이해를 넘어 신체적인 전율을 가져다주는 책들이 있다. 부자조차 마르크스를 읽는다면 두 볼이 상기되고, 천사조차 니체를 읽는다면 허공에라도 주먹질을 하고 싶어질 것이다. 또는 가만히 글을 쓰고 있는 것뿐인데 마치 춤을 추고 있는 것만 같이 느껴지는 시간들이 있다. 철학적 행위는 가장 정적인 순간에 최대한의 역동성을 가능하게 만든다. 고요한 카페가 새로운 매니페스토, 혹은 복음서가 야유와 함께 울려퍼지는 광장으로 탈바꿈하는 것이다. 카페가 조용하면 조용할수록 찬성과 반대의 목소리는 보다 우렁차게 대립한다. 스물두 살 무렵의 어느 일요일 오후, ⟪독일 이데올로기⟫를 읽던 와중 성경 읽기 모임을 하기 위해 카페에 들어온 신자 무리와 눈을 마주친 적이 있다. 나는 공..
2 다섯 시면 해가 져버리는 데다 해가 떠있어도 구름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날씨를 보상하기 위해 도시 전체가 조명을 휘감았다. 다른 도시에 가도 마찬가지다. 주황색 불빛 아래를 걸어 식당과 마트, 무엇보다 세탁방에 도착한다. 열흘에 한 번 세탁방 안에 가만히 앉아있는 일이 주는 위안은 크다. 세탁방 안에서 당신은 스스로를 정당화할 부담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 당신의 목적은 세탁뿐이고, 그 일은 군말없이 물을 뿜고 세제를 삼키는 기계들이 대신하고 있다. 당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그 순간 당신이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세탁--을 반드시 완수하게 된다. 실수가 끼어들 틈도 거의 없다. 필연적인 성공을 느긋하게 기다리는 당신은 책을 읽어도 좋고,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아 마셔도 좋으며 어떤 이유에서인지 세탁기보..
1 유학일기 같은 것을 정기적으로 쓰고 싶다는 생각에 새 카테고리를 파게 되었다. 서울대입구역 3번 출구 근처에 내가 정말 좋아하는 분위기의 술집이 있다. 지난 해 봄에 쓴 ⟪바다 망령의 숨⟫에서 주인공이 모르는 남자와의 사랑에 마음을 의지하려다 그와 같은 행위의 절대적 무의미함을 깨닫고 관둔 술집의 이미지는 그곳에서 따왔다. 철학과의 동료이자 친구들을 그곳으로 이끌고 갈 때마다 나는 그곳이 혁명을 모의하기 좋을 만큼 음습해서 맘에 든다고 말하곤 했다. 저녁에 들어가 새벽까지 머무르기도 하고, 타임킬링에 불과했던 수다에서부터 진지한 대화까지 모두 나눌 수 있었던 곳으로, 내 대학원 생활을 한 개의 장면으로 집약해야만 한다면 그곳 구석의 이미지를 나는 택할 것이다. 어느 날의 새벽, 그곳에서 술을 마시다 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