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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담이나 소회 같은 것

20230914 살림살이, 타자성

잘 찾아보면 볶음고추장이 있는 유러피안 아침식사

 새 집에 살림살이를 들이다 감기에 걸렸다. 그래도 하우스홀드라고 부를 만한 무언가가 완성되어간다. 잘한 일은 수건과 침대보 따위를 미리 주문해 입주가 가능한 날짜에 곧바로 입주한 것이고, 못한 일은 접시에 돈을 너무 많이 쓴 것이다. 길을 가다 우연히 발견한 상점에서 무려 82유로어치 도기들을 구매했을 때, 나는 이미 아마존에서 꿀 색 접시 세트를 주문한 상태였다. 대신 외식과 카페 나들이를 하지 않고 있으니, 언젠가는 과지출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구청에서 레지던스 퍼밋을 신청했고 같은 날 은행 계좌도 개설했다. 남은 큰 일은 핸드폰을 개통하는 것뿐이다. 사실 무엇보다도 학기가 시작되기 전 한국에서 써두었던 소설을 탈고하고 어딘가에 투고하고 싶다. 그런데 피드백들을 체계적으로 모아뒀음에도 불구하고 손을 대기가 무섭다. 나는 두려운 걸까, 게으른 걸까, 둘 다일까? 문학이 없는 나의 나날들은 아주 평온하고 어딘가 공허하다. 반면 문학이 있던 나날들에는 치열하되 고통스러웠다. 나는 좋은 저울이 못 돼서, 어떤 삶의 방식이 나은 것인지 모르고 있다. 애초에 정답이 없는 문제다.

 잔뜩 분위기를 잡긴 했지만 지금의 나는 매우 행복하다. 하고 싶은 일이 있고 그것이 해야 하는 일과 일치한다.


 2023년 3월 28일의 일기. "태어나서 처음으로 인센스를 피워봤다. 라이터로 불을 붙인 다음 너무 급하지는 않게 후 불어주면 된다고 D가 말해주었다. 한 번은 실패했지만 두 번째에 성공했다. D가 잠시 눈을 붙이고 있는 동안 그의 얼굴에 난 점들 사이를 마치 별자리를 보는 양 이어보았다. D의 오른쪽 눈은 눈꺼풀에 난 점과 그로부터 거의 수직으로 나있는 눈두덩에 난 점 사이에 끼어있다. 더 아래로 내려가면 볼에도 점이 있지만 아무래도 시선은 짤막한 인중 끝에 나있고 기다란 입술 위에 걸쳐진, 마치 커피얼룩 같이 생긴 점에로 가고 만다. 잎맥이 가지런한 나뭇잎 같아 책갈피로 쓰고 싶은 그런 입술이다. 왼쪽 눈 아래엔 상대적으로 선명한 점이 있는데, 다른 점들과 멀리 떨어져 있어서 외로운 소행성 같은 느낌을 준다."

 얼굴을 관찰할 수 있을 정도로 그와 가까이 있었던 그때가 그립다. 지금은 서로가 여유로운 시간을 공유하는 일만 해도 쉽지 않다. 내가 고작 오후를 마무리할 때 그는 잠에 들고, 내가 꿈을 꾸기 시작할 때 그는 깨어난다. 애인이 보고 싶어 대신 블로그에서 그의 옛 일기들을 읽었다. 공간적인 거리에 시간적인 거리가 더해졌지만 나쁘지 않은 아득함이었다. 나와 사귀기 전의 그의 모습과 마주할 때면 나는 애인의 어쩔 수 없는 타자성을 확인하는데, 동시에 그것이 우리네 사랑의 조건임을 깨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