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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담이나 소회 같은 것

20230924 중간점검


 비자를 발급받기 위해 묶어둔 돈이 계좌에 들어오는 10월 초까지는 긴축재정이다. 장을 보기조차 부담스러운 상황이므로 이미 있는 것으로 야무지게 먹고 살아야 한다. 현재 냉장고 속에 있는 식재료는 다음과 같다.

식당에서 남기고 싸온 마르게리타 세 조각, 파프리카, 양상추, 파, 당근, 버섯, 고추, 양파, 아보카도, 김치 두 통, 베이컨 두 통, 치즈, 오이 반 개, 사과, 포도, 방울토마토, 언 닭고기, 우유, 주스, 달걀 6알

 일기를 쓰고 싶은 기분이라 간단히 오늘의 하루를 되짚어본다. 네 시간밖에 자지 못해 죽을 듯이 피곤했던 아침, 언니를 공항까지 배웅해줬다. 마지막으로 서로를 포옹하면서 잘 챙겨먹고 살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에 그렇게 해야만 한다. 돌아와서는 80년대 일본 음악을 들으며 볶음밥을 만들었다. 와인색 냅킨을 깔고 향초를 피우니 그런 대로 분위기가 나서 좋았다. 런드로맷에서 빨래를 돌려놓고 공원에 가 조깅을 했고, 건조를 기다리면서는 연구서를 열 쪽 정도 읽었다. 세제를 집에 두고 나와서 자판기를 이용해야 했는데, 동전을 넣었음에도 물건이 나오지 않은 자잘한 해프닝이 있었지만 결과적으론 빨래에 성공했다.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텅 빈 빨래 바구니 속에 구슬 모양 세제를 미리 넣어놓았다. 저녁은 박사과정을 밟고 계시는 한국인 선생님들을 만나뵙는 자리에 나가 피자를 먹었다. 다들 나를 밝게 맞아주셔서 감사했다. 집에 와서는 담배를 뻐끔뻐끔 피우며 시간을 흘려보냈다. 내일 9시에 있을 공식 OT에 늦지 않게 가려면 7시 30분에는 일어나야 한다. 책을 좀 더 뒤적거리다 잘 생각이다.


 고향의 뉴스로부터 멀리 떨어져있는 지금 나는 행복감을 느낀다. 한국 사회가 수호하는 가치들로부터 그것들에 동의하는지 여부와는 독립적으로 내가 얼마나 큰 스트레스를 받아왔는지 깨닫고 있다. 다만 나의 타지살이는 갓 시작됐을 뿐이다. 나는 노동자가 아니라 학생이라는 편안한 신분으로 여기 와있고, 외로움을 깊이 느낄 만큼 오래 홀로 서지도 않았다. 육체적 이방인이 되는 일과 정신적 이방인이 되는 일, 고독과 가십 중 어느 것이 더 견디기 어려운지는 시간이 지나야 알 수 있는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