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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단편소설

토마스 베른하르트, <모자>

토마스 베른하르트, 김현성 옮김, ⟪모자⟫, 문학과지성사, 2020.

"결국 지쳤어, 피로뿐이야, 그리고 시간표에 따라 정시에 출발하는 기차에 대한 공포. 정신적 공포. 그리고 극도의 무자비함, 극도의 무자비함, 하고 형은 말했습니다."(211)

표지는 모자가 아닌데 비옷인가

 베른하르트의 글을 음미하기 위해서 요구되는 것은 이미지를 다채롭고 입체적으로 영상화하는 능력이 아니다. 그의 인물들은 개성적인 이목구비나 주의할 만한 눈빛, 특별한 머리 색 등등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들은 다만 후줄근하고 종종 불길하기까지 한 옷차림 속에 지나치게 쉽게 파묻힌 채, 나쁜 공기에 의하여 육체를 용해 당한 상태로 유령처럼 이승에 대한 저주의 말을 퍼부을 뿐이다. 인물의 처지에 공감하면서 함께 웃고 울 수 있는 능력 또한 발휘할 기회가 마땅치 않다. 심적인 고통이 문단 구분도 없이 길게 풀이되는 과정에서, 인물들의 슬픔은 감정이입을 불허할 정도로 우스꽝스러워지곤 한다.

 베른하르트가 읽는 이에게 기대하는 것은 그러므로--만약 그가 독자에게 어떤 기대를 걸기는 한다면--상상이나 감정이입의 재주 대신에 일종의 민감성과 인내심에 가깝다. 환경이, 그러니까 가족, 기후, 문화, 상속, 공동체 따위가 어느 예민하고 가련한 정신을 얼마나 지독하게 괴롭힐 수 있는지, 그 괴롭힘의 강도를 헤아릴 수 있는 민감성. 그리고 그 자체로 또 다른 괴롭힘이나 다름없는, 괴로움에 대한 기나긴 문학적 성토를 견딜 줄 아는 인내심. 구원은커녕 결말도 없는 서사를 참을성 있게 흡수한 독자는 단 하나의 메시지를 끌어안은 채 책을 덮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세계에 대한 보편적이고 단호하며 결코 번복되지 않는 거부의 자세다.

 흥미로운 것은 이 염세적인 단편들을 지배하고 있는 세계에 대한 거부의 파토스가 살아가는 일 자체에 대한 거부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베른하르트의 인물들은 다분히 치명적인 충동들을 안고 살지만 자살에만큼은 무능하다. 그들은 말로만 자신들의 현존을 모욕할 뿐 온갖 우회적인 수단을 동원하여 삶을 이어나간다. 그 수단으로 가장 자주, 그리고 어쩌면 가장 효과적으로 활용되는 것이 삶에 대한 경멸이라는 점이 베른하르트의 소설들을 내게 각별하게 만들어준다. 그 어떤 희망이나 욕망, 그러니까 기대할 만한 미래가 없이도, 그리고 추억 삼아 곱씹을 만큼 아름다운 과거 없이도 삶을 지속하는 모습. 현재의 무한한 샘솟음과 재빠른 점멸만을 견뎌내는 데 온 에너지를 쏟는 모습. 그 무엇도 생에 머무르라고 붙잡지 않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살아가는 모습. 이러한 초상들이야말로, 무기력해 보이는 그 만큼 도리어 정확하게 삶에 대한 애착의 가장 단순한 형태를 표상할는지도 모른다.

 이처럼 역설적인 생기를 발산하는 인물들의 건너편에는 끔찍한 권태와 세상을 향한 증오 가운데서도 끊임없이 글을 출간한 베른하르트가 있다. 아름다움을 거머쥘 수 있으리라는 한 톨의 믿음 없이도, 감동을 전할 수 있으리라는 한 칸의 자신감 없이도 계속해서 이야기를 써내려간 그의 생애는, 조금의 허영심도 명예욕도 섞여있지 않은 글쓰기 자체에 대한 극단적으로 순수한 의지를 표상한다. 그 의지를 닮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