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문학

파트릭 모디아노,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파트릭 모디아노, 김화영 옮김,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문학동네, 2019.

내 2021년의 크리스마스

 기억상실증에 걸린 기 롤랑이 전화번호부와 사교계 카드들, 빛 바랜 사진, 어느새 노인이 된 사람들의 안개 같은 기억 속에 웅숭그리고 있는 자신의 과거를 찾아나선다. 내가 누구인지 아느냐는, 나는 누구였느냐는 물음을 타인들에게 물어가며 오직 행운에 의지해 파리 곳곳을 뒤지는 그는 자신을 다른 사람으로 착각하기도 하고, 자신이 다녔(다고 들었)던 학교가 문을 닫았음에 실망하고, 끝끝내 애인 드니즈의 행방은 알지 못한다. 그러나 기억의 파편들을 하나둘씩 손에 쥐게 되면서 자신의 이름과 친구들의 이름, 무엇보다 오래된 감정과 재회한다.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는 삶의 덧없음과 성스러움, 둘 모두에 대한 충전한 인식이라는 모순 위에서 비행한다. 기는 "미의 여왕들, 멋쟁이 바람둥이들, 나비들"이 "살아 있는 동안에도 결코 단단해지지 못할 수증기만큼의 밀도조차 지니지 못"한다고 토로하다가도 옛 친구의 시선 한 줄기마저 고요 속의 반성을 요구하는 것처럼 "잔디밭 가까운 곳에 앉아서 혹시 게이 오를로프의 유리창들은 이쪽으로 나 있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하면서 건물 쪽으로 머리를 들"어본다(74-75). 자신의 현재와 아무런 연속성도 없는 과거를 뒤늦게라도 알아내겠다는 기의 의지는 거의 무가치해 보이다가도, 과거가 백지라면 미래의 그림은 대체 무슨 의미인가 하고 묻게 된다. 사실 인식으로써 자아를 무로부터 건져내려는 시도는 기억이 온전한 우리들도 매 순간 수행하는 바이다. 인식은 없음과 있음 사이를 오가는 한낱 파동인 인간의 처지를 구제하는 데 기능하는 종교적인 능력이다.

 "그 건물들의 입구에서는 아직도 옛날에 습관적으로 그곳을 드나들다가 그후 사라져버린 사람들이 남긴 발소리의 메아리가 들릴 것 같다. 그들이 지나간 뒤에도 무엇인가가 계속 진동하고 있는 것이다. 점점 더 약해져가는 어떤 파동, 주의하여 귀를 기울이면 포착할 수 있는 어떤 파동이. 따지고 보면 나는 한 번도 그 페드로 맥케부아였던 적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었다. 그러나 그 파동들이 때로는 먼 곳에서, 때로는 더 세게, 나를 뚫고 지나가고 있었다. 그러다 차츰차츰 허공을 떠돌고 있던 그 모든 흩어진 메아리들이 결정체를 이룬 것이다. 그것이 바로 나였다."(1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