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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헤르만 헤세, <수레바퀴 아래서>

헤르만 헤세, 김이섭 옮김, ⟪수레바퀴 아래서⟫, 민음사, 2001

"학교 선생은 자기가 맡은 반에 한 명의 천재보다는 차라리 여러 명의 멍청이들이 들어오기를 바라게 마련이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선생에게 주어진 과제는 무절제한 인간이 아닌, 라틴어나 산수에 뛰어나고, 성실하며 정직한 인간을 키워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누가 더 상대방 때문에 감당하기 힘든 고통을 겪게 되는가! 선생이 학생 때문인가, 아니면 그 반대로 학생이 선생 때문인가! 그리고 누가 더 상대방을 억누르고, 괴롭히는가! 또한 누가 상대방의 인생과 영혼에 상처를 입히고, 더럽히는가!"(142, 강조는 필자)

 마을의 수재였던 소년이 모두의 기대를 받으며 엘리트 신학도로서의 길에 오르지만, 신경이 쇠약해진 채로 퇴교한다. 휴식도, 성적인 접촉의 기쁨도, 노동의 결실도 그의 피로를 덜어주지 못한다. 사람은 단지 절망해서 죽는 것이 아니라, 그 절망에 지친 나머지 눈을 감는 것, 아니 눈이 저도 모르는 새 감겨지는 것임을 가슴 아프게 설득한다.


 이 소설의 구성은 무척이나 기이하다. 왜냐하면 책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4장의 중후반부부터 결말까지, 주인공 한스 기벤라트의 내면이 사소한 변화만을 겪는 채 내내 동일한 상태--이유를 알 수 없는 슬픔, 마찬가지로 이유를 특정할 수 없는 피로감에 의해 삼켜진 상태--로 유지되기 때문이다. 소설의 절정은 사실상 신학교에서 동급생들과의 만남이 성사되는 3장이고, 그 이후로는 슬픔과 피로에 잠식된 한스의 말로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길게 응시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을 끝까지 읽게 되는 것은 작가로서 헤세의 역량이자 독자가 한스에 대해 가지게 되는 안쓰러운 마음 때문일 테다.

 무엇이 한스를 그토록 피곤하게 만들었을까? 이 물음은 생각보다 대답하기가 쉽지 않다. 단순히 '획일적인 교육'이라고만 말한다면 피상적인 대답이다. 말했다시피 신학교 이야기는 책의 2/7인 3, 4장밖에 차지하지 않기 때문이다.

 곰곰이 생각해보다가 나는 한스의 피로가 자발성의 부재에서 왔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는 단 한 번도 자신의 삶을 스스로의 힘으로 개척하고자 했던 적이 없었던 것이다. 단지 아버지와 마을 어른들의 기대 때문에 공부를 했고, 신학교에 가서는 뒤떨어져선 안 되었기 때문에 다시 공부를 했다. 어느 순간부터 공부를 하지 않게 됐지만, 그 역시 스스로의 결정이었다기보다는 자의식이 과잉돼있던 하일너에게 휘둘린 탓이었다. 마을에 돌아와 엠마와 키스를 한 것도 엠마의 주도를 통해서였고, 기계공 일을 하게 된 것도 멈추지 않는 생의 수레바퀴가 가하는 묘한 압력에 의한 것이었다. 생의 매 단계에서 그에겐 오직 과제와 책임이 있었을 뿐 꿈과 열정은 없었다. 또 일관적인 유순함과 지속적 권태가 두드러졌을 뿐 개성은 없었다. 한스는 그를 미래로 이끌어줄 자신만의 자아를 찾지 못한 채 되돌아갈 수 없는 유년기의 추억만을 곱씹으며 공허한 껍데기로서 소년기를 흘려보냈다.

 껍데기 한스에게 자신의 알맹이를 채울 기회를 부여하지 않은 것은 그에게 공부를 시키기만 바빴던 한스의 아버지와 학교의 선생님들이다. 그들은 원래도 그 그릇이 그다지 크지 않았던 한스의 생명을 게걸스레, 그것도 자랑스럽게 빨아먹었다. 등교하자마자 사물함에서 항불안제를 꺼내 먹고, 오렌지 색 귀마개로 귀를 틀어막은 채 공부를 하다 기숙사 독방으로 돌아오면 울다 잠들었던 나의 고등학교 3학년 생활이 생각난다. 그때 나는 내가 정말이지 자발적으로 하루에 14시간씩 꼼짝 않고 공부를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난센스다. 무엇인가가 내 등을 세게 밀면서 그렇게, 나의 뒤에서, 내 소중하고 엷은 피를 탐했음에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