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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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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만, <토니오 크뢰거> 토마스 만, 홍성광 옮김, ⟪토니오 크뢰거⟫, 열린 책들, 2021. 진실하고 인간적인 감정 일체로부터 스스로가 유리되었음을 느끼고, 단지 시민 크뢰거가 되기를 꿈꾸는 시인 토니오. 시인은 이를테면 사랑 자체가 아니라 사랑에 대한 인식을 추구하느라, 단순하고 소박한 실재의 세계를 떠나 끝없는 사색에 지치게 만드는 정신의 자장 속에 머무르기 때문이다. 질서 잡힌 생활을 동경하는 예술가가 세상에 대해 쏟아내는 질투를 설득력 있게 그려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정작 생활인들은 토니오의 삶을 동경할 것 같다는 생각이 계속해서 들고 만다. 그럼에도 ⟪베니스에서의 죽음⟫을 꼭 읽어보고 싶게 되었다. 가장 좋았던 대목. "관능에 대한 혐오감과 증오심에 사로잡혀 순수함과 품위 있는 평화를 갈구하는 동안에도 그는 예술적인 ..
하성란, <크리스마스 캐럴> 하성란, ⟪크리스마스 캐럴⟫, 현대문학, 2019. 단숨에, 하루만에 읽어내렸다. 흡입력이 좋은 소설이다. 거의 문 닫은 것이나 다름 없는, 버섯 모양 지붕이 있는 리조트에 혼자 묵게 되는 여자가 낯선 곳에서 느끼는 모호한 공포를 생생하게 드러낸다. 공간을 활용하고 으스스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솜씨가 탁월하다. 최은미 작가의 ⟪운내⟫가 떠오르기도 했다. 나도 언젠가 이런 헤테로토피아를 만들어볼 수 있을까. (단, 1부와 2부 사이의 단절은 조금 아쉬웠다. 그 자체로 완결성이 있는 2부와 달리, 1부는 2부의 도입을 위해 억지로 만들어진 느낌이다. 2부만 따로 중편소설화되었으면 어땠을까 생각해본다.)
박상영, <믿음에 대하여> 박상영, ⟪믿음에 대하여⟫, 문학동네, 2022. 네 편의 단편소설이 실린 연작소설이다. 이 책의 미덕은 크게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 인물들이 생생하게 살아있다. 얄미운 상사 배서정부터 시작해서 '요즘 애들'마저 곤란하게 만드는 진짜 '요즘 애'인 윤나영, 방송 일을 시작하게 된 후로 자신의 이미지에 몹시 신경을 쓰게 된 김남준, 사랑에 적극적인 유한영, 광신자인 어머니께 시달리는 임철우까지 모든 인물이 세세하게 구분이 되고 성격이 콕 짚어진다. 둘째, 취재가 바탕이 되지 않았더라면 불가능했으리라 생각될 정도로 현실적이다. 비록 나 자신이 회사에 다니고 있지 않아 정서적인 공감이 가지는 않았지만 사회생활의 고충, 특히 코로나 시대에 회사를 다닌다는 것의 의미가 확 와닿았다. 먼 훗날 누군가 ..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5: 게르망트 쪽 1 발췌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5: 게르망트 쪽 1  여태까지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신성시의 계속된 실패로 특징지어졌다. 발베크 성당의 신성함이 전단지와 선거 포스터에 의해 훼손되었고, 배우 라 베르마의 재능에 대한 몽상이 현실에서의 연극 관람에 의해 흩어졌으며, 게르망트 공작 부인에 대한 환상이 사교계에서의 은밀한 권력다툼 가운데서 깨어졌다. 발췌한 부분은 라 베르마에 대한 화자 마르셀의 생각을 보여준다. 모든 강조는 나의 것이다. "⎡페드르⎦와 '고백 장면'과 라 베르마는 당시 내게 있어 어떤 절대적인 실존을 의미했다. 일상적인 경험의 세계로부터 물러난 그 실존은 그 자체로 존재하여 내가 그쪽으로 가지 않으면 안 되었지만, 아무리 내 눈과 영혼을 크게 뜨고 깊숙이 그 안으로 꿰..
정미경, <프랑스식 세탁소> 정미경, ⟪프랑스식 세탁소⟫, 창비, 2013. 수많은 삶들—출판사 편집장의 삶, 도박 중독자의 삶, 탈북민의 삶, 기자의 삶, 치매 걸린 어머니의 삶, 요리사의 삶—을 탐사하다가 완결 짓기보다는 눈길을 거둔다. 그리고는 장악이 아닌 응시가 서사를 만든다는 것을 증거한다. 소설가가 된다는 것은 백 명의 삶을 들여다 보는 백 개의 눈을 가지는 일일까. 3인칭 소설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만들다가도, 무척 어렵겠다는 두려움이 앞선다. 가장 재미있었던 소설은 아무래도 반전이 있는 이었다. 서사를 무척 긴장감 있게 이끌어갔다. 그러나 마음에 깊이 남는 소설은 다. 두 인물이 애인관계로 진전되지 않고 서로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들어주는 친구관계로, 청자와 화자 관계로 남아서 다행이었다.
알베르 카뮈, <결혼 • 여름> 알베르 카뮈, 김화영 역, ⟪결혼 • 여름⟫, 책세상, 1998. 여름이 다 지나서야 읽게 되어 최적의 타이밍은 아니었지만, 간절기에 나의 마음을 후끈하게 덥혀주기엔 충분한 책이었다. 카뮈의 글은 밀도가 높고 수식구가 많아서 펜을 들지 않는 이상 내용을 따라가기가 벅차다. 그러나 그만큼 하나의 문장 안에 수많은 이미지들이 서로 조화되고 충돌하면서 묵직한 충격을 안겨준다. 간결한 것이 무조건 미덕은 아닌 셈이다. 일련의 산문들에서 카뮈는 인간의 정신을 높이 평가하되, 진보를 꿈꾼 계몽주의자들이나 역사철학자들과 같은 나이브한 낙관은 삼간다. 인간은 나약하고 끝내는 증오에 가득찬 채로 전쟁을 일으키고 말았지만 언제 어디서든 희망을 되찾을 수 있는 존재이다(희망이 없다는 것도 하나의 희망으로 변환시키는 것이 바..
예니 에르펜베크, <모든 저녁이 저물 때> 예니 에르펜베크, 배수아 옮김, ⟪모든 저녁이 저물 때⟫, 한길사, 2018 가정법이 지배하는 소설이다. 우리가 살 수 있었던 모든 삶들, 바랄 수 있었던 모든 사랑들, 행할 수 있었던 모든 정치들을 현실세계와 가능세계의 교차를 통해 형상화한다. 문학의 형태를 입음으로써 이야기는 현실성과 가능성 사이의 위계를 해체시키고, 둘을 궁극적으로는 분별 불가능한 것으로 만든다. 그러나 그 모든 가능한/현실적인 실존들의 끝은 공통적으로 죽음이다. 사람이 죽지 않는 가능세계는 없다. 사람이 죽지 않는 것이 논리적으로는 가능하지 않냐고 묻는 것은 아주 우스운 일이다. 유대인 혐오, 제1차 세계대전, 볼셰비즘, 독일 통일 등 굵직굵직한 사건들이 등장하기에 진지해질 수밖에 없는 것은 이해한다. 형식적으로 아주 독특하고 미..
레프 톨스토이, <이반 일리치의 죽음> 레프 톨스토이, 석영중•정지원 옮김, ⟪이반 일리치의 죽음⟫, 열린 책들, 2021. 세상 사람들이 죽음에 대해 어떤 해석을 내놓고 퍼뜨리는지를 탁월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다. 하이데거 자신이 ⟪존재와 시간⟫ 내 각주를 통해 톨스토이의 이 작품을 소개하고 있다. 이반 일리치는 죽음에 대한 주위 사람들의 외면에서 기만을 발견하고, 삶 전체를 자신의 임박한 죽음에 입각해 다시 생각해볼 기회를 가진다. 그렇게 죽음에 대한 세상 사람들의 견해뿐만 아니라 그 자신의 삶 역시 기만이었음이 밝혀진다. 죽음에 대한 직면이 '좋은 삶'에 대한 진심어린 성찰을 가능케 한 것이다. 문득 나는 우리가 죽음이 아니라 늙음에 대해서도 외면하지 않는가 생각하게 되었다. 나만 해도 마치 내가 영원히 늙지 않을 것처럼 생각하면서 지내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