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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졸데 카림, <나르시시즘의 고통> 요약 및 비판 이졸데 카림, 신동화 옮김, ⟪나르시시즘의 고통⟫, 민음사, 2024, 모든 강조는 필자의 것(unless stated otherwise). 이 책의 주제는 오늘날의 사회를 지배하는 이데올로기로서의 나르시시즘이다. 입증의 목표가 되는 명제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 이 나르시시즘은 (다른 경쟁하는 설명들에 반해) 일종의 개별적 호명과 그에 대한 자발적인 복종으로 구조화된다. 둘째, 이 나르시시즘은 대양적인(oceanic, ozeanisch) 감정과 이상의 도달에 대한 요구를 ‘대체충족’한다—즉, 기만적으로 충족시킨다. 셋째, 이 나르시시즘은 법에 대한 금지와 위반이 아닌 자기 정체성의 강화와 약화를 평가적 기준으로 갖는 새로운 윤리를 산출한다. 나르시시즘적 윤리 하에서 타자는 진정한 타자성을 상실하고, 각..
마론은 이따금 스스로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느낀다(2024.7) 마론은 어제 함께 일하고 있는 동료 햇님에게서 이상한 이야기를 들었다. 나는 마론 네가 무해해서 참 좋아. 그렇게 말하고서 햇님은 수줍게 웃어보였다. 칭찬이었다는 뜻이다. 그것도 깊은 선의로부터 우러나온. 물론 햇님이 그 이상의 말을 아꼈기에 어떤 의도가 더 숨어있는지야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를 아는 마론으로서는 햇님의 말이 순수한 호의의 표현, 심지어는 꽤나 까다로운 인정의 발부임을 알았다. 다만 정확히 무엇의 인정이었는지가 아리송했을 뿐이다. 마론의 모국어는 한국말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한국어의 '무해하다'에 의미상으로도, 구조적으로도 대응되는 단어가 존재하기는 했다. 하지만 마론의 고향 사람들은 그 단어를 사람에게 쓰지 않았다. 보통 그 단어가 붙는 것은 질병이나 약품, 야생동물 같은 것이었다..
셰익스피어, <맥베스> 윌리엄 셰익스피어, 한우리 옮김, ⟪맥베스⟫, 더클래식, 2019, 모든 강조는 필자.  잠의 모티프가 서사를 관통한다. 처음에 맥베스는 뛰어난 군인이자 충성심의 화신으로만 비추어진다. 적어도 세 마녀들이 그에게 왕이 될 운명을 계시하기 전까지는 그렇다. 이후로 독자는 "별들이여, 빛을 감추어라! / 이 검고 깊은 야망을 보지 마라."고 말하는 맥베스를 만나게 된다(37). 그러나 맥베스는 성왕을 암살하려는 자신의 계획이 끔찍하다는 것을 잘 알기에 주저한다. 즉 그에게는 야심과 더불어 양심이 아직 살아있다. 결국 계획을 단념하기로 생각한 그의 마음을 되돌리는 것은 그의 부인, 레이디 맥베스다. 레이디 맥베스는 남편의 '비겁함'과 남자답지 못함을 꾸짖는다. 부인의 책망과 자기 안의 야심을 못 이겨 결국 일..
에드문트 후설, <덕> Husserl, Edmund. (2014). Grenzprobleme der Phänomenologie. Analysen des Unbewusstseins und der Instinkte. Metaphysik. Späte Ethik. Texte aus dem Nachlass (1908-1937). U. Melle & T. Vongehr (Ed.). Springer (Hua XLII) 중. 동료들과 공유하면 유익할 것 같아 시작했지만, 결국에는 번역을 하다 말고 그냥 독일어로 빠르게 읽고 따로 정리하는 길을 택했다. 용기에 대한 졸업논문을 쓰는 데 무척 중요했던 텍스트. 후설의 덕이론은 현대 덕윤리와 무척 다른 지향과 질감의 것임을 깨달았다. [s.278] 덕스러운 행위[Handlung]의 고유한 성격은 ..
2024년 6월의 독서 1. Waldenfels, Bernhard. (2002). Bruchlinien der Erfahrung, Suhrkamp 중 'Getroffensein'과 'Traumatisierung'. 베른하르트 발덴펠스가 전개한 응답의(또는 반응적responsive) 현상학의 기본 테제들이 소개되어 있다. 독일어 자체는 그다지 어렵지 않은데, 기본적으로 간결하게 쓰기보다 같은 말을 여러 번 달리 반복해서 표현하는 스타일의 작가다. 발덴펠스의 철학에는 놀랍게도 고전적 현상학자들 모두의 사상이 오롯이 녹아들어가 있다. 세계와 주관을 잇는 지향성이라는 사태의 의미와 한계에 대한 통찰, 그리고 수동성에 대한 천착은 후설을 따른다. 한편 촉발(Affekt 또는 당함, Widerfahrnis, 경우에 따라 호소Appell)..
구병모, <심장에 수놓은 이야기> 구병모, ⟪심장에 수놓은 이야기⟫, arte, 2020. 스포일러가 있다. 이제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작가 중 한 명이 된 구병모의 중편소설. 지하철역 안에서 꽃과 함께 팔리고 있던 것을 냉큼 집었다. 표지가 찢어지고 노출된 부분 모두에 먼지가 쌓여있었지만, 오랜만에 찜질방에 가는 길이었고, 나무 베개 따위를 베고 처음부터 끝까지 읽을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했기 때문에 개의치 않았다. 찜질방에 젊은 사람은 나와 애인뿐이었다. 식당의 불은 꺼져 있었으며, 코로나 이후 폐쇄된 듯한 사우나가 몇 개 되었다. 당연히 조용하고 어떻게 보면 조금 쓸쓸한 분위기의 공간이었다. 그러나 목욕탕 내부 평상에서 수다를 떨던 아주머니들의 웃음소리가 밝았고, 어렸을 때부터 줄곧 '때밀기'로만 알고 있었는데 어느새 통용되고 있는..
유희경의 시 '그해 여름'*의 영역 서로를 좋아하는지, 심지어 약간은 짜증스러워하는지 알 수 없지만, 그럼에도 계절 내내 함께 술을 마셨을 정도로 어떤 씁쓸한 기분을 꽤 오래 공유해온 사람들의 모습. 마지막 시어 '수치'를 얼마나 무겁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시의 분위기는 널뛰듯 달라진다. '흉내냄'이 정말 흉내에 불과한지, 그리고 '낄낄댐'이 정말 웃는 소리인지 결정하는 것도 저 '수치'의 무게다. 젊음을 자기혐오로 낭비하면서도 그렇게 소모되는 자신의 시간에 대해 모종의 나르시시스트적 애틋함을 느끼는 애송이 대학생들의 이야기가 될 수도, 그래도 삶의 회한을 어느 정도 안다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이 붉어진 눈시울을 노을 아래 숨기는 이야기가 될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지 간에 최대한 구어체에 가깝게 옮기고자 했고, 그 과정에서 내가 생각하기에 ..
4 불안도 삶에 대한 사랑도 모두 간헐적인 발작과 같다. 그 속에 휩싸여 있을 때에는 도저히 다른 양태의 존재가 가능하기나 한지 의문스럽지만 그처럼 강력한 감정의 효력은 악하든 선하든 일시적일 뿐이다. 불안에 속아 삶을 저주해선 안 된다. 반대로 불 같은 의욕에 속아 너무 많은 미래를 약속해서도 안 된다. 믿을 것은 감정이 아니라 감정보다 훨씬 잔잔하고 지속적인 마음의 습관, 구체적으로는 내가 수동적 용기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일종의 덕성이다. 수동적 용기를 갖춘 인간은 도피적 사고나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당장의 쾌고가 삶을 지배하도록 두지 않는다. 대신에 그녀는 스스로가 가장 제정신일 때에 옳다고 판단한 일들을 의무로 생각하며 하나씩 수행해나가는 방식으로 삶의 시간을 채운다. 이를테면 폭음의 기회를 뿌리치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