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350) 썸네일형 리스트형 5 이인감에 시달리는 사람은 스스로를 존재하지 않는다고 느끼게 된다. 그러나 망상과 다르게 지각의 정당성이 유지되며, 비현실감과도 다르게 주위 세계 자체는 그 존재감을 잃지 않는다. 다만 마치 자신이 그 부분이 아닌 듯이, 또는 스스로의 몸으로부터 '영혼'이 빠져나온 듯이 감각하게 될 뿐이다. 내 식으로 표현하면 실재에 대한 경험은 유지되는데, 실존의 경험은 배제된다는 뜻이다. 내가 나로서 살아있다는 느낌, 달리 보면 내가 나의 주인이라는 느낌을 되찾기 위해서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이인감은 만성이 되면 정신장애에 해당하지만, 심각한 스트레스에 노출되면 누구나 겪을 수 있는 무엇이다. 이러한 병리가 가능함은 우리네 존재의 방식이 결코 눈앞의-존재가 아니라는 하이데거의 주장을 진실로 만든다. 철희도 영수도, .. 빛의 무게(2023.8) 그르체크로 가는 열차 안에서 저는 미국 시를 읽고 있었습니다. 다른 승객들이 듣지 못할 정도로만 소리를 내서 말입니다. 영어를 잘하지 못해 절반 정도만 알아들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의 감각을 즐겁게 해준 것은 알아듣지 못한 나머지 절반이었습니다. 뜻을 모르는 단어들이 맞추는 각운에 저는 머리가 아플 정도로 황홀해졌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알아들을 수 있었던 행들이 감동을 못 준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나는 어떻게 다시 시작해야 합니까(So how should I presume)?’ 가장 눈에 밟혔던 구절이어서, 되풀이해서 중얼거렸는데, 흥분했는지 말소리가 너무 커진 모양이었습니다. 옆에서 졸고 있던 승객이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그는 공교롭게도 영국인이었습니다. 영국인은 다행히 왜 사람을 잠에서 깨우.. 20240831 밀리면서 나아가기 문학상 공모에 또 떨어졌다. 이번에는 0명을 뽑는 공모전이어서 많이 기대를 했고, 어쩌면 나에게 운명적인 시험대와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운이 부족하더라도 내 글이 정말 좋은 글이라면, 내가 절대적으로 실력이 있는 작가라면 뽑힐 수 있을 거라고. 만약 떨어진다면 내가 그대로 실력이 부족한 거라고. 그리고 설령 떨어진다 하더라도, 나는 내가 좋아하는 일을 최선을 다해 해냈으니, 그 과정만으로 충분하다고. 하지만 페이스톡으로 애인의 얼굴을 본 순간 눈물이 왈칵 쏟아져내린 것을 보면 그래도 어떤 성취를 원하기는 했나 보다. 하기야 갑작스러운 소망도 아니다. 만 19살 때부터 응모를 시작했고, 1년에 한 번씩은 어딘가에 새 글을 냈다. 이제 햇수로 치면 어엿한 10년차다. 문단의 인정을 받고 싶었다. 평생 문.. 마틴 반 크레벨드, <양심이란 무엇인가> 마틴 반 크레벨드(Martin Van Creveld), 김희상 옮김, ⟪양심이란 무엇인가(Conscience: A Biography)⟫, 니케북스, 2020 (originally published at London: Reaktion Books, 2015). 한국에서 읽기 시작해 출국 후 충동적으로 들른 안트베르펜의 버처스 커피에서 다 읽었다. 역사학자가 쓴 책이어서 그런지 참고된 텍스트의 목록이 학술 문헌뿐만 아니라 신문기사나 편지, 희곡 등도 포함해 참 방대하다. 덕분에 유대교 전통에서부터 시작해서 고대 그리스의 전성기, 헬레니즘 시기, 초기 기독교 및 서구 중세, 소위 계몽의 시대, 마지막으로 나치 독일 및 현대에 이르기까지 양심 또는 양심과 비슷한 개념에 무엇이 있었는지 많이 배웠다. 또 단순하고 .. 임마누엘 레비나스, <시간과 타자> 서문(préface) 번역 Emmanuel Levinas, Le temps et l’autre, Presses Universitaires de France, 1983 (originally published at Fata Morgana, 1979), 8-11. 모든 볼드처리 및 '[]' 안의 내용은 필자의 것, 레비나스의 강조는 이탤릭체로 처리."[거리 있는 것과의] 가까움이 [즉각적인] 주어짐[=소여]의 사실보다 소중하다는 것, 비할 데 없는 것(l’inégalable, 독보적인 것)에 대한 충성(allégeance)이 자기의 양심(une conscience de soi)보다도 낫다는 것, 여기에 종교의 어려움과 드높음(hauteur)이 있지 않은가?"(10-11) 시간은 절대적으로 타자적인 것과의 관계가 갖는 이름이라는 것이 요.. 2024년 7월의 독서 7월에는 스타벅스 기프트카드가 생겨서 거의 매일 카페 창가에서 책을 읽었다. ⟪나르시시즘의 고통⟫을 읽으면서 갓 출시된 멜론 프라푸치노를 마셨던 날의 행복을 특히 잊지 못한다. 홀린 듯이 ⟪초대받은 여자⟫의 결말부를 읽어내렸던 날도... 한편 피아노 학원에서는 J씨께서 추천해주신 그리그의 야상곡 연습을 마무리하고 '쉬운 소나타'라 불리는 베토벤의 곡 하나를 새로 시작했다. 레슨을 받으면서 처음으로 소프트 페달을 효과적으로 사용해봤고, 선명하게 치는 것과 크게 치는 것의 차이, 테누토의 미세하면서도 결정적인 영향력 등을 배웠다. 하농과 아르페지오를 반복하면서 부적절했던 손목 높이를 낮춰보기도 했다. 엄연한 초짜지만, 아무튼지 간에 나날이 실력이 향상되는 것이 느껴진다. 7월 말부터는 대한민국의 올림픽 경기.. 시몬 드 보부아르, <초대받은 여자> 시몬 드 보부아르, 강초롱 번역, ⟪초대받은 여자⟫, 민음사, 2024."그 애인가 나인가. 그건 내가 될 것이다."(365) 인물을 살아있는 육체가 아니라 형이상학의 사례로 전락시키고자 의도한 보부아르에게 실망했다. 문학은 철학의 시녀가 되어선 안 되기 때문이다. 문학의 의미는 개념과 논증, 심지어는 직관에 의해서도 감금되지 않는 데, 즉 교훈으로 전락하는 일로부터 끊임없이 도주하는 데 있다. 그러나 오만과 나란히 상당한 자기혐오를 지니고 있는, 자아의 경계가 허물린 그자비에르와 위선의 표본 프랑수아즈, 그녀들의 모든 불안 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저 홀로 단단히 지내 얄미운 피에르 사이 복잡한 욕망의 서사에 압도적인 설득력이 있어 소설가로서 보부아르의 역량을 부정할 수만은 없다. 결정적으로 이 소설은 보.. 20240725 어김없는 불청객 블로그라는 게 원래 이러라고 만들어진 공간이라 생각하며 오랜만에 두서없는 넋두리를 하려 한다. PMS가 찾아왔다. 이유 없이 다시금 모든 게 무서워졌다. 나 자신의 유약함, 자비 없이 사람을 내치고 도태시키는 세계, 그처럼 무자비한 세상과조차 커넥션을 잃어버렸다는 쓸쓸한 감정에 휩싸여서 이 글을 쓴다. 생리 전 일주일 정도는 도대체가 불합리적이라고밖에는 말할 수 없는, 내 미래의 전방위적 몰락에 대한 관념을 쉽사리 떨칠 수 없다. 운 좋게 가부장제의 억압 같은 것은 모르고 자랐지만, 한 달에 한 번씩 나를 엄습하는 이 괴물 같은 불안 덕분에 여성됨의 고통은 충분히 알고 지낸다. 원래는 식욕이 폭발하곤 했는데, 요새는 무엇을 먹든 젓가락 들고 숟가락 뜨는 행위 자체가 귀찮다. 긴 잠을 자는 것으로 육화에 .. 이전 1 2 3 4 5 6 7 8 ··· 44 다음 목록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