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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번역

에드문트 후설, <덕>

Husserl, Edmund. (2014). Grenzprobleme der Phänomenologie. Analysen des Unbewusstseins und der Instinkte. Metaphysik. Späte Ethik. Texte aus dem Nachlass (1908-1937). U. Melle & T. Vongehr (Ed.). Springer (Hua XLII) 중.

 동료들과 공유하면 유익할 것 같아 시작했지만, 결국에는 번역을 하다 말고 그냥 독일어로 빠르게 읽고 따로 정리하는 길을 택했다. 용기에 대한 졸업논문을 쓰는 데 무척 중요했던 텍스트. 후설의 덕이론은 현대 덕윤리와 무척 다른 지향과 질감의 것임을 깨달았다.


[s.278] 덕스러운 행위[Handlung]의 고유한 성격은 무엇인가? [덕스러운 행위에서] 행위자는 좋은 일[das Gute]을 좋음을 위하여 행한다. 그는 그가 의지하는 것을 그 자체로 좋은 것으로서 받아들이고[finden], 그 자체로 좋은 것으로서 평가하기 때문에 의지한다. 그리고 그가 그렇게 평가하기 ‘때문에’ 그는 [그것을] 의지하고 실현한다. 그러므로 순수하게 좋음의 가치[Gutwert]를 통해 동기부여되어, 좋음에 대한 자기평가를 통해서 ‘합리적으로’ 동기부여되어 [그렇게 한다].

그에게 하나의 행위, 행동[Tat]이 덕스러운 것으로서, 도덕적인 의미에서 이루어져 마땅한[gesollt] 것으로서 의식되는 그런 행위자에게 [그런 행위, 행동은] 사랑의 행동[Liebestat]이라는 성격을 가진다. 사랑의 행동은 그 자체로 가치있는 것[Selbstwert]을 사랑하며 그 자체로 가치있는 것을 위해 실천적으로 [스스로를?] 선호한다. 특수하게[spezifisch] 도덕적으로 [말해 그렇다]. 그러나 이 속에 무엇이 놓여있는가?[이는 무슨 뜻인가?]

1) 혹자는 타인과의 관계가 [도덕의] 관건이라고 말할 수 있다. 행위자는 타인 그리고 타인을 위해 좋은 것, 타인에게 사랑스러운[사랑을 불러일으키는, lieb]  것을 가치있게 평가하거나[werten], 타인이 가치있게 평가하는 바를 행하는 것을 아름답게 받아들인다. 타인이 사랑하는 바를 실현하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라고 그는 받아들인다. 반대로: 나 자신에게 사랑스러운 것을 나는 실현할 것이다[라고 말할 수도 있다]. 여기서는 타인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라고 말해야 한다. 한 번은 타인을 그의 노력 속에서 도우려고[fördern] 애쓰고[erstreben] 다른 때는 타인의 노력에 시선을 두지 않는다. 모든 경우에서 물론 나는 나 자신이 사랑하는 것을 [위해] 애쓴다. 한 번은 나는 ‘나에게 유익한 것’을 [위해] 애쓰고, 다른 때는 타인에게 유익한 것을 [위해] 애쓴다. 나는 내가 바라는 것에 내가 도달할 때 아름답고 좋다고 받아들인다. 여기서 우리는 고유한 가치 (추정적으로 고유한 가치)를 향한 노력에 대한 가치평가를 수행한다[haben einen Werten].

2) 혹자는 본질이 도덕적인 것과 ‘경향성’의 의미에서 ‘이기적인 것[Selbstischen]’ 사이의 대립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여기서 ‘이기적인’이란 단어는 더 이상 들어맞지 않는다. 나는 그것을 좋게 생각하기 때문에 도덕적인 것을 행한다. 나는 그것을 [위해] 그냥[bloß] 노력하지 않고 그것을 그냥 사랑하거나 바라지 않는다. 나는 그것을 좋게 생각한다. 이는 내가 그것을 좋게 인식하고, 그것[속]의 좋음의 가치를 평가하면서 포착하는 것일 수도 있고, 현실적인 가치인식[Wertnehmung]을 근거로 한 직관적인[einsichtig] 가치평가함 속에서 그것이 좋은 것으로서 증명될 것이라고 확신하기 때문에 그것을 좋게 생각하는 것일 수도 있다. 

[s.279] 그러나 이뿐만이 아니다. 내가 ‘덕스럽다’고 말할 때, 나는 좋게-생각된-것을 향해 가는 실천적인 노력(의지경향의 노력)과 한갓된 경향성[Neigung], 즉 좋은 것으로 인식되거나 좋게 생각된 것이 아닌 바람의 대상, 경우에 따라서는 정열적인 욕망의 대상을 의지하려는 경향[Tendenz] 사이의 투쟁[Kampf]에 시선을 둔다.*

*[각주] 경향성에 대해: 맹목적인 노력함은 의지함[Wollen]이 아니다. 의지함이 쾌락을 향해 있을 때도 마찬가지다. 담배를 향해 수동적으로 손을 뻗는 일은 가치평가함, 의지함, 행위함이 아니다. 경향성은 충동이며, 충동에 응한다는 것은 다음을 의미한다. 합리적인 동기부여 속에서[의] 가치를 통해 규정될 수 없는 것, 즉 가치를 근거로 하고 가치를 위하여 결정하지 않은 것. 진정한 사랑은 욕망이나 경향성이 아니라 가장 내밀한[innerst] 영혼으로부터 즉 가치평가하는 나로서의 [영혼으로부터] 가치를 위해 그리고 가치 덕분에 사랑받는 것(가치평가된 것)을 위하여 결정함이다. 충동은 그것이 그 자체로 파생된 가치이고, 내가 <그것에> 이성적인 의지함 속에서 응할 수 있을 때에 한해 간접적으로 도덕적이다. 실천적인 것으로서 좋음의 가치를 향해 활성화되기[Aktivation]. 수동적인 행함, [충동에] 응함은 행위함이 아니다. 의지적인[willkürlich] 응함, 하나의 가치를 근원적으로 수동적으로 승인함[billigen], 이는 언제 정당화될 수 있는가? 모든 행위함은 능동적 활동[능동성, Aktivität]이며, 모든 좋게-존재함[Gutsein]은 능동적 활동 속에서 구성된 가치이다. 그러나 가치들임이 확실한 가치들 간의 선택이라는 능동적 활동 속에서 구성된 것만이 실천적으로 좋을 수 있다.

이는 어떻게 가능한가? 모든 욕망은 가치평가함 위에, 가치있게-생각함 위에 세워져있지 않은가? 그리고 모든 ‘느낌[Fühlen]’은 무언가가 좋다는 추정[Vermeinen]이 아닌가?

여기서 우리는 특수한 의미에서와 보편적인 의미에서의 가치있게-, 좋게-생각함을 구분해야 한다. 모든 사랑함[Liebehaben]은 사랑스럽게-생각함이며, 모든 맘에-듦은 맘에 들게 현출하는 무언가에 대한 맘에-듦이다. 모든[각각의] 것에 대해 이성적 질문[Vernunftfrae]이 물어져야 하며, 그러면 맘에-듦은 맘에-듦의-가치를-지니는-것으로-생각함으로, 모든 기쁨은 좋게-, 기쁘게-생각함으로 명명된다. 그런데 좋음의이념[Idee]이 의식 속에 현실적으로 들어서는 곳, 그러므로 현실적으로 좋게 생각되는 곳, 그곳에는 하나의 가능한 증명[Ausweisung]에 대한 생각이, 충족되는 입증[Bewähren]의 생각이 주도한다. 그리고 여기서는 특히 하나의 좋다고 추정된 가치가 더 높은 가치를 막아서고 그것의 실현을 방해하기 때문에 좋음의 가치가 아니라는 가능성이 결정적이다[bestimmend]. 실천적으로 [말해 가치들 간의] 경쟁에서는 보다 높은 것만이 좋은 것일 수 있다.

도덕적 인간은 스스로에 대해 판단한다. 더 명료하게 말하자면, 그는 스스로를 실천적인 주체로서 평가한다[bewerten]. 그가 도덕적으로 행위하는 모든 경우에서 도덕성은 현행적인 또는 [280] 습관적인 자기평가와 자기판단에 근거한다. 좋은 의미에서[in gutem Sinn] 모든 도덕적 행위는 의무적이며 주체에게 의무적인 것으로서 특징지어진다.

이는[이 생각은] 하나의 완전한 도덕적 인간에 대해 다른 것이[행위가] 의무적인 행위로서 존재할 수 있는지를 물을 수 있을 정도로 멀리 나아간다. 윤리학은 행위, 모든 그리고 각각의 행위의 일반적인[일관적인, durchgängig] 도덕화가 가능한지 그리고 그러면 이루어져야 마땅한지에 대해 고려해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도덕적 인간 일반의 이념을 가질 것이며, 이러한 이념의 내부에서 도덕적으로 긍정적인, 일관적으로 긍정적인 인간적 인간 그리고 일관적으로 도덕적으로 긍정적이지 않은 인간의 이념을 가질 것이다. 전자의 이념에 대해 우리는 그러면 완전성의 보다 높은 단계를 가질 것이다. 그것의 근거들에 대해서는 여기서 말해져선 안 될 것이다[말하지 않을 것이다].

덕스러운, 의무적인, 도덕적인 행위는—발달[단계]에 맞게, 그러나 완전히 발달된 그러나 도덕적이지는 않은 (완전히 도덕화되지는 않은) 인간—무관심한 관찰자에게 ‘아름답게’ 받아들여지는 소박하게-아름다운 행위, 이를테면 소박하게-좋음을-의지하는, 동정심이 어린 행위를 앞둘 것이다[vor sich haben]. 동정심을 가지는 자는 그가 ‘관심이 있는’ 한에서 행위하는데, 그는 관찰하는 그런 좋은 것에 의해 규정될 수 있게 행위한다[Der Mitleidige handelt insofern “interessiert”, als er eben handelt, sich von dem Guten bestimmen lässt, das erbeschaut]. 그리고 좋은 것은 물론 관심 있는 욕망함의 실존(다른 인격과 그의 실천적인 필요들의 실존)을 통해 주어진다.

사람은 소박하게 행위한다. 그는 그때그때마다의 좋게-생각함, 좋게-평가함 들을 통해 규정된다.  이것들은 소박한 가치평가함일 수 있다. 그러나 또한 그밖의 ‘불명료한’, ‘숨겨진’ 평가함일 수도 있다. 실천적인 실망들로부터 자라나는 불만족과 실망들은 새로운 노력과 새로운 행위, 의식적으로 규범에 걸맞기를 애쓰는 그런 새 행위를 동기부여한다.

행위함은 판단하는 행위함이거나 그밖의 실천적인 행위함, 이를테면 물리적인 또는 이미 정신화된[정신적 의미가 부여된, begeistet] 환경을 형성하는 또는 형성하고자 애쓰는 그런 실천적인 행위함일 수 있다. 이때 본래적인 행위함의에 앞서서는 일반적으로 충적되는, 그러나 또한 때에 따라 실망되는 충동에-걸맞은 행함이 놓여있다. 이런 충동에-걸맞은 행함의 예로는 주위를-둘러봄[Herumblicken], [그것의 지향을] 충족하는 상세규정들을 가지는 활동적인 지각함이 있지만, 또한 다른 부각들[Andersherausstellung] 등도 있다. 자연스럽게 자라나는 개념과 판단의 형성 또는 [이미] 익힌 언어의 적용을 통해 소박하게 그리고 충동에-걸맞게 인수되는 판단의 형성도 마찬가지[로 충동에-걸맞은 행함의 예]다.

[281] 가장 높은 단계: 규범에-걸맞은 그리고 지속적으로 규범에-걸맞은 판단함, 방법적으로 학문적인 판단행위 그리고 그를 통해 규정된 방법적 판단의 습관을 향한 의지. 이 판단은 체득된 방법 속에서 그것이 규범에 들어맞다는 데 확신하며, 각각의 행보에서 규범에 들어맞는지 여부[Normhaftigkeit]를 현행적으로 확인할 필요 없이 [그렇게 확신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