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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이졸데 카림, <나르시시즘의 고통> 요약 및 비판

이졸데 카림, 신동화 옮김, ⟪나르시시즘의 고통⟫, 민음사, 2024, 모든 강조는 필자의 것(unless stated otherwise).

번역이 무척 매끄러웠다.

 이 책의 주제는 오늘날의 사회를 지배하는 이데올로기로서의 나르시시즘이다. 입증의 목표가 되는 명제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 이 나르시시즘은 (다른 경쟁하는 설명들에 반해) 일종의 개별적 호명과 그에 대한 자발적인 복종으로 구조화된다. 둘째, 이 나르시시즘은 대양적인(oceanic, ozeanisch) 감정과 이상의 도달에 대한 요구를 ‘대체충족’한다—즉, 기만적으로 충족시킨다. 셋째, 이 나르시시즘은 법에 대한 금지와 위반이 아닌 자기 정체성의 강화와 약화를 평가적 기준으로 갖는 새로운 윤리를 산출한다. 나르시시즘적 윤리 하에서 타자는 진정한 타자성을 상실하고, 각 자기들의 개별 정체성을 동의해주는 한갓된 거울로 전락한다. 카림은 이데올로기로서의 나르시시즘이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다는 비관주의적 결론을 내린다. 출구가 없다는 뜻이다.


 ⟪나르시시즘의 고통⟫은 "21세기 계몽된 주체의 자발성은 어디에서 비롯하는가?"라는 의문에서 출발한다(11). 여기서 자발성은 참된 의미의 자유와 대비되어 (이성 또는 심지어는 사익과도 무관하게) 손수 골라진 주인을 섬기는 일, 스스로 택한 복종이 띠는 성질을 가리킨다.* 이때 복종은 "스스로를 복종이라 여기지 않는 복종"으로, "동의" 또는 "권능 부여(Ermächtigung, empowerment)"로 체험된다(16). (뒤이어 상술되겠으나 이때의 복종이 섬기는 주인이란 바로 이상적인 자아이다. 자기의 이상적 자아--프로이트의 용어로는 '자아이상(Ich-Ideal)'--의 지배에 스스로를 내맡기는 자발적 복종이 21세기 사회를 장악하고 있는 나르시시즘의 정체다.)

 자유의 기형태로서의 자발성의 개념은 라 보에시에게서 온 것이다. 그러나 라 보에시가 고안한 자발적 복종의 아이디어는 신민과 폭군 사이의 외적 관계에 국한되어 적용된다. 반면 21세기에 전면화된 것은 복종자와 주인 사이의 내적 관계, 즉 진심으로, 예속이 실은 예속이 아니라 자기의 구원인 줄로 착각하여 형성되는 개인적 관계다. 스피노자의 정치철학에서 온 이 아이디어에 카림은 알튀세르의 호명 개념을 결합시킨다. "호명은 [이데올로기에 대한] 자발적 복종의 원장면"이다(21). 이때 호명은 구체적으로 나를 부르는 호명--말하자면 나에게 속하는[eigen] 호명--으로서, 그에 대한 순종은 나의 특정한 정체성(e.g. '나는 이성적 주체', '나는 향유하는 주체')을 형성하며 정서적 차원 역시 가진다. 그렇기 때문에 호명은 쉽사리 벗어던질 수 있는 외재적 사슬보다도 끈덕지게 자아에 밀착한다.

 알튀세르의 철학을 따르는 자발적 복종의 공식은 다음과 같다.

"이데올로기는 개인이 자신의 현실적 실존 조건과 맺는 상상적 관계를 표현한다."(29)

 이때의 현실이란 개인의 내면과 그 속에서의 자율성이 삭제된 "사회적 관계의 익명적 구조다."(30) 그러나 개인은 자신이 전체 사회의 기계 속 일개 부품이라는 사실을 인내할 수 없다. 그 사실을 인내할 만하게 해주는 것이 바로 상상적 관계(란 이름의 효과적이고 필수불가결한 가상)이다. 상상적 관계를 통해 개인은 비로소 진정한 개인, 개별자, 주체가 된다.* 그리고 개인은 개별 주체일 때에야만 스스로, 진심으로 무언가에 복종하는 것이 가능하다. 

*[part(s) ➔ a person]


 요컨대 어쩔 수 없는 기만이 자발적 복종의 가능조건이다. 이어지는 본론은 나르시시즘이라는 지배적 헤게모니를 나르시시즘적 호명에 대한 자발적 복종으로 규정하고, 이와 배치되는 여타의 규정들을 반박한다.

 먼저 세넷은 공적 부문의 쇠락과 사적 자아의 장악으로, 래시는 오히려 "사사성의 종말"로 나르시시즘을 설명하고자 한다(41). 그러나 카림은 둘 모두의 규정을 거부한다. 카림은 나르시시즘에 대한 프로이트의 원개념에로 되돌아간다. 프로이트는 내면과 외부세계를 구분하지 못하는 채 대양적인 감정과 함께 전능감을 체험하는 발달의 국면인 일차적 나르시시즘과, 그와 같은 전능감의 상실을 집단의 사회적 이상을 내면화함으로써 극복하는 이차적 나르시시즘을 구분한다. 라캉은 거울의 이미지를 이용하여, 이차적 나르시시즘에서 자아가 자기의 이상적 거울이미지를 모방하며 그것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양태를 설명한다. 그러나 완벽한 동일시는 필연적으로 실패한다. 주목할 만한 점은 이 "끊임없는 불만족"으로 인해 역설적으로 이상을 향한 추구의 "추진력[이 결코] 고갈되지 않는다"는 점이다(51). 그러므로 카림에게 '나르시시즘'은 "더 수준 높은 자아의 형태에 대한 자발적 복종. '자기'의 이미지에 대한 자발적 복종" 및 그와 연루된 무수한 가없는 노력들을 지칭한다(53).

 "자발적 복종으로서 나르시시즘의 목표는 해방이 아니다. 목표는 오히려 자기를 탈바꿈하는 것, 모방해서 똑같아지는 것이다. 즉 해방되는 게 아니라 [도달 불가한] 이상을 충족하는 것이다."(59)

  이때 "이상은 자아인 동시에 비자아다. 개인의 부분인 동시에 '외적' 부분이다."(54) 나아가 "사회와 개인의 교차점", "사회가 침투하는 길목이다."(60)

 세넷이 생각한 바와 달리 기존의 주체가 공적 영역에로 월권한 것이 아니라 기존의 주체가 새로이 형성되어야 한다는 요구[--Be the best version of yourself--]가 사회 전면에 퍼진 것이 관건이다. 또한 래시가 생각한 바와 달리 초자아가 약화되어 개인의 사적 충동들이 기승을 부리게 된 것이 아니라 자아이상이 강화된 것이 관건이다. 규범에 따라 금지로써 자아를 제한하는 초자아의 목소리와 달리 자아이상은 "본보기"가 되는 이미지로서 "형성적 압력"을 행사한다(64). "자아이상 호명은 말한다. '너는 네가 되어야 한다.' 그 뜻은 이렇다. '너는 더 나아져야 한다. [...] 너 자신을 바꿈으로써. 늘 그리고 끊임없이.'"(64-65) 이데올로기로서의 나르시시즘은 이 압력을 통해 상상적 위안이 아니라 고통을 준다.


 흥미로운 것은 나르시시즘이 [정의상] 반사회적이라는 것이다. 반사회적 이데올로기가 경제를 지탱하는 사태의 의미 해명이 이어지는 과제다. 두비엘은 본디 자본주의의 시장원리는 인륜성이라는 대항원리를 통해 제한됨으로써 역설적으로 안정되었는데, 그 제한이 사라진 결과적 증상이 곧 나르시시즘이라고 진단한다. 반면 카림은 나르시시즘적 주체 자체가 시장원리의 대항원리이며, 나르시시즘은 도덕적이지 않을 뿐더러 "제한하는 작용이 아니라 고양하고 고무하고 자극하는 작용"이라고 주장한다(79).

 이를 설명하기 위해 카림은 푸코의 신자유주의 분석을 끌어온다. 푸코에 따르면 신자유주의는 (경쟁의 부작용을 적극 완화함으로써 오히려 경쟁을 보호하는 질서자유주의와 달리) "경쟁의 사회적 비용을 보상"하지 않고 "경쟁을 방해할지 모를 메커니즘만 [소극적으로] 제거"함으로써 경쟁을 비경제적인 영역에까지 확장시키는 질서다(86). 이에 따라 사회적 관계, 심지어는 자기관계 역시 시장의 언어로, "투자-비용-이윤 모델에 따라" 번역된다(88). 예를 들어 노동자는 더 이상 노동력의 소유주가 아니라 자기의 모든 잠재력을 계발하고자 하는 인적 자본, "자기 자신의 기업가"이다(89). 이 '역량 기계'는 자기의 생산활동으로부터 소외되지 않는다.

 그러나 카림은 역량 기계의 존재론이 나르시시즘적 주체를 설명하지 못한다고 본다. 역량 기계는, 비록 노동자 자신와 분리될 수 없는 기계이기는 하지만, 내적인 복종 관계를 통해 노동자와 연결되어있지 않기 때문이다. 푸코가 설명하는 신자유주의는 주체의 내면성을 배제하며 그에 따라 내면이 그에 의지하는 상상적 관계의 필요성도 부정한다. 이와 같은 내면의 삭제 경향은 심리학에서 행동주의로 나타난다. 그러나 카림은 "상상적인 것의 차원은 몰수할 수 없"다고 일갈한다(97). 주체의 정신세계는 "자극-반응 도식으로 환원할 수 없다"는 것이다(97).

 그러므로 상상적 관계 없이 단지 시장원리만이 사회를 지배한다는 신자유주의 프로그램은 일종의 환상에 불과하다. 실제로는 "발전한 자본주의에 대한 [...] 상상적 관계"가 작동하고 있으며, 브뢰클링의 기업가적 자아(das unternehmerische Selbst) 개념이 이를 설명해준다(101). 왜냐하면 자아는 "실은 아직 시장 주체가 아니지만 [...] '마치' 그들이 이미 그런 자기 자신의 기업가인 양 부름을 받는" 허구적 과정에 매이기 때문이다(103, 강조는 원저자). 이때의 부름, 호명은 자아의 자기변화에 대한 당위뿐만 아니라 '나는 나를 무한히 변화시켜나갈 수 있다'는 가능성 역시 암시한다. '자아의 무한한 형성 가능성*에 대한 믿음'이 바로 발전된 자본주의를 지탱하는 "핵심적 믿음"이다(105).

*54번 각주에서 카림은 자율성과 이 가능성을 대비시킨다. 전자는 초자아 호명에, 후자는 자아이상 호명에 상응한다.

 그러나 브뢰클링에게서 역시 자아의 내면은 결국 삭제된다. 기업가적 자아는 노동의 능력과 무관한 다른 영혼의 권역들까지 계발하는 와중 시장원리에 물들기 때문이다. 이것이 가능하려면 시장에 스스로를 굴복시키는 합리적 이기심이 자연적인 것이어야 하는데, 카림은 이기심이 호명의 [인위적] 산물이라고 반박한다.

 "가장 합리적이고 가장 주권적인 시장 주체에게도 사익의 표상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자기 동력의 무조건적 '자기 의지'가 필요하다. 그러나 이것은 자기 자신의 경영자 개념이 숨기려 하는 것에서 나온다. 이것은 대상 됨에서 나온다. [...] 신자유주의는 이 부름을 이기심의 냉철함 속에 숨기려 한다."(116)

 나아가 브뢰클링은 상상적인 것이 아니라 허구를 말한다는 점에서도 문제적이다. 반사실적 허구는 'if-then' 형태의 교환 관계가 만족될 경우 지양된다. 반면 상상적인 것은 결코 지양될 수 없다. "상상적인 것은 '성공'할 때조차, 성공을 거둘 때조차 여전히 상상적이다."(118) 이럴 때에만 복종은 무한하며 "근본적"으로 "동의"될 수 있다(119). 카림은 행동주의적 조작도, 사익에 의한 실용주의적 유인도 이 같은 근본적 동의를 이끌어낼 수 없다고 말한다.


 이어지는 질문은 나르시시즘적 주체가 돌입하게 되는 경쟁의 정체가 특수하게 무엇으로 규정되어야 하느냐는 것이다. 이에 카림은 레크비츠의 사회학 이론을 동원한다. 레크비츠에 따르면 모두가 동질한 기능을 수행하기에 교환 가능한 '보편의 논리'는 오늘날 그 반대인 '특수의 논리'를 가능케 하면서도 그에 의해 대체되었다. 카림이 문제삼는 것은 "무언가가 [...] 수세적이면서 전제 조건일 수 있"다는 사고다(135). 카림이 보기에는 보편과 유일무이한 특수의 대비가 아니라, 유용성과 신화적 매력의 결합이 나르시시즘적 경쟁의 관건이다. 카림은 신화적 매력을 유용성에 부가되는 정서적, 가치론적 성스러움으로 규정한다. 그리고 바르트는 신화의 관객이 신화에 의해 호명된다고 말한다.

 나아가 카림에 의하면 레크비츠는 특수의 논리에 입각해있는 한 개인의 고유가치가 사회적으로 인정되(어야 하)는 사태의 모순을 간파하기는 하지만 깊이 이해하지는 못했다. 경쟁은 비교를 전제하지만, 고유가치는 비교를 초월하며 경쟁의 피난처를 제공하는 나르시시즘적 관념이다. 문제는 이 고유가치가 현실적인 것이 아니라 상상적인 데 불과하다는 데 있다. 유일무이한 고유가치의 달성은 (경쟁을 소거하므로) 경쟁의 대항원리이자, (도달 불가능한 것이기에 경쟁을 부추기기만 하는) 지지원리이다.

 이를테면 온갖 랭킹 시스템, 360도 피드백 등에 의해 정량화되고 사회적으로 인정 받는 나르시시즘은 '객관적' 나르시시즘이다. 주관적 나르시시즘과 달리 객관적 나르시시즘은 자아가 그의 이상적 자아를 얼마나 충족했는지를 외부로부터 평가한다. 이제 "성공은 노동, 수고, 노력과 분리"되어 "의무 완수가 아니라 '퍼포먼스'"의 문제가 된다(153). 이에 더해 "성공은 모든 영역에서 관객의 평가에 매인다. [...] 그에 따라 객관적 나르시시즘은 엄청난 불안정화를 의미한다. [...] 자리에 대한 고정된 권리는 없다."(153) 그러므로 "첫자리에 내재한 약속, 고유 가치의 약속은 따라서 몹시 기만적이다."(155)

 결정적으로 레크비츠는 "유일무이함의 추구에 기입되어 있는 필연적 실패"이자 "객관적 나르시시즘과 주관적 나르시시즘의 결합"을 간과한다(157). 전자는 '외적 압력'을, 후자는 '내적 동력' 및 경쟁에서 벗어난다는 구원에의 '소망'을 제공한다. 그러므로 "변화한 것은 경쟁 자체다."(161)


  카림은 이제 사회의 전개 원리로서 (반사회적) 나르시시즘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설명한다. 이는 어떻게 나르시시즘이 두 요구, 즉 (1) 자아이상을 향한 향상과 (2) 대양적 감정 및 전능감에 대한 요구를 대체-충족해주는지에 대한 설명이다. 이로써 가능해지는 자발적 복종과 그에 따르는 타자의 인정은 호네트의 인정 개념에서처럼 자기애를 '제한하는' 인정이 아니라 자기애를 '체현하는' 인정이다.

"즉 나르시시즘적 인정이다. 이는 호혜적이고 상호적이며 대칭적인 인정이 아니다. 정반대다. 그것은 오히려 한 사람을 다른 사람들이 인정해 주는 비대칭적 인정이다. 이 경우에 인정은 다른 사람들과 맺는 특수한 나르시시즘적 관계, 다시 말해 나르시시즘적 사회관계를 뜻한다."(172)

 나르시시즘은 성공과 공동체라는 두 목발(Krücke)을 통해 대체 충족의 이중적 과제를 완수한다.

 (1-1) 성공은 나르시시즘적 만족, 즉 자아가 자기의 이상적 자아에 도달했다는 환희를 불러일으킨다.* 중요한 것은 "나르시시즘이 자아실현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 자기의 자아가 아니라 자기의 이상자아를 찾는 것"이 이차적 나르시시즘의 골자이다(177). 이때 성공을 판정하고 승인하는 관객-타자는 세 가지 특성을 가진다. 첫째, "이상의 충족 여부를 판단하기 위한 정말로 객관적인 기준을 관객은 가지고 있지 않다. 관객은 이상과의 일치라는 환상을 승인할 수 있을 뿐이다."(178) 둘째, "이것은 취약하고 불안정한 승인이며 언제든 다시 철회될 수 있다."(178) 셋째, "각 관객은 [판정이라는] 자아이상의 역할을 맡는다. [...] 내 자아이상의 대리자로서 [...] 관객은 실제 외부가 아니다. 관객은 실제 타자가 아니다."(179) 이때 타자와 자기 사이의 관계에서 부끄러움은 더 이상 없다. "우리는 전인으로서 요구되기에 자신을 전인으로 내보여도 되고, 내보일 수 있고, 내보여야 마땅하고, 내보여야만 한다."(181)

*"자아이상은 본보기로서 자아를 다그치고, 관찰하고, 이상과 비교하는 심리적 심급이다. 그리고 이상자아는 여기에 부합하는 상, 즉 완전함의 상, 완전한 자아의 상을 제공하는 [가변적] 부분이다."(178)

 (1-2) 성공은 "모든 것이 자신과 관련된다는 체험", 즉 자신이 세계와 관심의 "중심이 되는 체험"을 제공한다(183). 이때 체험되는 대양적 감정에서 자아는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강화된다. 이때 "우리는 나르시시즘을 주술적 세계 관계로의 퇴행으로 이해할 수 있다."(167, feat. Totem und Tabu)

"즉 성공은 관객에 의해 승인된 완전한 정체성이다. 이 승인된 합일, 자기 이상과의 하나 됨, 자기 분열의 극복은 철저하게 상상적인 체험이다. 그럼에도 이것은 우리 모두가 평생 동안 추구하는 중요한 체험이다."(183)

 "[취약한 자든, 자칭 스트롱맨이든] 미신을 믿는 자들은 세상 모든 곳에서 자신의 망상을 찾는다. 그리고 이런 탐색이 그렇듯 자신의 망상을 발견한다. 그러면 세계는 자신의 환상과 자신의 자아의 자취로, 신호로, 확증으로 가득하다. 세계는 답한다. 이것이 특유한 나르시시즘적 공명이다."(196)

(2-1) 개인에게는 "이상을 위임할 가능성", 즉 "이상 충족을 말하자면 아웃소싱"할 가능성이 있다(198). "우리는 우리의 충족되지 않은 완전함을 다른 누군가에게 전이하며, 그 사람을 지나치게 높이고 과대평가한다."(201) 이렇게 사랑받는 '스타'는  자기준거적이다. 즉 팬에게 의존하지 않으며 그 자체로 완결된 정체성을 가지는데, 팬은 이 완결의 이미지에 열광한다.*

*Q. 정말 그러한지 의심스럽다. 스타의 열애설에 팬들이 협박으로 대응할 때가 있다.

(2-2) 이때 모두가 스타"에 대해 동일한 [내밀한, 개인적] 관계를 가지면 개개인들은 동일한 집단의 부분으로서 서로 소속감을 느낀다. [...] 이 관계는 상호 간의 정서적 유대를 만든다."(211) 그러나 이때의 유대는 우애도, 연대도 아닌 나르시시즘적 체험이다.* 프로이트가 내세운, 지도자에 의한 초자아가 우세한 집단과 달리 나르시시즘적 공동체는 스타에 의해 자아이상이 우세한 집단이다. 카림은 나르시시즘적 공동체가 "순수하게 감정적인 사회화"에, "정서적 소통"에 의거한다고 말한다(222). "정서는 내부를 향한 사랑과 애착인 만큼이나 외부를 향한 불관용과 구획 짓기이며 공격적 적개심에까지 이를 수 있다. 둘 다 나르시시즘을 체현하는 형식이다."(222)

*Q. 이 역시 팬의 소속감-체험에 대한 현상학적 연구로 뒷받침되지 않는 이상 실제와 유리될 우려가 있다.


 카림은 마지막으로 초자아가 아닌 자아이상의 심급이 지배하는 나르시시즘적 윤리를 말한다. 푸코의 구분대로 도덕-법이 아닌 윤리적 규칙이 관건이다. 후자는 일종의 자기 배려의 기술로서 "구체적인 생활 태도를 안내한다."(229)

 자기 배려의 유행은 사실 그다지 자명하지 않다. 예를 들어 그간 서구를 지배해온 기독교적 전통에서는 "자기 포기를 구원의 전제 조건으로" 보기 때문이다(230). 현세에서의 성공을 구원의 징표로 생각하는 베버의 프로테스탄트들조차 자기 배려로써 자기의 향락과 권능을 제한했다. "합리적인 자기 기술을 규정하는 것은 신에 대한 [...] 순종이"었기 때문이다(234). 반면 고대 그리스의 수양가들은 자주성을 유지했다. 다만 폴리스에서의 이상적 시민상을 수양의 목표로 삼았기에, 그들의 "자기에 대한 배려는 이기적이지 않고 윤리적"이었을 뿐이다(240). 그런데 오늘날에는 (더 이상 비난되지 않으며 심지어는 요구되는) "허락된 자기배려가 폴리스에 의해서도, 신에 대한 경건함에 의해서도 제한되지 않는다는 것"이 의미심장하다(241). 

 슬로터다이크는 이 현대적 자기배려를 스스로를 향상시키기 위한 수양으로 규정한다. 그러나 슬로터다이크의 생각과 달리 이 향상은 자유롭지 않고 오히려 은밀하게 심화된 복종에 해당한다. 뿐만 아니라 수양에서 체험되는 권능은 "현실적인 동시에 상상적"이다(245-6). 마지막으로 평균적 대중을 뛰어넘으라는 슬로터다이크의 격정적 요구는 "향상을 규범으로 삼는 사회에서 묘하게 부적절하다. [...] 자기 향상은 오래전부터 더는 현 상태에 대한 항의가 아니라 현 상태, 즉 정상성을 구축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247)

 지젝에 따르면 규칙은 법의 부재를 은폐하는 대체-법이다. "윤리 규칙, 생활 태도의 고안된 규제는 '마치' 법처럼 체험된다. [...] 보편적 법이 아니라, 보편적 도덕이 아니라, 개인적으로 유효한 그냥 위장된 규칙. 이런 의미에서 오늘날 우리는 바로 나르시시즘적 '도덕'에 의거해 살고 있다."(250)

"금지에서 벗어나 이상을 향해. 오늘날 우리에게는 억압적 금지가 아니라 요구하는 이상이 존재한다. 규칙이 불가능한 이상을 말하자면 번역한다고 할 때, 이것은 전도가 아니다. 오히려 이상을 향한 욕망을 규칙을 향한 욕망과 동일시하는 것이다."(253)

 "주체에게 결핍을, 근본적 제한을 부여하는 금지와 달리 이상의 지배에서는 정반대의 것이 중요하다. 즉 [...] 규칙은 결핍을 극복해야 한다. 이상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결핍을. [...] 동시에 [규칙이 약속하는] 충만함은 환상이다. [...] 왜냐하면 실제 충만함, 다시 말해 이상은 도달 불가능하기 때문이다."(256)

 "비록 이 규칙이 대체 법으로 기능할지라도 그것은 죄를 통해 기능하지 않는다. 자아이상은 다른 종류의 위협을 통해 자신의 지배를 공고화한다. 위반이 아니라 실패를 벌함으로써. 그러므로 문제는 죄가 아니라 열등함이다. 나르시시즘적 '도덕'에서 다모클레스의 검은 죄의식이 아니라 부끄러움이다. 이상을 충족하지 못했다는 부끄러움. [...] 부끄러움은 [개별 행위가 아니라] 한 사람 전체에 적용된다."(257)

 나르시시즘적 윤리는 선악이 아닌 좋음-나쁨의 도식 위에서 작동한다. 이때 좋음은 "나의 정체성[또는 모범상에의 도달]을 장려하는 것"이다(261). 그리하여 정치적 올바름, 기후 중립성, 새로운 식이 요법 등은 선이 아닌 세련됨의 문제다. 나아가 무엇이 좋고 무엇은 나쁘다는 구별을 통해 자아는 자기의 불안정한 자기정체성을 강화한다. "자기 자신을 세계의 중심으로, 척도로, 좋음과 나쁨의 기준으로 만드는 것은 따라서 모든 것을 자아[의 형성을] 위한 계기로, 기회로 받아들이는 것이기도 하다."(262) 

 헤겔의 낭만주의에 대한 이해는 나르시시즘적 도덕을 놀라울 만큼 정확하게 대변해준다. 헤겔에 따르면 낭만주의자는 보편타당성의 부재를 대신해 개별 자기의 주관적 확신을 제 행동의 내용으로 산출한다. 이제 "모든 것을 자신과 관련시키는, 항상 내가 대상이라 느끼는 중심화에, 경쟁 저편의 고유 가치에, 자아 충만의 환상에 이제 구체성이 추가된다."(268) 여기서 구체성은 온 사회적 관계를 추상해낸 결과물이다. 그런데 구체적 실존은 감정을 통해 비로소 체험된다. 이제 '선'을 인식하게 해주는 것은 바로 감정이다. 나르시시즘적 도덕을 따르는 이는 자기의 감정에 근거해 생물학적 성별, 계급, 정당, 국적 등과 관련된 모든 보편 범주를 거부한다. 진보든 보수든 "모두 자기 확신이 이 '도덕'의 토대다. 이 확신에게 사회적 기준과 사회적 역할은 모욕과 같다. 즉 자기 기획에 대한, 자기 규정성에 대한 모욕이다."(274) 성별의 정체성은 타인에 의해, 외부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직 나 자신의 감정에 의해서만 결정되어야 한다. "우리 모두가 추구하는 절대적 구체성이라는 환상, 공상은 이제 극에 이른다. 완전한, 실존적인 '자기 권능 부여'라는 환상. 왜냐하면 오직 주관적 감정에만 근거하는 정체성이란 오직 자기 자신에 의해서만 규정되는 정체성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순수한 자기 정립이다."(277) 한편 '자유주의자'들은 "나의 규칙이 아닌 규칙으로 생각되는 것에 대한 거부"를 일괄적으로 행사하며, 이에 따라 이를테면 국가에 의한 보건적 조치들을 무시한다(280).

 이와 같은 전적인 자기규정의 사회에서 타자는 타자성을 상실한다.

 "타자들은 내가 자기 정체성을 스스로 결정할 때 동의하는 역할에 한정되어야 한다. 타자들은 내가 규정하는 것에 그냥 동의해야 한다. 더 나아가 자기 정체화의 원칙은 다음의 사항을 분명히 한다. 타자는 나의 규정이 자신의 인식과 모순될지라도 그것을 인정해야 한다. 가령 내가 나를 남성으로 규정하면 타자는 나를 남성으로 인정해야 한다."(278, 강조는 원저자)

 그리하여 "퀴어부터 온갖 종류의 라이프스타일 그룹까지" 포괄하는 나르시시즘적 공동체는 사회가 아닌 사교의 장에 불과하다. "여기에서 인정은 스스로의 자기 확신의 '반향'일 뿐이다."(287)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르시시스트는 타인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다. "실존적인 의미에서 우리는 자신의 아주 구체적인 실존 속에서, 완전히 개별적으로, 어떤 보편 범주의 보호도 없이 인정에 자신을 내맡긴다."(289) 여기서 나르시시즘의 고통이 유래한다.


 카림의 분석은 탁월하고 동의할 만한 지점들이 다수 있지만, 비판 받을 여지도 있다.

 첫째, 왜 자발적 복종의 추진력이 무한한지에 대한 설명이 불충분하다. 단순히 이상의 달성이 무한하게 연기되므로 달성의 추진 역시 무한히 이루어진다는 형식적 논증은 불만족스럽다. 사람은 반드시 지치기 때문이다. 카림은 피로를 언급하기는 하지만, 그 의의를 과소평가하고 만다. 번아웃 이후의 퇴사나 '소확행'에 대한 전사회적 동경 등으로 나타나는 이데올로기에 대한 거부의 흐름은, 설령 나르시시즘에 대한 반응으로서 사후적으로 나타난 것일지라도, 나르시시즘에 종속될 정도로 빈약한 사회적 실재가 아니다. 만일 피로에 의해 동기부여되는 그와 같은 거부 역시 자기의 이상에 근거한 것이기에 나르시시스틱하다고 말한다면, 나르시시즘은 외부와 내부가 없어 공허한, 지나치게 포괄적인 유사과학적 개념이 된다.

 둘째, 좌파 진영의 '윤리적' 노력을 선악이 아닌 단순한 좋음에 대한 투쟁으로 축소시키는 것 역시 부적절하다. 예를 들어 퀴어 활동가는 새로운 도덕을 위해 싸우는 것이지, 단순히 유사도덕을 인정 받기 위해 투쟁하는 것이 아니다. '당신은 당신이 선을 확립한다고 생각하겠지만 실은 당신의 개인적인 이상을 구축하고 있을 뿐이야'라는 선언은 문제적인 방식으로 오만하다. 나아가 정체성이 순전히 감정적 확신을 통해서만 이룩되고 변경되는 것이라면, 어째서 규범의 틈새에 있는 정체성들이 서로 상호주관적으로 공유되고, 이따금은 특수한 의술적인 조치들을 동반하는가? 성별의 새로운 범주들이 공유되는 양상은 단순한 사교로 환원되지 않으며, 모종의 객관성을 담지한다. 아직 범주의 규정이 과도기적일 뿐, 객관성을 필연적으로 결여하고 있는 것은 아닌 것이다. 그리고 아직은 과도기적인 객관성조차 해당 객체 내부의 다양성에 대한 고려와 충분히 양립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