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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leonore Stump, Aquinas's Account of Freedom 요약 보호되어 있는 글입니다.
인물 스케치: 온마루(2023.5) 마루는 쾰른의 밤거리를 배회한다. 타국의 골목길은 아무리 익숙해지고 싶어도 언제나 낯설기만 한 미로이다. 만날 사람이 있는 것은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다. 마루는 실시간으로 데이팅 어플을 들여다보며 마찬가지로 근처를 배회하는 여자들을 찾고 있다. 딱히 비극적이지도, 희극적이지도 않은 그 모습이 매사에 진지한 마루에게만큼은 희랍의 비극인 양, 동시에 끔찍한 희극인 양 느껴진다. 자신은 냉정하기 그지없어야 할 플라톤의 아들인데 욕망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음이 비극이다. 그리고 그 욕망이 고작 성욕이라는 점이 희극이다. 마루의 핸드폰에 진동이 울린다. 몇 분 전 추파를 던져봤던 여자에게서 답장이 왔다. 그녀는 세 블럭 정도밖에 떨어져있지 않은 바에 있다. 마루는 그리로 걸음을 재촉한다. ..
앙드레 지드, <반도덕주의자> 앙드레 지드, 동성식 옮김, ⟪반도덕주의자(L'immoraliste)⟫, 민음사, 2017, 모든 강조는 필자. 남편 미셸의 병이 낫고 생명력이 고양되는 가운데 아내 마르슬린의 병은 악화되어가는 서사를 기둥으로 갖는 이야기이다. 미셸은 건강해져감과 동시에 마르슬린의 표현을 빌리면 약자를 말살하는 반도덕주의를 개진해나간다. 하지만 정작 그 주의가 아내를 죽음으로 몰아가자 무력감과 허무주의에 빠져든다. 제목에 걸맞게 조금 더 뻔뻔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몰개성을 도덕으로 치부하는 사회를 삐딱하게 생각하는 메날크라는 인물만큼은 매우 좋았다. "처음에 나는 어떤 소설가나 시인 들에게서 삶에 대한 좀 더 직접적인 이해를 발견하기를 기대했다. 하지만 그들은, 그러한 이해가 있었다 해도, 솔직히 말해..
프리드리히 니체, <힘에의 의지> 발췌 및 메모 보호되어 있는 글입니다.
20230518 글이 너무 쓰고 싶어서 또 쓰는 일기 1. 오랫동안 일기를 너무 자주 쓰면 안 된다는 생각을 했다. 나 자신의 세부를 세상에 노출시키는 데 대한 두려움이 컸다. 왜냐고 묻는다면 어떻게 딱 잘라 설명하기 어려운, 비합리적인 자기혐오의 발로라고 말해야 할 것 같다. 하지만 요새는 글 쓰는 행위가 너무 그립다.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그렇다. 본명을 걸든, 필명을 걸든, '바보바보' 같은 바보스러운 가명을 걸든 상관 없으니 뭔가를 내고 싶다. 그러려면 누군가 나의 글 그리고 글 너머의 나를 미워하면 어쩌지? 누군가 나의 글, 글 너머의 나를 미워한다면 그건 세계의 종말일 텐데, 라는 식으로 흘러가는 소위 자동적 사고의 흐름을 끊어야 한다. 나에겐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들이 있다, 심지어는 나의 못난 모습들을 보고 나서도. 무엇보다 문창과 나온 J씨..
라 누벨 마리(2022.9) 라 누벨 마리 아담한 식당이었다. 몇 개 되지 않는 테이블을 에메랄드 색 벽지가 따스한 빛깔로 둘러싸고 있었다. 유창한 영어를 구사하는 종업원이 나에게 메뉴를 가져다주면서 설명해줄까요? 라고 물었다. 하지만 나는 이미 내가 무엇을 먹을지를 알고 있었다. 치즈와 감자를 섞어 걸쭉하게 만든, 알리고란 이름의 프랑스식 요리였다. 삼 년 전, 무라사키 하나라는 이름의 여행 작가의 책에서 알리고에 대해 읽은 적이 있었다. 끈적하지만 잘 끊어지고, 황금빛이지만 구수하고, 먹다 보면 든든해지는 것을 넘어 듬직한 것이 뱃속에 들어차는 기분이라고 무라사키는 썼다. 듬직한 것을 먹는다는 그 기분을 궁금해한 지가 무려 삼 년이었다. 궁금증은 오랜 시간 환상의 입구가 되어주었다. 나는 직장의 점심 시간에 동료와의 수다나 간식..
20230503 근황과 즉흥적인 메모 한 편의 소설을 위한 즉흥적 메모: 로마는 식은땀을 흘리면서 잠에서 깨어난다. 눈을 뜨자마자 새까만 딱따구리 한 마리가 가슴에 내려앉은 듯 찌릿한 흉통이 인다. 램프가 올려진 침대가의 테이블 위에 약 봉지가 있다. 하지만 물이 없기 때문에 부엌으로 나가야 한다. 부엌에서는 로마와 이미 8년을 만났으며 서로 사실혼 관계에 있는 애인 하명이 커피를 마시면서 책을 읽고 있다. 로마는 물 대신 하명의 커피로 약을 집어삼킨다. 뭐 읽어? 하고 물으니 하명이 프루스트의 소설책을 내민다. 로마는 프루스트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의 시선이 언제나 지나치게 예민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하명에게 굳이 이야기하지는 않는데, 그의 심기를 건드리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하명이 소포 하나를 가리키며 말한다. 네게 우편이 왔어. 소..
20230428 무제 울적한 밤이다. 오늘 하루 있었던 일들을 추적하다 보면 내가 왜 지금 울적한지 알 수 있을 것도 같지만, 사실 둘 사이에는 별다른 상관관계가 없을 것이다. 내가 느끼는 많은 슬픔은 선험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특정한 경험에 의해 빚어졌으나, 나에게 너무나 커다란 충격을 안긴 나머지 어느 샌가부터 내가 나 자신과 세상을 바라보는 렌즈가 되어버린. 모든 경험이 통과하는 필터 같은 것이 되어버린. 그래서 경험의 가능조건 따위로 굳어 하루하루 나를 거쳐가는 경험으로부터 독립적으로 성립하게 된, 그런 슬픔들. 경험이 선험으로 변신해가는 나날을 보내왔기 때문에 나는 역사와 본질이 서로 충돌하지 않는다고 믿는다. 아침. 잠에서 갓 깬 채로 비몽사몽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었는데, 엄마가 방 안으로 들어와 내 옆에 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