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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번역

임마누엘 레비나스, <시간과 타자> 서문(préface) 번역

Emmanuel Levinas, Le temps et l’autre, Presses Universitaires de France, 1983 (originally published at Fata Morgana, 1979), 8-11. 모든 볼드처리 및 '[]' 안의 내용은 필자의 것, 레비나스의 강조는 이탤릭체로 처리.

"[거리 있는 것과의] 가까움이 [즉각적인] 주어짐[=소여]의 사실보다 소중하다는 것, 비할 데 없는 것(l’inégalable, 독보적인 것)에 대한 충성(allégeance)이 자기의 양심(une conscience de soi)보다도 낫다는 것, 여기에 종교의 어려움과 드높음(hauteur)이 있지 않은가?"(10-11)

2022년 여름에 사고 지금에서야 다시 펼쳐봤다.

 시간은 절대적으로 타자적인 것과의 관계가 갖는 이름이라는 것이 요지다.

 사실 (레비나스가 완전한 이해라는 미망 하에 타자성을 해친다고 반기를 든) 후설의 지향성 테제 내에도 지향성의 한계에 대한 인식, 즉 지향적 작용이 대상을 불충전적으로만(inadäquat=부분적으로만) 파악한다는 통찰이 명시적으로 드러나있다. 초기에는 외부 지각에 한정된 이야기였지만, 시간의식에 대한 후설의 탐구가 심화함에 따라 내적 지각 즉 주체가 자기의 마음 속을 들여다보는 작용에 대해서도 그 불충전성이 인정됐다. 심지어는 레비나스가 주목하고 있는 타인지각 역시, 제5데카르트적 성찰에서 혹자에게는 은밀하게 혹자에게는 노골적으로 드러났듯, 본질적으로 불완전한 것으로 선언되었다. 다만 레비나스는 이 불완전성의 함의를 훨씬 급진적으로 밀어붙이는 것처럼 보인다.* 내가 보기에 둘 사이의 차이로 중요한 것은 후설에게는 여전히 충전성이 인식의 이념으로 남아있는 반면, 레비나스는 충전성의 달성을 기만적이기 이전에 폭력적인 것으로 사유한다는 점 같다. 결국 똑같이 인식의 한계를 수긍한다 해도, 어떻게 수긍하냐에서 차이가 난다. 아직 공부가 부족하지만 적어도 여태까지의 소결은 이렇다.

*지향적 작용에 의해 포착되지 않는 어떤 잉여에 대한 사유는 후설과 레비나스 모두에게 큰 영향을 받은 베른하르트 발덴펠스의 초기 사유에도 나타난다. 발덴펠스에게 저 잉여는 도덕보다도 근본적인 해석적, 실천적 요구의 근원으로 사유된다. 그리하여 발덴펠스에게는, 적어도 내가 읽은 한계 내로는 그 자신이 이 단어를 쓰지는 않지만, 윤리적 창의성이 무척 중요하다.

 5년 전, 처음 후설을 공부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나는 충전성 및 (그와 다르긴 해도 유관한) 필증성(Apodiktizät=의심 불가능성)의 개념에 지나치게 꽂혀있었다. 관련해서 지배적인 해석을 반박하는 내용의 석사논문을 쓰면서는 혹시 내가 잘못된 길을 걷고 있는 것이 아닌가 불안했다. 하지만 나만의 언어로 철학사를 이해한다는 것은, 결국 나만의 사유상의 출발점이 될 수 있는 개념을 기존과 다른 새로운 방식으로 조명한다는 의미일 테다. 초기의 우연한 집착이 현상학사를 공부하는 데 큰 도움이 돼 이제는 무척 기쁘다.

 인식론의 동기가 진하게 배있는 후설의 지향성 개념을 염려(Sorge), 퇴락(Verfallen)과 같은 존재론의 언어로 번역하고자 한 하이데거와, 타자를 자아의 협소한 시각에서 이해하려 해온 철학사의 대안을 꿈꾸며 존재의 피안에로의 탈출(evasion)*을 상상한 레비나스, 한편 타자든 자기든 모든 인간의 존재를 무로 만들어버린 사르트르 및 (그처럼 냉소적인 애인을 대신해) 용감무쌍한 윤리학을 세운 보부아르까지, 현상학사는 마치 철학자들의 영웅전과 같이 전개되었다.

*그러나 도망은 아닌, 그 어떤 도망보다도 현저히 무거운 책임을 지는.


[8] […] 시간, 그것은 유한한 존재의 한계 그 자체 또는 유한한 존재가 신(Dieu)과 맺는 관계가 아닌가? 그렇다고 해서 유한성과 반대되는 무한성, 필요에 반대되는 자족성을 존재에 보장해주지는 않고 다만, 만족과 불만족[의 이분법]을 넘어, 사회의 잉여(le surplus de la socialité)*를 의미하는 관계 말이다. 시간에 대한 이와 같은 질문 방식[접근 방식]은 우리에게 오늘날 다시금 살아있는 문제로 보인다. ⟪시간과 타자⟫는 [하이데거에 반해] 시간을 존재자의 존재[가 거하는] 존재론적 지평으로서가 아니라, 존재의 피안(au-dèla de l'être)[이 펼쳐지는] 지평으로서, ⟪사유(pensée)⟫가 타자(Autre)와 맺는 관계로서 그리고—타 인간의 얼굴을 대면한 [다음의] 다양한 형태의 사회를 거쳐서: 에로티즘, 부성(paternité), 다음[의 세대]에 대한 책임 —[사유가] 궁극적 타자(Tout Autre), 초월자, 무한에 대해 맺는 관계로서 예감한다. 관계 또는 종교[, 다만] 지식(savoir)과 같이, 곧 지향성과 같이 구조화되지 않는 [것으로서의 관계 또는 종교 말이다]. 이것[=지향성]은 재-현을 내포하며[9] 타자(autre)를 현전과 공현전에로 다시 데려오[고 만]다. 그에 반해 시간은 그것의 통-시성(dia-chronie) 속에서 다음을 의미할 것이다. [바로] 타자(autre)의 타자성을 해치지 않는 동시에, ⟪사유⟫에 대한 타자성의 유관성(non-indifférence, 무차별하지-않음)을 보장해주는 관계[를].**

*사회가 미처 포섭하지 못하는, 사회 이상의 관계성으로 읽었다.

**시간이 [인간으로 하여금] 타자성을 사유 가능하게 해주면서도, 타자성에 대한 사유가 현전하는 지향적 대상에 대한 지식이 되지는 않게 해준다는 뜻 같다. 

 유한한 존재의 양상(modalité, 존재 방식)으로서 시간은 실질적으로(en effet, 실제에서는) 다음을 의미해야 할 것이다. [바로] 존재자의 존재가 [어떤] 순간들(moments), 서로에게 외재적이며(s’excluent) 아울러 불안정하거나 스스로에게 충실하지 못해 각기 자기 자신을 과거 속에로 추방하는 그런 순간들 내에 분산되는(dispersion, 흩어지는) 일을 말이다. [이러한 외재와 추방 가운데서 시간은] 제 고유한(propre, 적합한, 마땅한) 현전의 밖에서[=저에게 적합한 방식으로 현전하지 못하기는 하지만] 다만 이[처럼 저에게 적합한] 현전의 찬란한 관념[만큼]은 제공한다. [저에게 적합한] 현전과 관련해 순간들은 결국 무의미와 의미, 죽음과 삶 모두를 가리킬(suggéreraient) 것이다. 그러나 이에(dès lors) 영원성—지성이 [직접] 살아지는[=체험되는] 시간은 조금도 참조하지 않고 아프리오리하게 그에[=영원에] 대한 어떤 관념, [곧] 그 안에서 다자(le multiple)가 [결국] 하나가 되며 현재에 완전하게(plein) 그 의미를 부여할 존재의 [한] 양상[=방식]이라는 관념을 소유하고 있다고 [부당하게] 우길 것인—그것[=영원성]이 순간(instant)의 광채를—반(demi)-진실을—은폐하기만 한다는 것[=그저 은폐한다는 것]이 언제나 수상쩍지 않은가?* 비시간적인 것과 유희할 줄 알고[=안다고 거짓되게 믿고?], 집합될 수 없는 것의 집합[가능성]에 대해 착각할 줄 아는 그런 상상력 속에 갇힌 그런 순간[의 광채] 말이다. 이런 영원성 그리고 이 지적인 신이란 결국 저 추상적이고 불안정한 반-순간들의 시간적 분산의 혼합물[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추상적인 영원성 그리고 죽은 신 말이다.

*이 문장은 잘 이해하지 못했다.

 그에 반해 ⟪시간과 타자⟫ 속에 어렴풋이 예감된 주요 테제는 시간을 영원성의 타락(dégradation)으로서가 아니라 그 자체로 동화될 수 없고, 절대적으로 다르며[=타자적이며], 자신이 [10] 경험에 의해 동화되도록 허락하지 않을 그런 무엇(ce), 또는, 그 자체로 무한하며, 자신이 이해되도록(com-prehendre) 두지 않을 그런 무엇과의 관계로서 사유하는 데 있다. 단(toutefois) 이러한 무한 또는 이러한 타자(Autre)가 누군가 손가락으로 그것을 지시사 ‘이[, 그, 저]’로, 마치 단순한 물건처럼 지시하는 일을, 또는 누군가 그것이 형태를 취하도록 그것에 정관사나 부정관사를 붙여주는 일을 여전히 참아줘야 한다면 말이다. 

 [다시 말해] 비-가시적인 것과의 관계, 그 속에서 비가시성이 인간 인식의 불능 때문이 아니라 인식 자체가 절대적으로 다른 것(autre)의 무한[성]과는 부적합하기(inaptitude) 때문에—[즉] 그것의 불-합치(in-adéquation) 때문에—, 여기서 일치(coïncidence)와 같은 사건이 [일어난다면 귀결될] 부조리 때문에 생겨나는 그런 관계[로서 시간을 사유하겠다는 뜻이다]. 일치의 불가능성, 불-합치는 순전히 부정적인 개념이 아니며 시간의 통-시성 속에서 주어지는 의미를 불-일치의 현상 속에서 [=과 관련해?] 가진다. 시간은 불-일치의 영속적 상태(ce toujours)이지만, 관계영속적 상태이기도 하다—열망과 기다림[=기대][의 영속적 상태]: 이상적[관념적] 선보다도 질긴 그리고 통시성이 자를 수 없는 실(fil, 끈, 연결고리); 통시성은 그것[=실]을 어떤 관계, 우리의 논리학과 심리학의 모든 다른 관계와는 이질적인 그런 관계의 패러독스 속에 보존한다. 논리학과 심리학은 궁극적인 공동체로[=공동체를 통해] 적어도 자신들의 용어들에 동시성을 부여한다. [그에 반해] 용어 없는 관계, 기다려지는 것 없는 기다림, 충족될 수 없는 열망이 여기에 있다. 가까움(proximité)이기도 한 거리[, 이는] 실패한 일치나 통합(union)이 아니라 그저—이미 우리는 말한 바 있다—근원적(originelle) 사회성의 잉여 또는 그것의 모든 장점(bien, 좋음)을 의미한다. 통-시성이 동시성 이상이라는 것, [거리 있는 것과의] 가까움이 [11] [즉각적인] 주어짐[=소여]의 사실보다 소중하다는 것, 비할 데 없는 것(l’inégalable, 독보적인 것)에 대한 충성(allégeance)이 자기의 양심(une conscience de soi)보다 낫다는, 여기에 종교의 어려움과 드높음(hauteur)이 있지 않은가? 이 ⟪거리-가까움⟫에 대한 모든 기술들은 막연하거나(approximatives) 비유적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속에서[=막연하거나 비유적인 기술들 속에서][만] 시간의 통-시성은 문자적 의미이자 마땅한[=고유한, 적합한] 의미, 그리고 모델이기 때문이다. 

 ⟪모든 타자(Autre)⟫의 무한[성]에로의 초월로 이해된 시간의 ⟪운동⟫은 선형적으로 시간화되지 않으며, 지향적 광선의 직선성을 닮아있지도 않다. 죽음의 신비가 특징적인  그것[시간의 운동]이 [무언가를] 의미하는 방식은 우회로를 택하면서 동시에 타 인간과의 관계라는 윤리적 모험(aventure)*에 들어선다. [...]

*더 공부해봐야 알겠지만, 윤리가 누군가 완전한 지식과 권력을 가지고 규범화할 수 있는 무엇이 아님을 함축하는 것 같아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