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mmanuel Levinas, Le temps et l’autre, Presses Universitaires de France, 1983 (originally published at Fata Morgana, 1979), 8-11. 모든 볼드처리 및 '[]' 안의 내용은 필자의 것, 레비나스의 강조는 이탤릭체로 처리.
"[거리 있는 것과의] 가까움이 [즉각적인] 주어짐[=소여]의 사실보다 소중하다는 것, 비할 데 없는 것(l’inégalable, 독보적인 것)에 대한 충성(allégeance)이 자기의 양심(une conscience de soi)보다도 낫다는 것, 여기에 종교의 어려움과 드높음(hauteur)이 있지 않은가?"(10-11)
시간은 절대적으로 타자적인 것과의 관계가 갖는 이름이라는 것이 요지다.
사실 (레비나스가 완전한 이해라는 미망 하에 타자성을 해친다고 반기를 든) 후설의 지향성 테제 내에도 지향성의 한계에 대한 인식, 즉 지향적 작용이 대상을 불충전적으로만(inadäquat=부분적으로만) 파악한다는 통찰이 명시적으로 드러나있다. 초기에는 외부 지각에 한정된 이야기였지만, 시간의식에 대한 후설의 탐구가 심화함에 따라 내적 지각 즉 주체가 자기의 마음 속을 들여다보는 작용에 대해서도 그 불충전성이 인정됐다. 심지어는 레비나스가 주목하고 있는 타인지각 역시, 제5데카르트적 성찰에서 혹자에게는 은밀하게 혹자에게는 노골적으로 드러났듯, 본질적으로 불완전한 것으로 선언되었다. 다만 레비나스는 이 불완전성의 함의를 훨씬 급진적으로 밀어붙이는 것처럼 보인다.* 내가 보기에 둘 사이의 차이로 중요한 것은 후설에게는 여전히 충전성이 인식의 이념으로 남아있는 반면, 레비나스는 충전성의 달성을 기만적이기 이전에 폭력적인 것으로 사유한다는 점 같다. 결국 똑같이 인식의 한계를 수긍한다 해도, 어떻게 수긍하냐에서 차이가 난다. 아직 공부가 부족하지만 적어도 여태까지의 소결은 이렇다.
*지향적 작용에 의해 포착되지 않는 어떤 잉여에 대한 사유는 후설과 레비나스 모두에게 큰 영향을 받은 베른하르트 발덴펠스의 초기 사유에도 나타난다. 발덴펠스에게 저 잉여는 도덕보다도 근본적인 해석적, 실천적 요구의 근원으로 사유된다. 그리하여 발덴펠스에게는, 적어도 내가 읽은 한계 내로는 그 자신이 이 단어를 쓰지는 않지만, 윤리적 창의성이 무척 중요하다.
5년 전, 처음 후설을 공부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나는 충전성 및 (그와 다르긴 해도 유관한) 필증성(Apodiktizät=의심 불가능성)의 개념에 지나치게 꽂혀있었다. 관련해서 지배적인 해석을 반박하는 내용의 석사논문을 쓰면서는 혹시 내가 잘못된 길을 걷고 있는 것이 아닌가 불안했다. 하지만 나만의 언어로 철학사를 이해한다는 것은, 결국 나만의 사유상의 출발점이 될 수 있는 개념을 기존과 다른 새로운 방식으로 조명한다는 의미일 테다. 초기의 우연한 집착이 현상학사를 공부하는 데 큰 도움이 돼 이제는 무척 기쁘다.
인식론의 동기가 진하게 배있는 후설의 지향성 개념을 염려(Sorge), 퇴락(Verfallen)과 같은 존재론의 언어로 번역하고자 한 하이데거와, 타자를 자아의 협소한 시각에서 이해하려 해온 철학사의 대안을 꿈꾸며 존재의 피안에로의 탈출(evasion)*을 상상한 레비나스, 한편 타자든 자기든 모든 인간의 존재를 무로 만들어버린 사르트르 및 (그처럼 냉소적인 애인을 대신해) 용감무쌍한 윤리학을 세운 보부아르까지, 현상학사는 마치 철학자들의 영웅전과 같이 전개되었다.
*그러나 도망은 아닌, 그 어떤 도망보다도 현저히 무거운 책임을 지는.
[8] […] 시간, 그것은 유한한 존재의 한계 그 자체 또는 유한한 존재가 신(Dieu)과 맺는 관계가 아닌가? 그렇다고 해서 유한성과 반대되는 무한성, 필요에 반대되는 자족성을 존재에 보장해주지는 않고 다만, 만족과 불만족[의 이분법]을 넘어, 사회의 잉여(le surplus de la socialité)*를 의미하는 관계 말이다. 시간에 대한 이와 같은 질문 방식[접근 방식]은 우리에게 오늘날 다시금 살아있는 문제로 보인다. ⟪시간과 타자⟫는 [하이데거에 반해] 시간을 존재자의 존재[가 거하는] 존재론적 지평으로서가 아니라, 존재의 피안(au-dèla de l'être)[이 펼쳐지는] 지평으로서, ⟪사유(pensée)⟫가 타자(Autre)와 맺는 관계로서 그리고—타 인간의 얼굴을 대면한 [다음의] 다양한 형태의 사회를 거쳐서: 에로티즘, 부성(paternité), 다음[의 세대]에 대한 책임 —[사유가] 궁극적 타자(Tout Autre), 초월자, 무한에 대해 맺는 관계로서 예감한다. 관계 또는 종교[, 다만] 지식(savoir)과 같이, 곧 지향성과 같이 구조화되지 않는 [것으로서의 관계 또는 종교 말이다]. 이것[=지향성]은 재-현을 내포하며[9] 타자(autre)를 현전과 공현전에로 다시 데려오[고 만]다. 그에 반해 시간은 그것의 통-시성(dia-chronie) 속에서 다음을 의미할 것이다. [바로] 타자(autre)의 타자성을 해치지 않는 동시에, ⟪사유⟫에 대한 타자성의 유관성(non-indifférence, 무차별하지-않음)을 보장해주는 관계[를].**
*사회가 미처 포섭하지 못하는, 사회 이상의 관계성으로 읽었다.
**시간이 [인간으로 하여금] 타자성을 사유 가능하게 해주면서도, 타자성에 대한 사유가 현전하는 지향적 대상에 대한 지식이 되지는 않게 해준다는 뜻 같다.
유한한 존재의 양상(modalité, 존재 방식)으로서 시간은 실질적으로(en effet, 실제에서는) 다음을 의미해야 할 것이다. [바로] 존재자의 존재가 [어떤] 순간들(moments), 서로에게 외재적이며(s’excluent) 아울러 불안정하거나 스스로에게 충실하지 못해 각기 자기 자신을 과거 속에로 추방하는 그런 순간들 내에 분산되는(dispersion, 흩어지는) 일을 말이다. [이러한 외재와 추방 가운데서 시간은] 제 고유한(propre, 적합한, 마땅한) 현전의 밖에서[=저에게 적합한 방식으로 현전하지 못하기는 하지만] 다만 이[처럼 저에게 적합한] 현전의 찬란한 관념[만큼]은 제공한다. [저에게 적합한] 현전과 관련해 순간들은 결국 무의미와 의미, 죽음과 삶 모두를 가리킬(suggéreraient) 것이다. 그러나 이에(dès lors) 영원성—지성이 [직접] 살아지는[=체험되는] 시간은 조금도 참조하지 않고 아프리오리하게 그에[=영원에] 대한 어떤 관념, [곧] 그 안에서 다자(le multiple)가 [결국] 하나가 되며 현재에 완전하게(plein) 그 의미를 부여할 존재의 [한] 양상[=방식]이라는 관념을 소유하고 있다고 [부당하게] 우길 것인—그것[=영원성]이 순간(instant)의 광채를—반(demi)-진실을—은폐하기만 한다는 것[=그저 은폐한다는 것]이 언제나 수상쩍지 않은가?* 비시간적인 것과 유희할 줄 알고[=안다고 거짓되게 믿고?], 집합될 수 없는 것의 집합[가능성]에 대해 착각할 줄 아는 그런 상상력 속에 갇힌 그런 순간[의 광채] 말이다. 이런 영원성 그리고 이 지적인 신이란 결국 저 추상적이고 불안정한 반-순간들의 시간적 분산의 혼합물[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추상적인 영원성 그리고 죽은 신 말이다.
*이 문장은 잘 이해하지 못했다.
그에 반해 ⟪시간과 타자⟫ 속에 어렴풋이 예감된 주요 테제는 시간을 영원성의 타락(dégradation)으로서가 아니라 그 자체로 동화될 수 없고, 절대적으로 다르며[=타자적이며], 자신이 [10] 경험에 의해 동화되도록 허락하지 않을 그런 무엇(ce), 또는, 그 자체로 무한하며, 자신이 이해되도록(com-prehendre) 두지 않을 그런 무엇과의 관계로서 사유하는 데 있다. 단(toutefois) 이러한 무한 또는 이러한 타자(Autre)가 누군가 손가락으로 그것을 지시사 ‘이[, 그, 저]’로, 마치 단순한 물건처럼 지시하는 일을, 또는 누군가 그것이 형태를 취하도록 그것에 정관사나 부정관사를 붙여주는 일을 여전히 참아줘야 한다면 말이다.
[다시 말해] 비-가시적인 것과의 관계, 그 속에서 비가시성이 인간 인식의 불능 때문이 아니라 인식 자체가 절대적으로 다른 것(autre)의 무한[성]과는 부적합하기(inaptitude) 때문에—[즉] 그것의 불-합치(in-adéquation) 때문에—, 여기서 일치(coïncidence)와 같은 사건이 [일어난다면 귀결될] 부조리 때문에 생겨나는 그런 관계[로서 시간을 사유하겠다는 뜻이다]. 일치의 불가능성, 불-합치는 순전히 부정적인 개념이 아니며 시간의 통-시성 속에서 주어지는 의미를 불-일치의 현상 속에서 [=과 관련해?] 가진다. 시간은 불-일치의 영속적 상태(ce toujours)이지만, 관계의 영속적 상태이기도 하다—열망과 기다림[=기대][의 영속적 상태]: 이상적[관념적] 선보다도 질긴 그리고 통시성이 자를 수 없는 실(fil, 끈, 연결고리); 통시성은 그것[=실]을 어떤 관계, 우리의 논리학과 심리학의 모든 다른 관계와는 이질적인 그런 관계의 패러독스 속에 보존한다. 논리학과 심리학은 궁극적인 공동체로[=공동체를 통해] 적어도 자신들의 용어들에 동시성을 부여한다. [그에 반해] 용어 없는 관계, 기다려지는 것 없는 기다림, 충족될 수 없는 열망이 여기에 있다. 가까움(proximité)이기도 한 거리[, 이는] 실패한 일치나 통합(union)이 아니라 그저—이미 우리는 말한 바 있다—근원적(originelle) 사회성의 잉여 또는 그것의 모든 장점(bien, 좋음)을 의미한다. 통-시성이 동시성 이상이라는 것, [거리 있는 것과의] 가까움이 [11] [즉각적인] 주어짐[=소여]의 사실보다 소중하다는 것, 비할 데 없는 것(l’inégalable, 독보적인 것)에 대한 충성(allégeance)이 자기의 양심(une conscience de soi)보다 낫다는 것, 여기에 종교의 어려움과 드높음(hauteur)이 있지 않은가? 이 ⟪거리-가까움⟫에 대한 모든 기술들은 막연하거나(approximatives) 비유적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속에서[=막연하거나 비유적인 기술들 속에서][만] 시간의 통-시성은 문자적 의미이자 마땅한[=고유한, 적합한] 의미, 그리고 모델이기 때문이다.
⟪모든 타자(Autre)⟫의 무한[성]에로의 초월로 이해된 시간의 ⟪운동⟫은 선형적으로 시간화되지 않으며, 지향적 광선의 직선성을 닮아있지도 않다. 죽음의 신비가 특징적인 그것[시간의 운동]이 [무언가를] 의미하는 방식은 우회로를 택하면서 동시에 타 인간과의 관계라는 윤리적 모험(aventure)*에 들어선다. [...]
*더 공부해봐야 알겠지만, 윤리가 누군가 완전한 지식과 권력을 가지고 규범화할 수 있는 무엇이 아님을 함축하는 것 같아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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