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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2024년 7월의 독서

옥스포드 VSI 시리즈의 국역본을 문학동네의 임프린트인 교유서가에서 내고 있다.

 7월에는 스타벅스 기프트카드가 생겨서 거의 매일 카페 창가에서 책을 읽었다. ⟪나르시시즘의 고통⟫을 읽으면서 갓 출시된 멜론 프라푸치노를 마셨던 날의 행복을 특히 잊지 못한다. 홀린 듯이 ⟪초대받은 여자⟫의 결말부를 읽어내렸던 날도...

 한편 피아노 학원에서는 J씨께서 추천해주신 그리그의 야상곡 연습을 마무리하고 '쉬운 소나타'라 불리는 베토벤의 곡 하나를 새로 시작했다. 레슨을 받으면서 처음으로 소프트 페달을 효과적으로 사용해봤고, 선명하게 치는 것과 크게 치는 것의 차이, 테누토의 미세하면서도 결정적인 영향력 등을 배웠다. 하농과 아르페지오를 반복하면서 부적절했던 손목 높이를 낮춰보기도 했다. 엄연한 초짜지만, 아무튼지 간에 나날이 실력이 향상되는 것이 느껴진다.

 7월 말부터는 대한민국의 올림픽 경기를 챙겨보느라 공부량이 현저하게 줄었다. 어느 정도로 챙겨봤냐면 전 종목에서 거의 모든 메달 획득의 순간을 무려 실시간으로 지켜봤다. 올림픽에서의 성과를 개인의 업적을 넘어 국가의 위상과 연결 짓는 마음가짐이 어떤 의미에서는 전체주의적이라는 지적이 따끔하고, 한 선수가 출생이나 귀화를 통해 특정 국가를 대표하게 되는 사태 및 선수의 성취와 해당 국가의 구성원인 나 사이에 무매개적인 연결고리가 존재한다는 주장이 정확히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는 모르겠지만, 대한민국 선수가 멋진 기록을 내면 일단 기분이 무척 좋다. 같은 법, 유사한 교육 환경을 거쳤다는 상황적 전제 하에서 내가 선택하지 않은 길을 과감히 선택해 나아간 모습이 감동스러운 것 같다.

 8월에는 제출을 미룬 리포트를 하나 써야 하고, 박사논문의 뼈대를 잡아야 한다. 후자는 아마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특정한 지점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에 활동한 현상학자들에 의해 내세워진 양심 개념에 대한 역사적 서술 또는 양심의 시간성에 대한 현상학적 연구 중 하나로 갈피를 잡을 것 같다. 로마 공화정에서 'conscientia'라는 단어가 쓰인 이래 2000년이 넘도록 서구세계에서 양심은 공동체가 표방하는 규범과 개인의 내면적 소신 사이의 갈등을 중심으로 주제화되었다. 후자를 종교개혁가들처럼 옹호하든, ⟪법철학⟫에서의 헤겔처럼 비판하든지 간에 일관적으로 말이다. 그런데 내 관찰이 맞다면 바이마르 공화국 현상학자들의 경우 (아마 셸러 정도의 예외를 제하면) ①양심의 이념 또는 이상적인 작동과 양심의 현실 사이의 갈등을 주제화하는 경향이 있다. 후자가 전자에 이르는 것이 실질적으로 불가능하기에 현실에서의 양심의 노고는 무한하고 문자 그대로 쉼이 없는 것으로 기술된다(restless). ②현상학에서 불안이 그토록 중대한 주제로 다뤄지는 것은 이 쉼없음과 필시 상관이 있어보이는데, 이 연결고리가 만족스러운 방식으로 설명된 문헌을 아직 보지 못했다. 후설의 불안 개념부터 심지어는 후설 스콜라쉽 내부에서도 잘 알려져 있지 않은 탓이다. 이를 다룬다면 분명히 내가 연구사에 기여할 바가 있다(아이 설레!!!).

 나아가 바이마르 공화국 철학자들은 셸러를 필두로 ③도덕적 판단--실은 가치론적 판단 일반--에서 감정의 역할을 중시한다. 나의 정식화에 따르면 이들에게 의지는 감정에 대한 응답의 기관(respondent)으로 이해된다. 이 연장선에서 ④칸트의 의무론적 윤리에 대한 반감, 그럼에도 그것의 이점을 취하려는 노력이 때로는 노골적으로, 때로는 은밀하게 공유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그들에게 양심의 작동은 비단 보편적으로 타당한 도덕적 판단을 넘어 저마다 특수한 개성의 정립과도 관계가 있다. 다시 말해 ⑤양심과 진정성(authenticity) 사이의 필연적인 개념적 연루가 단순히 수면 위로 드러나는 것 이상으로 중요하게 취급된다. 이처럼 어쩌면 양심에 대한 한 학파라고도 불려도 괜찮을 정도로 사상적 특수성을 공유함에도 불구하고, 양심에 대한 철학사적 서술에서 바이마르 공화국의 현상학자들이 배제되어왔음은 당황스럽다. 양심을 도덕 이전의 무엇으로 설정한 전기 하이데거 철학의 급진성은 철학사적인 맥락 하에서만 정확하게 감정될 수 있다.


1. 마이클 하워드 지음, 최파일 옮김, ⟪제1차세계대전⟫, 교유서가, 2015.

 요새 유럽 현대사가 너무 재미있다. 철학은 역사를 초월하는 진리를 꿈꾼다는 미망 하에 여태껏 역사 공부를 도외시한 일이 정말 무책임했다는 생각이 든다. 20세기 초 독일의 엘리트들이 프랑스와 영국의 민주주의를 경박한 타락으로 생각하고, 사회주의 역시 피하고자 하면서 '독일적인 것이란 무엇인가'라는 (위험한) 물음을 던졌다는 사실이 흥미로웠다. 정치에 대해 상대적으로 무관심해보이는 후설의 글에서조차 왜 'Staat'이나 'Volk'라는 단어가 그토록 여러 번 쓰이는지 이제는 알 수 있다. 그리고 강대국들 사이에 껴서 전쟁터가 되어버린 벨기에가 너무 불쌍하다고 느꼈다. 아무튼 애인이 이 책을 빌려준 덕에 양차대전 사이 'interwar period'의 역사에 대한 관심이 생겼다. 같은 시기의 독일사를 전공하신 분께서 운영하시는 듯한, '함께하는 세계사'라는 유튜브 채널도 구독했다. 매일 듣(다가 잠든)다...

2. Eugene Kelly, Material Ethics of Value: Max Scheler and Nicolai Hartmann, Springer, 2011.

 1921년에 셸러가 ⟪인간 안에서의 영원한 것⟫을, 1926년에 하르트만이 ⟪윤리학⟫을 썼기에 1920년대 철학 씬에 대해 이해하기 위해 선택했다. 두 철학자 사이의 비교를 방법론으로 가지지만, 근본적인 기획은 역사적 서술이 아니라 가치 중심의 비형식주의 윤리학에 대한 서론을 표방하기에 서술 순서나 방식 등이 좀 복잡하다. 그래도 흥미로웠던 지점들은 다음과 같다(원문의 강조 표시들은 배제했다).

a. "[...] the source of all ethics is a phenomenologically discoverable universal order of loving and hating the values themselves and the things and events and persons upon which they appear."(p. 11)*

b. 셸러의 현상학적 직관에 따르면 가치들 사이의 규범적 위계는 내재적으로(intrinsically) 결정되어있다(see p. 33).**

c. 하르트만은 셸러가 (그 자신의 변명과 달리) 도덕을 종교에 의해 정초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 the weight of the divine judgment inevitably destroys the human autonomy that is central to ethics. An antinomy exists between religion and ethics, Hartmann believed." (p. 189) cf. "If the ideal image of an agent [...] is posited by God, then ethics becomes heteronomous." (p. 191)

d. 하르트만에게 자연과 가치 사이의 긴장에서 발생하는 "양심[이라는 현상]은 도덕적 가치에 대한 지식의 근원이다."(p. 111)

e. 셸러에 따르면 이미 사랑과 가치의 위계에 대한 통찰을 지니고 있는 사람에게 도덕과 관련하여 이래라 저래라 명령하는 것은 그 자체로 모욕(offence)이다. 명령중심의 윤리학(imperativistic ethics)은 행위자가 도덕을 위반할 가능성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f. 셸러에 따르면 보복은 정의의 실천 방식이 아니다. 악인의 책임뿐만 아니라 악인에 대한 우리의 책임도 있다(see p. 114).

g. 양심은 가치에 대한 통찰이 불완전할 때, 즉 일종의 문제적 불확실성이 지배하는 위기상황에서 통찰의 근원으로서 작동한다. 그러나 셸러는 양심의 귀결이 객관적 규범에 의해 제한되어야 한다고 명시한다. 양심에 귀를 기울인다고 해서 선한 판단이 자동으로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see p. 115).

e. 셸러에 따르면 특수한 상황에서, 특수한 주체에게만 의무가 되는 개별적 의무가 있을 수 있다(윤리에서 보편성이 생각보다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는 직관이 빛난다). 그런데 이처럼 의무의 절대화를 배제할 때에, 가치윤리학은 윤리적 상대주의 또는 도덕적 무정부주의를 부추기는 것이 아니냐는 비판에 노출된다. 그러나 가치윤리학이 도덕적 행위의 동기들 중 양심 또는 가치론적 직관을 규칙에 대한 맹목적 준수보다도 우선시함으로써 모종의 반권위주의적 색채를 띤다고 해서 아무런 요구 성격도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직관의 결과가 되는 규범이 절대적 의무로 굳어져서는 안 될 뿐이다("norms cannot trump values" (p. 132, see also p. 200)). 이는 개개인의 도덕적 자율성을 강조하는 인격주의 사조의 특수성과도 관계가 있다. 인간은 규범으로부터의 자율적 판단력을 향유한다는 것이다. 물론, 혹자는 여전히 가치윤리학이 'the seriousness of moral existence' 또는 도덕적 행위의 보편적 필요성을 훼손한다고 비판할 수 있다(see p. 122).

f. 셸러에 따르면 동일한 심리 구조, 동일한 사회적 역할을 공유하더라도 어떤 행위가 무엇을 의미할 것이냐는 전적으로 개별 인격에 달려 있는, 문자 그대로 퍼스널한 문제다. 인격이란 경험적 심리학에 의해 관찰 가능한 육체 및 자아와 달리 대상화될 수 없는(달리 말하면 직관될 수 없는) 비경험적, 정신적 현상이며 의미의 근원에 해당한다. 이처럼 정신으로서 인격은 작용(act)의 가능조건으로서 정초의 역할을 맡지만(foundational), 이를테면 작용 너머의 또는 위의 실체가 아님으로써 구체성을 보존한다. 요컨대 우리의 모든 작용에서 인격은 구체적으로 '거기에 있다.'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 인격은 시간을 초월해 있는 통일성의 이념(ideal)으로서 개별 작용이 그에 가까워질 수도, 멀어질 수도 있는 무엇이기도 하다(see p. 188). ['non-empirical'과 'goal-constituting'이라는 의미가 'ideal'에 애매하게 혼재돼있다.]

g. 반면 하르트만은 인격이 대상화될 수 없다는 셸러의 주장을 비판한다. 인격이 이념적 통일체가 아닌, 판단의 주체로서의 실재라 주장하는 그에 따르면 셸러 식의 인격주의는 책임의 문제를 도외시하고 만다. "Persons must be intuitable objects if they are to be assigned moral predicates, and persons are objects that exist in the world along with things. Only a continuous and immutable subjectivity can be made morally responsible for its purposive actions." (p. 191)

h. "The edifying power of love has primordial normative power, Scheler believed, insofar as it, by looking through the real into the ideal, enables us to intuit higher values than those that are at present real, and this loving vision inclines the beloved to their realization." (p. 220)

*직관이 윤리에 대한 지식 획득의 방법론으로서 얼마나 견실하게 작동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직관은 사태와의 무매개적인 접촉을 통한 오류 불가능성(에 가까운 타당성)을 지향하지만--후설이 ⟪현상학의 이념⟫에서 말하듯, 보이는데 보이지 않는다고 말할 수는 없으므로--모든 직관은 특수한 누군가의 직관으로서 직관하는 자라는 매개를 불가피하게 거치고 만다. 나에게는 명약관화한 것이 타인에게는 불투명할 때 타인이 틀린 것인지, 내가 틀린 것인지 판단하기가 쉽지 않다는 뜻이다. 직관을 방법론적으로 옹호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오만과 편견을 동시에 배제할 것인가?

**쾌락과 고통이 가장 낮은 가치의 단계를 구성하고 성과 속이 그 반대일 때, 아리스토텔레스 식으로 말하면 '목석 같은' 수도사의 삶이 절제와 욕망의 추구가 조화롭게 어우러져있는 속인의 삶보다 더 우월하다고 과연 말할 수 있는지 잘 모르겠다. 개별 가치에 대한 평가와 구체적인 삶에 대한 평가는 맥락이 많이 다른 것일까?

 덧붙이자면, (후설이라면 천인공노할지 모르겠지만) 요새 심리학과 윤리학 사이의 연속성을 강조하는 심리윤리학(psycho-ethics)에 관심이 많다. 예를 들어 일부 성격장애와 몇몇 악덕 사이의 무시하기 어려운 상관관계를 생각한다면 결코 인간의 심리 구조가 도덕의 권역으로부터 독립적이라고 말할 수 없다. 사실과 가치, 자연과 당위 사이의 이분법은 참으로 고리타분하다. 셸러에 대해 공부하면서, 어쩌면 심리윤리학의 기반은 인간을 한갓된 의식으로도, 한갓된 도덕적 행위자로도 말고 인격(person)이라는 총체로 보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다. 정작 셸러는 심리학과 윤리학을 칼 같이 구별하려 한 것 같지만(see p. 185).

3. Paul Strohm, Conscience: a Very Short Introduction, Oxford University Press, 2011.

 폼 미쳤다는 말이 절로 나오는 VSI 시리즈의 양심 편. 영문학자가 서술한 양심 개념의 역사가 담겼다. 가톨릭 교회공동체에 의해서든, 종교개혁가들에 의해서든 기독교 신학에서 회자되던 양심이 어떻게 세속화되었으며 종국에는 도스토예프스키, 니체, 프로이트라는 양심의 비평가들을 만나게 됐는지를 풍부한 문학적 예시를 통해 서술한다. 신적 vs. 자연적 또는 세속적, 개인주의적 vs. 관습적, 순응적 vs. 파괴적 등 양심을 분류하는 데 유용한 기준들을 여럿 제공한다. 이 외 흥미로웠던 지점들은 다음과 같다.

a. 스트롬은 윤리적 자기관찰의 전통은 보편적일지언정 양심의 개념만큼은 특수하게 유럽적이라고 주장한다(see pp. 3-5).

b. 키케로 등의 문헌에서 보여지듯 로마 공화정에서 양심이란 "공적인 또는 사회적인 의견"과 관계된 것이었다(p. 6).

c. 4세기에 히에로니무스가 사도 바울의 편지들에 포함된 'syneidesis'--내면의 자기인식--을 'conscientia'로 번역하면서, 기독교적 양심의 개념은 "사적인 윤리적 분별과 공적인 기대의 원칙들을 혼합"한 채로 출범했다(p. 8).

d. 스트롬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서술로부터 양심의 위치가 애매하다는 사실을 포착해낸다. 스트롬에 따르면 양심은 자아와 입장 그리고 자기인식을 공유하면서도 자아로부터 외재적인 관점들을 함께 고려한다. 그것은 “자아와 타자의 경계”라는 “우월한 전략적 위치”를 점한다(p. 9). cf. "At once oneself and another, this second self mingles an outsider’s objectivity and a deep intimacy with our thoughts. This ‘second self’ provides us with a valued source of ethical complexity, but at the cost of inner division, of a compromised sense of oneself as integral and ‘whole’." (p. 66) / "combining an indwelling awareness of situation with an externally derived grasp of what must be done about it." (p. 98)

e. 중세에서는 유례 없이 다양한 양심의 개념들이 쏟아져나왔으나 최초로 "기독교 신학, 성경 속 선례, 그리고 제도적 실천의 형태로 안정된 내용(a secure body of content)"을 고정시킬 수 있었다(p. 12, cf. Ayenbite of Inwyt). 한편 14세기에 William Langland는 Piers Plowman에서 양심을 의지의 오류 가능한 교수자로 묘사한다.

f. “The familiar modern idea that conscience might stand alone, against every recognized authority, has yet to take full shape. Necessary to that shift is the conception of a private, internal conscience which pay pit itself against [대항하다] a public or official Conscience.” (p. 14)

g. 교회공동체에 대한 비판적인 목소리는 14세기부터 터져나왔지만, 16세기 전반에 들어서야 양심은 비로소 확연하게 개인화되었다(individualized & personalized). “Propelled by evangelical* theology, with its emphasis on direct communication with God and the urgency of personal revelation, many people began to view conscience less as a matter of authoritative ecclesiastical consensus and more as a haven of singular, even idiosyncratic, opinion. […] conscience became a potentially divisive influence, an urgent, deeply interior prompting which might set one at odds with established institutions and patterns of belief, [...] but must nevertheless be followed lest one risk the integrity and ultimate salvation of one’s very soul.” (p. 17) 이와 관련해 헨리 8세와 토마스 모어 사이의 논쟁이 주목할 만하다. 한편 대륙에서는 마틴 루터가 ‘mea conscientia’의 중요성을 내세우며 성서를 통한 신과 개인 사이의 소통에 있어 기독교 공동체가 지니는 매개자로서의 권위를 부정했다. 
*복음주의: 성서에 유일한 권위를 부여하는 프로테스탄티즘의 한 종파

h. 그러나 칼뱅은 가차없이 비판적인 시선에서 양심의 고립과 육화에 따른 문제들에 집중했다. “[…] a wholly interior conscience, unreliant upon external or institutional supports, faces all the dangers of embodiment; of becoming overly partisan on behalf of its fallible host, and, worst yet, of ‘going native [토착민처럼 생활하다]’ within its bodily home.” (p. 29)

i. “From 15th century Hussite risings in the Czechlands* and 16th-century peasant wars in Central Europe** through England’s 17th-century Civil War***, conscience and contending views of its dictates are found at the very heart of social upheaval.” (p.31)
*1419-1444, 종교개혁가 Jan Hus의 추종자들과 가톨릭 군주들 사이의 대립
**e.g. 1525의 Deutscher Bauernkrieg (Peasants’ War)
***1642-1651, 왕정의 옹호자들과 의회주의자들 사이의 대립

j. 스트롬은 막스 셸러의 양심이론을 기독교 양심이론의 연장선에 놓는다. 셸러는 권위있는 전통이 고독한 양심을 중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편 폴 틸리히는 Morality and Beyond에서 양심의 고통을 자기개혁의 유인으로 이해한다.

k. 17세기 이후에는 계몽주의 및 칼뱅주의의 여파로 양심이 제도종교로부터 거리를 두며 세속화된다. 이때부터는 교회 없이 어떻게 양심에 권위를 부여할 것이며, 어떻게 자의(arbitrariness)를 배제할 것인가가 중대한 문제가 된다.

l. 17세기 후반 로크는 종교적 양심의 자유를 자연권(natural rights)에 근거해 옹호한다. 나아가 신에 의한 조명이나 정열에 휩싸인 확신이 아닌 이성을 도덕적 판단의 핵심에 놓는다. 18세기 초반 셰프츠버리는 양심에 도덕적 자기검토의 책임을 부여하며 로크를 따라 양심을 세속화시키면서도 자연적 정동(natural affection)의 역할에 주목한다.

m. “Yet any process of ethical choice which occurs entirely within the mind of the agent remains vulnerable to circularity and possible fallacy. [...] reason remains vulnerable to error or to interest, when exercised in the absence of outside authority or constraint. If the constraint is not to be provided by an actively interventionist God, or by the dictates of religion—and neither Locke or Shaftesbury thinks it should be—then a turn to social norms and consensus provides alternative grounding for a theory of moral conduct.” (p. 45)

n. 양심의 고립에 맞서 칸트는 공정성과 [경향성으로부터의] 독립성을 위해 양심의 법정에서는 자기 자신을 타자로 볼 것을 요구한다. 칸트 이전에 아담 스미스 역시 반성적 자기검토에 있어 자아의 분리—공명정대한 관찰자(spectator)와 행위자(agent) 사이의 분리—를 통한 상호주관적 조율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스트롬은 과연 모든 특수한 관점으로부터 자유로운 완벽한 객관성이 도달 가능한 것인지 의심한다(see p. 49).

o. “By effectively severing the linkage between religion and conscience, and regrounding conscience within social consensus, Smith and others of his opinion risk leaving the conscientious individual at the mercy of uninterrogated public prejudice. […] The very foundation of more modern respect for conscience has been its availability as an ally for the solitary individual at odds with established and coercive opinion […]” (p. 50)

p. 19세기의 영미 소설들은 관습에 무비판적으로 따르는 ‘석화된’ 양심, 즉 악습의 위반에 대한 가책의 경험을 표현함으로써 세속화된 사회에서 “지배적인 합의가 반드시 [진정한] 양심의 충분한 기반인 것은 아니라는 점”을 알려준다(p. 54). 1859년에 쓰인 존 스튜어트 밀의 Essay on Liberty는 (타인에게 피해를 가하지 않는 한도 내에서) 사고와 감정, 의견, 표현 및 출판에 대한 포괄적인 자유로서의 양심의 자유를 주장한다. “Mill is, in short, a crucial initiator of the now-regnant [지배적, 우세한] view that conscience has a close connection with singularity and exception, and rights of conscience with the protection of fringe or minority opinion.” (p.57)
Cf. “My daughter, flee temptation!”이라 외치는 Jane Eyre에서의 모성적 양심(see p. 55) vs. 프로이트의 처벌하는 부성적 양심

q. "[...] what if conscience [...] is a spurious and unnecessary burden? What if this is a burden we invent [...] Or worse still, what if we accept and internalize the dictates of overbearing (고압적인) or bogus (가짜의) external influences, thus yielding to a conscience comprised by ignorant prejudice and unexamined inhibition?" (60-61) 도스토예프스키의 라스콜니코프와 이반은 양심의 권위를 회의하고, 니체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공격성과 복수심 등이 사회적, 종교적 제약으로 인해 내면에로 향해진 것이 양심의 가책이라는 계보학적 서술을 내놓는다. 프로이트는 심지어 달래지지 못하고(unappeased) 억압된 적개심에 대한 결과로서 죄의식이 죄의 결과가 아닌 유인이라고까지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양심이란 아버지를 대표자로 한 사회적 권위자의 금지사항들이 자아에 귀속된(vest) 결과일 뿐이다. (그러나 그는 집단적 초자아가 문화의 발달을 이룩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양심의 비평가들에게조차 양심은 그 의의를 무시할 수 없는 현상이다.)

r. [양심은 도덕체계의 단순한 행정가가 아니고 자체적인 내용을 가진다.] 13세기에 쓰인 아퀴나스의 Summa Theologica에 따르면 양심은 "[이미] 알려진 원칙들을 실제적(actual) 상황들에 적용하[게 해주]는" 기능을 가지는 "확신과 행위 사이의 결정적 다리"이다(93, cf. ST I, q. 73, a. 13). 나아가 양심은 같은 믿음을 공유하지 않는 사람에게도 어떤 믿음을 설득시키는 힘을 가진다.

4. Simone de Beauvoir, Pour une morale de l'ambiguïté, Gallimard, 1947.

 7월 내에 제일 열심히 읽었던 책이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문헌이다 보니 따로 노트에 정리했다. (윤리학에서조차 필증성을 이념으로 생각하는 후설과 달리) 보부아르는 인간 실존의 애매성을 인수해야 한다고 외친다.* 자유와 해방을 향한 인간의 도정은 결코 순수하게 타당할 수 없으며 실패의 요소를, 폭력 즉 누군가의 억압을--설령 그렇게 억압되는 자가 기존의 억압자라고 해도--반드시 내포한다. 양심이란 말이 몇 번 등장하지도 않고 언급될 때도 부차적인 개념으로 머무르지만, 지면 위에서는 아니어도 행간에서만큼은 그 어떤 책보다 양심에 대해 많이 그리고 깊이 논하는 책이다.

*그러나 둘 사이에는 중요한 유사성도 있다. 후설 자신도 이념의 실현 가능성을 상당히 낮게 평가하기 때문이다. 11월에 그의 비극적 세계관에 대해 리스본에서 발표하게 되었는데, 무척 설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