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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123 진자운동 네게 무슨 일이 생기든 네 곁에 있을게. 너의 과거를 있는 그대로 긍정할게(이제는 다 괜찮아). 너의 미래도, 그것이 어떤 내용으로 채워지든지 간에, 있게 되는 그대로 긍정할게(다 괜찮을 거야.) 네가 해왔고, 하고 있는 행동을 그 맥락에 대한 고려 없이 함부로 평가하려들지 않을게. 네 글의 독자가 되어줄게. 네 글의 팬이 되어줄게. 네가 무서워 하는 것이 있으면 내가 같이 싸워줄게. 너의 겁에 공감하지만, 같이 휘말리지는 않을게. 어쩌다 온 세상이 네 적이 된다면, 나도 온 세상의 적이 될게. 온 세상이 네 적이 되는 밤. 그 밤에 네가 잠들 때까지 책을 읽어줄게. 그 다음날. 낮이 되면 커피를 끓여줄게. 결국에는 네가 옳았다고, 너는 옳다고 생각해줄게. 내가 사랑으로부터 기대하는 말들이지만, 사실 나..
우다영, <앨리스 앨리스 하고 부르면> 우다영, ⟪앨리스 앨리스 하고 부르면⟫, 문학과 지성사, 2020. "세계는 아직 눌리지 않은 건반 같은 거야. 곡의 진행 안에 눌리는 횟수와 순간이 정해져 있어."(, 143) ⟪앨리스 앨리스 하고 부르면⟫을 지배하는 소재는 단연 물이다. 아이는 영화의 세트장인줄 알면서도 귀신이 보인다며 강물에 들어가길 망설이고(), 즐거워야 할 물놀이는 세쌍둥이의 맏이를 집어삼킨다(). 결혼식과 장례식이 동시에 펼쳐지고(), 불륜의 죄의식은 호텔 수영장 표면 위로 아른거리는 현무암의 이미지에 집약된다(). 마지막으로, 소설 전체를 통틀어 나에게는 가장 아름다웠던 장면이자 문자 그대로 소설집의 마지막 토막인데, 해파리들이 다이버들의 이마 위로 달라붙으면서 인간이 아마 심해어였을 시절부터 은밀하게 정착되어온 사람의 본래..
이심지, <오래된 습관> 이심지, ⟪오래된 습관⟫, 2021(독립출판). 자신이 살아가는 일을 주제로 픽션이 아닌 글을 쓰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또 실천하는 일은 쉽지 않다. 나만 해도 블로그라는 사적인 공간에조차 일기를 자주 쓰지 못한다. 쓰던 중간에 지운 일기가 얼마나 많은지 모르고, 이미 게시한 일기를 하트 표시를 눌러준 친구들의 마음을 지나쳐버리면서까지 삭제하곤 한다. 왜 그럴까, 곰곰이 따져보면 어떤 두려움이 작동하기 때문인 것 같다. 내 일상과 머릿속을, 허구로 승화시키거나 적어도 다른 텍스트를 경유하는 일 없이 내보였다가 괜히 내 앎의 얄팍함과 마음의 차가움 따위를 들켜버릴까 봐 두렵다. 자기표현은 객관적으로 가치있는 행위라고 믿으려 하지만, 막상 내 빈곤한 주관성과 관련지어 생각하기 시작하면 믿음이 숨바꼭질을 해..
엘프리데 옐리네크, <욕망> 엘프리데 옐리네크, 정민영 옮김, ⟪욕망⟫, 문학사상, 2006. "아이는 모든 것을 알고 있다. 그 아이는 백인이지만 햇볕에 구릿빛으로 그을렸다. 저녁 때 엄마는 아이를 씻길 것이고 아이를 위해 기도할 것이며 아이의 시중을 들 것이다. 그러면 아이는 엄마에게 매달려 아버지가 엄마의 굴속으로 들어오도록 허락한 벌로 그녀의 젖꼭지를 깨물 것이다. 듣고 있는가? 이것 자체가 언어고 그 언어는 할 이야기가 있다."(35, 강조는 필자) 읽기가 정말 힘든 책이다. 그런데 이 어려움은 ⟪욕망⟫의 순전히 부수적인 속성이 아니라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어려움의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성에 대한 묘사가 노골적이며 무엇보다 잔인하다. 마을의 모든 가난한 사람들을 자기 휘하에 둔 채 언제든, 누구든 해고할 수 있는 권력..
에드문트 후설, <수동적 종합> §27 '근원적 시간의식의 종합' 번역 §27 연상적 종합의 전제: 근원적 시간의식의 종합(모든 볼드처리는 필자의 것이다.) [125] 이제 연상으로 다시 돌아가서, 이 새로운 장이 어떻게 깊이 파고드는(tiefschürfend) 현상학적 탐구 속에 취해질 수 있는지를, 그리고 당연히 모든 연상이 전제하는 기초적인 것들을 가지고 시작하는 하나의 체계적인 [현상학적 탐구 속에 어떻게 취해질 수 있는지를] 숙고해보자. 우리가 그 무엇보다 최초인 시작을 찾을 필요는 없다. 자명하게 전제된 것은 근원적 시간의식 속에서 연속적으로 성취되는 종합이다. 그때그때마다의 구체적으로 완전한, 흐르는 삶-현재(Lebensgegenwart) 속에서 우리는 이미 하나의 특정한 소여양식 속에 통일된 현재, 과거, 그리고 미래를 가진다. 그러나 주관성이 어떻게 자신의 ..
Donn Welton (ed.), <The new Husserl: a critical reader> 발췌 보호되어 있는 글입니다.
20220111 주절주절 멋지게 차려입고 커피숍에 가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다만 풍경의 일부가 되고 싶다. 배가 고파질 때즈음 인도 음식점에 가서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게걸스럽게 난을 해치우고 싶다. 2년 만에 코인 노래방에 가서 자우림의 신곡을 불러보고 싶다. 정말 소박한 꿈들인데도 실현하기가 쉽지 않다. 막상 하루를 저렇게 보내고 나면 너무 들떠서 논문의 소굴로 못 돌아올 것 같다. 반대로 막상 하루를 저렇게 보냈는데도 별로 들뜨지 않아서, 어차피 논문을 다 써도 별 것 없겠구나, 생각할 것 같다. 멋지게 차려입는 대신 싸구려 부츠를 신고 눈을 밟았다. 영향력을 휘두르고 싶은 생각 같은 건 없어, 그가 잔을 채우면서 말했다. 그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돈도 벌 수 있으면 좋겠어. 다른 사람 앞에서 말을 할 때마다 내..
토마스 베른하르트, <모자> 토마스 베른하르트, 김현성 옮김, ⟪모자⟫, 문학과지성사, 2020. "결국 지쳤어, 피로뿐이야, 그리고 시간표에 따라 정시에 출발하는 기차에 대한 공포. 정신적 공포. 그리고 극도의 무자비함, 극도의 무자비함, 하고 형은 말했습니다."(211) 베른하르트의 글을 음미하기 위해서 요구되는 것은 이미지를 다채롭고 입체적으로 영상화하는 능력이 아니다. 그의 인물들은 개성적인 이목구비나 주의할 만한 눈빛, 특별한 머리 색 등등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들은 다만 후줄근하고 종종 불길하기까지 한 옷차림 속에 지나치게 쉽게 파묻힌 채, 나쁜 공기에 의하여 육체를 용해 당한 상태로 유령처럼 이승에 대한 저주의 말을 퍼부을 뿐이다. 인물의 처지에 공감하면서 함께 웃고 울 수 있는 능력 또한 발휘할 기회가 마땅치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