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철학

알베르 카뮈, <시지프 신화>

알베르 카뮈, 박언주 옮김, ⟪시지프 신화⟫, 열린 책들, 2020. 번역이 매끄럽다. ⟪시지프 신화⟫를 선물할 일이 있다면 이 판본으로 살 마음이 든다.

어느새 정든 집앞 도서관에서.

 ⟪시지프 신화⟫의 서사는 단순하다. 먼저 부조리가 정의되고, 부조리를 탐구하기에 적합한 방법론이 제시된다. 방법론을 충실히 이행했을 때 부조리로부터 따라나오는 세 개의 결론들은 네 종의 인간 유형으로써 예증된다. 이들의 삶은 모두 시지프라는 신화적 인물의 이미지 속에서 종합된다.

 부조리는 ①세계를 이해하기를 원하는 인간의 열망과, ②이해를 허락하지 않는 세계, ③(앞의 두 항을 비교함으로써 도출되는) 인간이 세계와 화해할 수 없다는 자명한 테제를 거부하는 태도로 이루어진다. 이 "삼위일체"(52)를 있는 그대로 탐구할 수 있게 해주는 유일한 방법은 부조리로부터 고개를 돌리지 않는 것, 도피하지 않는 것, 즉 정직할 것이다. 카뮈는 다소간 데카르트적으로 "[...] 오직 자기가 알고 있는 것만으로 살아가고, 있는 그대로의 것들에 적절히 만족하며, 확실하지 않은 것은 그 어떤 것도 개입시키지 않는"(83) 길이 요구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실존주의 철학은 신에게로 비약하여 세계의 불가해성에 동의해버림으로써, 후설의 현상학은 인간의 이성을 과대평가해 세계를 이해 가능한 것으로 왜곡함으로써 '철학적 자살'에 뛰어든다. "키르케고르는 나의 향수를 제거해 버리고, 후설은 이 세계를 한데 모은다. 내가 기대했던 것은 이런 것이 아니다."(76)

 반면 카뮈는 만져질 수 없는 신의 존재에 대해서는 판단을 중지하고, 이성에는 적절한 한계를 부여한다. 그로써 부조리에 관한 정직한 추론은 세 가지 결론, "나의 반항, 나의 자유, 나의 열정"(96)을 도출한다. 첫째, 부조리를 외면하지 않고 진실과 대면할 경우 성립하는 "일관성 있는 유일한 철학적 입장의 하나[는] 바로 반항이다."(83, 강조는 나) 자살은 부조리에 반항하지 않고 순종하는 것이므로 부조리의 필연적 귀결이 될 수 없다. 따라서 삶이 부조리하다고 해서 자살을 선택한다는 판단은 부당하다. "자살은 나름의 방식으로 부조리를 해소하는 것이다. [...] 하지만 부조리가 무너지지 않고 버티려면 그 자체가 해소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84) 둘째, 필멸이라는 부조리한 조건이 비로소 인간의 자유를 가능케 한다. 인간은 내일을 가지지 못하기 때문에 바로 그 이유로 그에게는--도스토예프스키 식으로 말하면--모든 것이 허락된다. 셋째, 모든 것이 허락된다면 "부조리의 믿음은 경험의 질을 양으로 대체"(91)한다. 이 경우 부조리한 인간에게 남는 유일한 의미의 가능성은 최대한 ('잘'이 아니라) '많이' 살며 스스로를 소진하면서도 열정을 잃지 않는 것뿐이다.

 카뮈는 이어 부조리한 인간이 자신의 반항과 자유, 열정을 향유하는 모습들을 묘사한다. 여기서도 설명은 금물이다. 돈 후안은 진정한 사랑을 믿지 않으면서도 끊임없이 새로운 여성들과 만남으로써 양의 윤리를 실천한다. 돈 후안이 위대한 이유는 그가 편력의 매 순간 진심이며, 그 때문에 스스로를 점진적으로 탕진해버린다는 것이다. 배우 역시 유형의 사물로 남지도 않는 예술로써 수많은 삶을 편력한다. 정복자는 "비록 굴욕적 존재라고 하더라도 [...] 내게 유일하게 확실한"(135) 육체를 믿고 끊임없는 행동을 통해 혁명을 추구하는 반항아의 전형이다. "혁명은 [...] 자기 운명에 맞서는 인간의 자기주장이다."(136) 마지막으로 (위대한) 소설가는 자신이 발견한 구체적인 이미지들에 심오한 의미를 부여하거나 논리적인 설명을 덧붙이기를 거부한다. 무엇보다도 그는 "자신의 창조에 미래가 없음을"(176), 창조의 무목적성을 알면서도 그것에 열광한다.

 이 네 종의 인간 유형은 시지프라는 하나의 이미지 아래서 통합된다. 시지프는 아무런 소용이 없는 노동을 끊임없이 반복하지만, 슬픔에 빠지기보다 자신의 운명을 명철하게 인지하고 또 경멸한다. "만약 이 신화가 비극이라면, 그것은 주인공이 의식적이기 때문이다."(188, 강조는 나) 시지프를 행복한 존재로 추켜세움으로써 카뮈는 플라톤이 ⟪라케스⟫에서 최초로 제기한 문제, 과연 지혜와 용기는 서로 동일한 덕이냐는 물음에 그 자신의 방식으로 긍정한다.

 이 토막글에서 나는 카뮈가 부조리의 추론을 통해 암시하고 허락하기만 할 뿐, 상론하지는 않은 하나의 가능성에 주목하고 싶다. 그것은 잠정적으로 '주관종교'라고 부를 수 있는 무엇의 가능성이다. 주관종교란 객체로서의 신을 상정하지 않고도 성립하는 신앙으로서, 한 주체가 스스로, 곧 능동적으로 무엇인가를 신격화하는 과정 및 그 결과를 가리킨다. 주관종교는 정의상 믿어지는 것의 보편적, 객관적 가치를 불신한다. 이 종교의 신도들은 특유의 지성 덕분에 '내가 그것을 신격화하기 전에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진실을 간파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주관종교는 신비에 이를 수 없다. (신비는 어디까지나 수동적인 것이지, 노력으로써 얻어지지는 않는다. 노력으로 얻어진 신비는 솔직히 그 빛깔을 잃는다.)

 객관성을 포기함으로써 주관종교는 늘 타인에 의한 반박의 위험에 처해있다. 그 위험은 '네가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는 그거, 정말 중요해?' 같은 일상적인 말로도 충분히 표현된다. 주관종교는 이와 같은 반박이 제기되는 것이 전적으로 타당함을 인지하면서도, 동시에 어떤 상황에서든 '응, 내겐 정말 중요해'라고 말할 수 있을 때 성립한다. 이때 중요한 것은 주관종교에게는 신비가 허락되지 않기 때문에, 이 자신감에 찬 대답의 근거가 한낱 이성일 뿐이라는 점이다.

 카뮈의 텍스트에서는 '열정'과 같은 말을 통해 부조리와 양립 가능한 것으로서 주관종교의 가능성이 엿보인다. 카뮈가 말하는 열정은 그 스스로가 묘사한 돈 후안의 진심어린 편력이나, 자기 책이 출간돼봤자 절판되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다음 작품을 쓰는 소설가의 수첩에 깃들어있는 것, 즉 주관종교를 가진 사람들의 마음에 새겨진 바로 그것이다. 카뮈는 "부조리의 인색한 분위기 속에서 유지되는 그 모든 삶들은, 자신에게 강한 생명력을 불어넣어 주는 어떤 심오하고 변함 없는 사상 없이는 유지될 수 없을 것이다. 여기서 그것은 어떤 특이한 충성심일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147). 내 눈에 저 충성심은 주관종교에서의 신앙과 동일하다.

 하지만 부조리와 종교는 결코 함께 어울릴 수 없는 단어들이다. 종교는 희망 및 위안을 주지 않을 수 없는데, 그 둘은 자동적으로 부조리를 취소하기 때문이다. 설령 자기 손으로 세운 신상 앞에서일지라도 꿈을 꾸거나 위로를 받는 사람은 세계와 화해해버린 사람이며, 부조리는 바로 이 화해를 거부하는 태도다. 나는 바로 여기에 ⟪시지프 신화⟫를 지배하고 있는 모순이 놓여 있다고 생각한다. 카뮈는 분명 주관종교를 허용하는데, 주관종교는 부조리와 배치된다. 혹자는 카뮈가 주관종교를 허용하지 않는다고 반박할지도 모르겠다. 그 경우엔 나의 논리보다 '주관종교'라는 용어의 생경함이 말썽을 피운 데 불과하다. 나만의 용어를 빼고 카뮈 자신의 말만을 빌려도 모순은 잔존한다. '행복한 시지프가 가능하다'는 카뮈의 언명은 위안을 기어이 전달하고 말기 때문이다. '희망 없는 삶이 가능하다는 희망'이 ⟪시지프 신화⟫의 목표지점이자 함정이다.

 그러나 이 모순은 카뮈의 주장을 취소하는 모순이 아니다. 이를테면 내세를 약속하는 '객관종교'가 제공하는 희망과 주관종교가 제공하는 희망은 엄연히 다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주는 위안과 행복한 시지프의 이미지가 주는 위안은 같을 수가 없다. 전자는 적어도 신실한 이에게는 항구하지만, 후자는 끊임없는 자기의심에 노출되어 불안정하다. 현실의 시지프에게 가능한 행복은 사실상 진절머리 나는 불안 가운데서 간헐적으로 이는 경련과 같은 행복일 뿐이다. 지옥이나 다름없는 불안의 와중에 가끔씩 찾아와주는 행복만으로 충분하다고, 그렇게 진심으로 믿을 수 있는 사람이 강자다. 물론 강자 가운데서도 가장 강한 사람은 여태까지 찾아와준 행복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믿을 것이다. 그는 추억이 있으므로 삶은 죽음보다 낫다는 논증을 타당하다고 여긴다.


 부조리라는 개념이 나에게 특별히 의미가 있는 이유는 그것이 내가 철학함에 대해 가지는 태도를 대변해주기 때문이다. 철학도로서 자살 선언이 될지 모르겠지만, 나는 진리 자체보다도 진리를 찾아가는 순간들을 더 소중히 생각하고 있다. 어느 날 신이 분홍색 작약을 한 다발 들고 찾아와서는, 하영이 네가 온 삶을 바쳐서 궁금해 해온 질문들--해석과 양립이 가능한 진리는 어떤 모습이며, 힘을 가지기나 하는지, 이성은 비이성과 화해할 수 있는지, 사람이 사람을 단죄해도 좋은지--에 대한 대답들을 아주 명쾌하게 알려주겠다고 해도 나는 내 방의 문을 열어주지 않을 것이다. 그런 신의 방문은 친절이기는커녕 종말에 가깝다. 달리 말해 나는 코앞에 진리가 있다고 해도 돌아가는 길을 택할 확률이 높다. 어쩌면 내 마음 속에 이미, 무조건적인 진리 같은 것은 없거나 적어도 인간의 현실에서는 도달할 수 없다는 직관이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런 직관을 강하게 가지고 있으면서 후설을 전공하는 사태 자체가 부조리, 아니 코메디다. 하지만 광대짓하는 삶도 괜찮다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