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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한스-게오르그 가다머, <진리와 방법 1> 서론, 1부 1장 1절 요약

한스-게오르그 가다머, 이길우, 이선관, 임호일, 한동원 옮김, ⟪진리와 방법 1⟫ 일부 요약

'철학적 해석학의 근본특징들'

서론 근대 과학은 인간의 경험과 관련된 인식 및 진리가 자연과학의 모범을 따를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철학의 경험, 예술의 경험 그리고 역사 자체의 경험"과 같이 "과학적 방법론의 지배 영역을 넘어서는 진리의 경험"과 관련해서는 그것의 독특하고 "고유한 정당성"이 추적되어야 한다(10). 구체적으로 역사적 전승에 의거한 이해를 통해 "과학의 방법적 수단으로는 검증될 수 없는 진리가 개현되는 경험 방식들"을 소화해야 하는 것이다(10). 예를 들어 우리는 철학의 고전적 텍스트를 이해함으로써, 과학으로는 깨우칠 수 없는 진리에 가닿는다. 요컨대 가다머는 자연과학과 차별화되는 정신과학만의 인식과 진리의 개념을 정착시키고자 한다. 그와 같은 작업을 가능케 하는 해석학은 단순히 독해의 기술론이 아닌 진리의 경험에 대한 철학적 사유의 방식이다. 달리 말해 해석학은 텍스트의 이해뿐만 아니라 세계에 대한 인간의 경험에 대한 이해에도 관여한다. 우리의 실존 자체가 "해석학적 세계" 안에서 이루어진다(13).

"우리는 마치 넘을 수 없는 장벽 안에 있는 것처럼 이 세계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세계를 향해 열려 있다."(13)
Die Erfahrung der gesellschaftlich-geschichtlichen Welt läßt sich nicht mit dem induktiven Verfahren der Naturwissenschaften zur Wissenschaft erheben. […] historische Erkenntnis erstrebt dennoch nicht, die konkrete Erscheinung als Fall einer allgemeinen Regel zu erfassen. […] Ihr Ideal ist vielmehr, die Erscheinung selber in ihrer einmaligen und geschichtlichen Konkretion zu verstehen. […] Was ist das fur eine Erkenntnis, die versteht, daß etwas so ist, weil sie versteht, daß es so gekommen ist? Was heißt hier Wissenschaft? (s. 10)

1부 예술경험에 입각한 진리 문제[Freilegung der Wahrheitsfrage an der Erfahrung der Kunst]

I. 미적 차원의 초월

1. 정신과학에서 인문주의[humanistisch] 전통이 지니는 의미

1) 방법의 문제 19세기, 은 인간과학(moral science, 후에 Geisteswissenschaft로 번역되었다)에도 자연과학적 귀납법이 적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이전에 이미 은 인간과학이 사태의 필연적 원인보다 표면적인 균일성, 규칙성, 법칙성을 발견해야 한다고 말한 바가 있었다. 이에 가다머는 "정신과학을 법칙성에 대한 인식의 발전을 척도로 해서 측정할 경우 그 본질이 올바르게 파악되지 않는다"고 일갈한다(21). 예를 들어 개별적인 역사적 사건은 특정한 일반법칙의 예시가 아니다. "역사적 인식은 오히려 현상 자체를 그 일회적이고 역사적인 구체성 속에서 파악하는 것을 이상으로 삼는다."(21) 그렇다면 정신과학의 본질에 걸맞은 종류의 인식은 그 성격이 어떻게 규정되어야 하는가?

 헬름홀츠(1821-1894)는 정신과학에서도 귀납법이 사용되어야 한다는 밀의 논지를 이어받기는 하지만, 정신과학적 인식은 [특정한 방법론보다] "특수한 심리학적 조건"인 "감지력(Taktgefühl)"을 요구한다고 통찰해낸다.* 여기서 감지력은 자연과학자의 독존적 오성과 대비해 "풍부한 기억력 및 권위의 인정과 같은 정신적 능력"을 가리킨다(22).** 아마 비슷한 시기에 드로이젠(1808-1884)은 "정신과학이 자연과학과 마찬가지로 자립적인 학문영역으로 정초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설명과 이해를 처음으로 구분했다(23). 이어 딜타이(1833-1911) 역시 드로이젠의 설명-이해의 구분을 받아들이면서 "정신과학적 방법의 독립성"을 확보하려 했다(25). 그는 특히 낭만주의 관념론이 법칙에 종속되지 않는 개체성을 존중했다는 점을 높이 평가한다. 그럼에도 그는 "삶의 연관의 분리, 즉 자신의 역사에 대한 거리 확보가 학문적 인식의 일환"이 된다는 자연과학적 전제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24). 그는 여전히 방법의 문제에 집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대체 "정신과학의 고유한 방법이란 없"는 것인가?(25) 헬름홀츠가 말한 '감지력'이란 대체 어떤 능력을 가리킨단 말인가? 헬름홀츠마저 여전히 영감 등에 대한 고려 없이, 귀납법이라는 자연과학적 모델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러한 질문에 답하고, 정신과학의 학적 그리고 방법론적 독립성을 논하기 위해 가다머는 정신과학과 인문주의 사이의 관계, 그리고 교양의 개념에 주목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프로네시스'와 유사하게 실천적인 능력, 상황에 맞는 사려깊음에 해당한다고 한다.

cf. **Patton, Lydia, "Hermann von Helmholtz", The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Winter 2018 Edition), Edward N. Zalta (ed.), URL = <https://plato.stanford.edu/archives/win2018/entries/hermann-helmholtz/>.

2) 인문주의의 주요 개념들 [➔ 정신과학을 수행하기 위해 요구되는 해석학적 이성 네 종류]

①교양 *헤르더, 칸트, 헤겔, 훔볼트를 거쳐 '교양[교육](Bildung)'의 개념은 자연적 성장과 차별화되고--특수한 목표를 겨냥하는--특정 소질의 육성과도 구분되어 인간성 일반의 전반적이고 지속적인--특정한 목적에 매여있지 않은--고양을 뜻하기에 이르렀다. 또한 교양은 습득의 과정에서 습득된 것들을 소멸시키지 않는 방식으로, 모든 것을 보존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도 특별하다. 가다머는 헤겔의 교양 개념을 [헬름홀츠의 '감지력' 개념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은 것으로] 해설하며 방법이 아닌 교양이 곧 정신과학이 요구하는 능력이자 작업방식임을 주장한다. 헤겔에 따르면 [노예의] 노동이나 소명에 대한 봉사에서와 같이 "교양은 보편적인 것을 위해 특수한 것의 희생을 요구한다."(33) 이러한 실천적 교양 외 이론적 교양 또한 그 본질이 "보편적 관점을 찾아내는 데 있"다(35). 요컨대 교양이란 자신과 이질적인 타자로부터, 그것에 의해 소외됨을 경유해 스스로에게 회귀하는--심지어는 타자존재에게서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과정이다.**

"Genau in diesem Sinne setzen die Geisteswissenschaften voraus, daß das wissenschaftliche Bewußtsein ein schon gebildetes ist und eben deshalb den rechten unerlernbaren und unnachahmlichen Takt besitzt, der die Urteilsbildung und die Erkenntnisweise der Geisteswissenschaften wie ein Element trägt."(독일어본 s.20)

*헤르더 이전에 교양은 중세의 신비주의와 결부되어 있었다.

**cf. "개인은, 자신이 성장한 세계가 언어와 관습을 통해 인간적으로 형성된 세계인 한 언제나 이미 교양과정에 있으며, 자신의 자연적 상태를 지양하려고 한다."(36)

 [교양의 다른 표현인] 감지력은 "상황에 대한 특정한 감수성과 감각능력, 그리고 상황 안에서의 태도로 이해"된다. 이는 "보편적 원리로부터 얻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명확하지 않고 또 표현할 수 없는 특성을 지닌다." 감지력은 감지하는 이로 하여금 언급이나 행위 등을 현명하게 취사선택하게 해준다. "감지력은 거리를 유지하게 해준다. 그것은 상대방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것, 주제넘게 나서는 것 그리고 개인의 사적 영역을 침해하는 것을 피한다."(38) 나아가 정신과학이 요구하는 능력으로서의 감지력은 미추를 구별할 줄 아는 미적 감각과 "한 시대에 무엇이 가능하고 가능하지 않은가"에 대한 앎 및 "현재와 비교해서 과거의 상이성"이 무엇인지에 대한 역사적 감각을 요구한다(39). 핵심은 "보편성으로의 고양", 곧 자신의 존재와 특수한 목적을 "타인이 보는 것처럼 [보편적 관점에서] 주시하는 것"이다(40). 그렇기 때문에 교양의 본질은 "보편적 공통감각"이며, 이 표현은 인문주의 전통에 그 근원을 가지고 있다(40). "이 전통은 [자연과학적 정밀성을 이상화하는] 근대 학문의 요구에 저항해서 새로운 의미를 얻는다."(40) 자연과학적 방법론을 정신과학에 적용시키는 것은 성서에 대한 역사적 비판에서 드러나듯 "정신과학적 진리의 자기파멸"이다(43).

"In der Tat werden wir sehen, daß es das Fortleben des humanistischen Bildungsgedankens ist, aus dem die Geisteswissenschaften des 19. Jahrhunderts ihr eigentümliches Leben ziehen, ohne es sich einzugestehen."(s.24)

💗요지: 정신과학은 자연과학적 방법론이 아닌 해석을 통해 이루어져야 하는데, 그 해석을 잘하려면 원숙한 인격 즉 교양이 요구된다. 텍스트의 진리를 이해하는 것은 기술을 통해서가 아니라 보편적 교양을 통해서다.

②공통감각(Sensus Communis) 조반니 바티스타 비코는 인문주의 전통에 충실하면서 올바른 것을 잘 말하는 수사학의 이상을 숭상했다. 그는 또한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정립된 학자와 현자, 이론지와 실천지 사이의 대립에서 후자의 손을 들어주며 근대의 비판적 학문--이를테면 데카르트의 사상--의 "한계를 지적"한다(45). 그에 따르면 근대의 비판적 학문은 실천지에 해당하는 "사려깊음과 능변", 궁극적으로는 "[수학적으로 또는 논리적 근거에 의해] 참된 것이 아니라 개연적인 것에서 배양되는 공통감각"으로써 보충되어야 한다(46).

"[...] 공통감각이란 인간이면 누구에[46]게나 있는 일반적 능력일 뿐 아니라, 동시에 공동성을 만들어내는 감각이기도 하다는 것이 분명하다. 인간의 의지에 방향을 제시해주는 것은 이성의 추상적 보편성이 아니라, 한 집단, 한 민족, 한 국가 또는 인류 전체의 공동성을 나타내는 구체적 보편성이라고 비코는 생각한다. 따라서 이 공통감각의 형성이 삶에 대해 결정적인 중요성을 지닌다는 것이다."(45-46)

 비코가 옹호하는 공통감각 또는 아리스토텔레스적 실천지는 "합리적 앎"이나 철학적 사변과 달리 "구체적 상황"에 대한 그때그때마다의 고려를 포함하며, "적극적인 윤리적 동기"에서 실현되는 일종의 습관(hexis)이다(47). 그것은 "올바름과 공공의 복리에 대한 감각"으로, "공동의 삶"의 과정에서 전통에 따라 규정되는 말하자면 공동체주의적인 개념이다(48). 그리고 가다머는 정신과학이 공통감각을 자신의 토대로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인간의 도덕적, 역사적 실존은 그 자체가 공통감각에 의하여 결정적으로 규정되어[49]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보편적인 것으로부터 추론하는 것이나 근거로부터 증명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48-49) '역사를 비추어봤을 때 x인 것이 개연적이다'라는 판단이 논리적 연역만큼의 설득력을 가진다는 것은 달랑베르 또한 인지한 바이다. 요컨대 모든 인식이 합리적 인식인 것은 아니며, 논증의 형식으로 환원되지 못하는 양식(bon sens) 또한 인식의 한 방법이다.

*그렇다면 가다머는 무전제적 사고는 불가능하다고 보는가?

 섀프츠베리 역시 "공통감각이라는 이름 아래 위트와 유머의 사회적 의미를 평가하며" 공동선을 지향하는 사회적 덕을 옹호한다(50). 스코틀랜드 철학 역시 "형이상학의 몽유병을 치료하는 약일 뿐 아니라, 사회생활을 참으로 올바르게 다루는 도덕철학의 기초"로서 공통감각을 중요시했다(52). 단번에 완결되어 갖추어지는 능력이 아닌, 사회적인 감각을 지속적으로 상황에 맞게 발휘해야 하는 과제로서 공통감각을 이해한 베르그송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베르그송은 공통감각이 정신과학에, 또는 고전 텍스트의 해석에 유용하다는 관념은 표출하지 않았다.

 한편, 18세기 독일에서는 공통감각의 개념이 탈정치화되어 "원래의 비판적 의의를 상실"하고 "도덕의식(양심) 및 취미와 나란히 있는 이론적 판단력"으로 이해되었다(54).* 물론 외팅거와 같은 경건주의자만은 예외였다. 그는 섀프츠베리와 유사한 공통감각의 개념을 내세우면서, 성서 해석에 공통감각이 요구된다고 생각했다. 그에 따르면 "공통감각은 복합적 본능들, 즉 삶의 진정한 행복이 근거하는 것을 향한 자연적 충동이며, 그러는 한에서 신의 현존의 작용이다."(57) 그러나 경건주의가 퇴조하자, 공통감각은 단순한 해석학적 규칙으로 축소되었으며 계몽사상 이후 그 내용이 "공동화와 지성화"를 겪었다(58).

*이어서 주제화될 칸트의 미학을 암시하는 것 같다.

③판단력 18세기 독일, 테텐스는 판단력과 이론적 반성 사이의 거리를 알아보았다. "특수자를 보편자에 포섭시키는 판단력, 즉 어떤 것을 규칙의 한 경우로 인식하는 판단력의 활동은 사실상 논리적으로는 증명될 수 없다. [...] 판단력은 일반적인 방식으로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때그때의 경우에 따라 훈련될 수 있으며, 이 점에서 오히려 일종의 감각과 같은 능력이다. [...] 그 어떤 개념들에 근거한 논증도 규칙을 적용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독일의 계몽철학은 당연히 판단력을 정신의 고차적인 능력으로 간주하지 않고 저급한 인식능력으로 여길 수밖에 없었다."(59)

Q. 바움가르텐 - 칸트 - 고트셰트로 연결되는 60쪽에서의 논의를 이해하지 못했다.

 비코와 섀프츠베리에게서 공통감각은 단순히 일반적인 것을 특수자에 적용하는 형식적 능력이 아니라, 내용적으로 무엇이 옳고 건전한지에 대한 앎을 포함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판단력은 능력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모든 사람에게 제기될 수 있는 요구"로, "진정한 윤리적인 시민적 연대의식"에 가깝다(61). 그러나 칸트는 도덕감이 아닌 정언명령에 기반한 윤리학을 전개함으로써, 공통감각의 개념을 완전히 도외시하는 채로 도덕철학을 설립하였다. 물론 "순수 실천이성의 엄격한 법칙을 어떻게 인간의 마음에 연결시킬 수 있는가"라는 도덕 교육과 흡사한 문제가 대두되기는 했지만, 그것이 도덕철학 자체와 유관한 것은 아니었다(62).

Q. 63쪽의 마지막 문단을 이해하지 못했다.

"따라서 감각적 판단 능력이라고 불릴 수 있는 것의 영역에서 칸트에게 남은 것은 단지 감성적 취미 판단뿐이다. 여기서 우리는 진정한 공통감각을 이야기할 수 있다. [...] 확실한 것은, 감성적 취미가 개념적이 아니고 감각적임에도 불구하고 보편적인 동의의 요구를 고려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참된 공통감각은 취미라고 칸트는 말한다."*(64)

cf. 수준 높은 교양을 의미하는 '좋은 취미'가 '공통의' 감각과 동일시되는 역설은 칸트의 초월론적 문제설정에서 정당화된다고 한다.

*가다머는 예술과 종교는 과학과 달리 객관적 사태/세계에 대한 보편적 진리를 가져다주지 못하며, 주관적인 판단/사적 체험의 영역에 귀속되는 것으로 평가절하되고 있다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다. 가다머에게 특히 예술은 과학과 다른,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연히 진리인 것에 대한 체험을 가져다준다.

④취미 역사적으로 칸트 이전에 '취미' 개념은 미학에서보다 도덕철학에서 사용되는 개념이었다. [도덕적인 탁월성을 '아름다움'이라 부르는 것을 쉽게 연상시킬 수 있다.] 취미는 "인간성의 이상", 특히 발타사르 그라시안의 경우 "신분적 특권과는 무관"한 어떤 "교양인"의 이상을 가리켰다(65). 교양인의 이상은 "교양사회의 이상"으로 확장되었다(66). "좋은 사회는 더이상 출신이나 지위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그러한 사회가 내리는 판단의 공통성에 의해서 승인되고 정당화된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좋은 사회는 그 사회가 이해의 편협함과 사적인 편애를 넘어서는 판단[좋은 취미를 가지는 판단]을 요구할 수 있는 사회로 고양될 때 승인되고 정당화되는 것이다. 따라서 취미 개념은 확실히 일종의 인식 방식을 의미한다."(66) 취미 판단은 논증의 형태로 이루어지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유한 "타당성에 대한 요구"를 갖추고 있다(67).*

*가다머는 좋은/고상한 취미와 나쁜/저급한 취미가 있다고 있다고 가정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해진 보편적 원리가 있는 것은 아니고, 개별적인 것에 대한 감각을 통해 보편적인 것에 스스로 이를 것이 요구된다.

**칸트에 반해 가다머는 선과 미를 분리하지 않는다. 칸트는 선과 미를 분리할 뿐만 아니라, 진과 미도 분리한다. 아름다움을 주관성의 영역에 귀속시킴으로써 진리 인식은 자연과학에게 맡기고 말았다.

 취미는 "단순한 경험적 일반성"에만 해당하는 유행(Mode)과 차별화된다(67). 유행이 의존을 강요하는 것과 달리 취미는 "공동성에서 활동하지만 그것에 종속되지 않"고 유행 가운데서도 "고유한 판단력을 작동시"키면서 전체적인 스타일을 고수한다(68). 그러므로 취미는 유행보다 자유롭고 우월하며 바로 그 이유로 규범성을 가진다. 

 "취미는 판단력과 마찬가지로 개별자를 전체와의 관계에서, 개별자가 모든 다른 것들과 조화를 이루는지 또는 '적합한지'를 평가한다. 사람들은 그러한 평가를 위해서 감각을 가져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논증을 통해서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 도덕 개념들 또한 전체로서 주어지거나 규범적으로 명확하게 규정되지 않는다. [...] 구체적인 경우들을 바르게 평가하는 데는 판단력이 필요하다. 특히 법학에서 판단력의 이러한 기능이 나타난다. 법학에서는 '해석학'이 법을 보충하는 성과를 거두고 있는 것이다."(69)

 칸트에게서 '규정적 판단력'은 "순수 이론이성이나 실천이성을 사용하는 경우에 개별자를 주어진 보편자 아래 포섭하는 것"이지만, 반성적 판단력은 '실례'가 규칙에 완벽하게 들어맞지 않을 경우 요구되는 판단력, 취미/좋은 감각이 요구되는 '미적 판단력'에 가깝다(70).* 이 경우 판단은 "보편자의 기준을 단순히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함께 규정하고 보충하며 수정"하기까지 한다(71). 그리고 이러한 능력은 일종의 감지력이다.** 그러나 칸트의 미적 판단력 개념은 인식과 윤리의 영역으로부터 추방되었고, "칸트의 선험적인[초월론적인] 문제설정에 의해, 문헌학적이며 역사적인 연구가 보존하고 탐구해왔던 전승이 지닌 고유한 진리 요구를 승인하는 길이 막혀버렸다. 이로써 정신과학의 방법적인 독자성은 그 정당성을 근본적으로 상실하게 되었다."(72) 왜냐하면 미적 판단력이 천재의 것으로 주관화되면서 '비-자연과학적 인식'의 객관적 신뢰성은 더 이상 인정받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정신과학은 자연과학적 방법론에 의존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아래는 칸트의 '판단력' 개념에 대한 Ginsborg, Hannah, "Kant’s Aesthetics and Teleology", The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Winter 2019 Edition), Edward N. Zalta (ed.), URL = <https://plato.stanford.edu/archives/win2019/entries/kant-aesthetics/>. "Judgment in the Critique of Judgment is described as having two roles or aspects, “determining” [bestimmend] and “reflecting” [reflektierend] (Introduction IV, 5:179 and FI V, 20:211). Judgment in its determining role subsumes given particulars under concepts or universals which are themselves already given. This role coincides with the role assigned to the faculty of judgment in the Critique of Pure Reason; it also appears to correspond to the activity of imagination in its “schematism” of concepts. Judgment in this role does not operate as an independent faculty, but is instead governed by principles of the understanding. The more distinctive role assigned to judgment in the Critique of Judgment is the reflecting role, that of “finding” the universal for the given particular (Introduction IV, 5:179). Kant's recognition of judgment as a faculty in its own right, and hence of the need for a Critique not just for theoretical and practical reason but also for judgment, appears to be connected with his ascription to judgment of a reflecting, in addition to a merely determining, role. Judgment as reflecting, or reflective judgment [reflektierende Urteilskraft], is assigned various different roles within Kant's system. It is described as responsible for various cognitive tasks associated with empirical scientific enquiry, in particular, the classification of natural things into a hierarchical taxonomy of genera and species, and the construction of systematic explanatory scientific theories. Kant also suggests that it has a more fundamental role to play in making cognition possible, in particular that it enables us to regard nature as empirically lawlike (see especially Introduction V, 5:184), and, even more fundamentally, that it is responsible for the formation of all empirical concepts (see especially FI V, 20:211–213). But reflective judgment is also described as responsible for two specific kinds of judgments: aesthetic judgments (judgments about the beautiful and the sublime) and teleological judgments (judgments which ascribe ends or purposes to natural things, or which characterize them in purposive or functional terms). [...] The especially close connection between judgments of beauty and the faculty of judgment is reflected in Kant's view that the feeling of pleasure in a beautiful object is felt in virtue of an exercise of reflective judgment (Introduction VII, FI VIII)."

**"좌우간 취미라는 것은 어떤 이미 정해진 개념에 따라서 개별자를 포섭시키는 게 아니라 스스로 개별적인 상황에서 보편적인 것을 스스로 발견하는 그런 성격을 가지고 있다."(P 선생님)

"그러나 진리의 개념을 개념적 인식에 제한시켜도 좋은가? 예술작품이 진리를 가지고 있다고 인정해서는 안 되는가?"(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