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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프리드리히 니체, <안티크리스트>

프리드리히 니체, 박찬국 옮김, ⟪안티크리스트⟫, 아카넷, 2013

"선(Gut)이란 무엇인가? -- 그것은 힘의 감정을, 힘에의 의지를, 힘 자체를 고양시키는 모든 것이다. 악(Schlecht)이란 무엇인가? -- 약함에서 비롯되는 모든 것을 말한다. 행복이란 무엇인가? -- 힘이 증가되고 있다는 느낌, 저항을 초극했다는 느낌을 말한다."(§2, 17)
"확신이란 감옥이다. [...] 모든 종류의 확신으로부터의 해방, 자유롭게 볼 수 있는 능력은 강한 힘의 특성이다. [...] 반대로 신앙을 필요로 하고, 어떤 무조건적인 긍정과 필요로 하는 것, [...] [그것은] 약자에 속하는 것이다. [...] 신앙은 어떤 것이든 그 자체가 자기 소멸[Entselbung], 자기 소외의 한 표현이다."(§54, 133-4)

 무척 짧고 테제도 간명한 책이었는데, 읽는 데 한 달이나 걸렸다. 철학서가 아닌 자기계발서로 생각하면서 설렁설렁 읽은 탓이다. ⟪안티크리스트⟫에서 니체는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고전적인 물음에 네 가지 선택지를 제시한다. 예수의 삶, 그리스도교의 삶, 불교도의 삶, 그리고 차라투스트라의 삶이 그것이다. 네 선택지는 각각 사랑하는 삶, 복수하는 삶, 정신으로서 건강한 삶, 육체로서 건강한 삶에 상응한다.

①사랑하는 삶. 우선 니체는 복음서를 신뢰하지 않기 때문에, 그의 예수는 문자 그대로 그의 예수임을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니체의 예수는 두 가지 의미에서 '자유정신'으로 특징 지어진다. 첫째, 예수는 교리와 같은 외적인 형식에 얽메이지 않는다. "그는 고정된 모든 것에 무관심하다. [...] 어떤 종류의 말, 정식, 율법, 신앙, 교리와도 대립되는 [...] 단순히 가장 내적인 것에 대해 이야기할 뿐이다."(§32, 79) 예수에게 삶의 진리는 마음속에 있지, 외부로부터 부과된 법이나 질서를 준수함으로써 도달되는 무언가가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니체는 예수를 모든 외적 실재를 내면의 상징에 불과한 것으로 만들어버린 "위대한 상징주의자"(§34, 83)로 묘사한다. 외적인 기준에 대한 그의 무지는 심지어 세속과 신성의 이분법에 대해서도 알지 못하는 "순수한 어리석음"(§32, 80)으로 나타난다.

 둘째, 예수는 지배나 권력의 질서에 편입되고자 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니체는 그를 무정부주의자로, 말하자면 정치로부터의 자유를 추구한 정치범으로 묘사한다. 이러한 묘사는 예수의 내면에서 계시된 진리의 내용과 무관하지 않다. 예수에게 진리의 내용은 누구도 차별하거나 경멸하지 않고, 누구에게도 분노하지 않는 삶, 자기방어조차 하지 않을 정도로 공격성을 배제하는 삶, 곧 "악인에게마저도 저항하지 않고--그를 사랑"(§35, 86)하는 마음으로 이루어져있다. 따라서 미래의 구원을 약속하는 제도화된 신앙이 아니라 당장의 (상황 속에서 유동적인) 실천이 예수의 삶을 규정한다. 후술하겠지만 니체의 눈에 그리스도교의 신앙은 피안을 보장하는 절대자를 내세워 간접적으로 표출된 지배욕의 산물인 반면, 예수는 그러한 욕구로부터 해방되어 있다. 그리스도교도의 삶은 예수의 삶과 차별화되며, 구체적으로는 후자가 왜곡된 결과이다. "근본적으로는 오직 단 한 명의 그리스도교인만이 존재했다. 그리고 그는 십자가에서 죽었다. [...] 그리스도적인 실천, 십자가에서 죽은 자가 살았던 것과 같은 삶만이 그리스도교적인 것이다."(§39, 92, 강조는 니체)

②복수하는 삶. ⟪안티크리스트⟫에서 나타난 그리스도교에 대한 니체의 비판은 단순히 신랄한 것을 넘어서있다. 니체는 가능한 모든 부덕을 그리스도교에 연결짓는다. 가장 핵심적인 비난은 그리스도교적 삶 속에 감춰진 위선에 집중되어 있다. 그리스도교는 예수가 스스로 실천해 보인 사랑의 정신을 겉으로만 표방하면서 실제로는 심판의 교리를 통해 자신에게 반대되는 모든 사상과 질서를 공격한다. 니체에게 심판의 교리는 그리스도교도가 자신보다 뛰어난 자들을 끌어내리고자 고안한 원한의 산물로 이해된다. 예를 들어 초기 기독교 교회의 혁명적인 움직임들은 천민들이 집단적으로 결의한 "사회의 위계질서에 대한 반항", 기득권의 "부패에 대해서가 아니라 계급, 특권, 질서, 형식에 대한 봉기"(§27, 69)였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교도의 원한은 자신이 극복하지 못한 "현실적인 것에 대한 깊은 불만"(§15, 43)에서 오며, 이를 해소하기 위해 천국과 같은 피안의 개념이 고안된다. 다시금 니체에게 피안의 개념은 "완전히 날조된 세계를 실재로 만들어버"리는 허위(§10, 33)이자, 삶에 좌절한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대해 느끼는 복수심을 허구에 대한 상상으로 은폐하는 위선이다. 사실 구원의 교리는 쾌락주의의 발전일 뿐이다(§30, 74).

 피안의 개념은 신앙에 대한 보상으로서 그리스도교도에게만 배타적으로 주어지는 불사의 관념과 결합하여 일종의 오만한 선민의식을 형성한다. 위선적인 오만의 정점에는 사제들이 있다. 니체에 따르면 바울로 대표되는 사제들은 죄라는 허구--"대중을 마음대로 지배하고 가축을 만들 수 있는 개념"(§42, 101)--을 이용해 약자들을 협박하고, 그들로부터 권력을 쟁취한다. 사제들은 권력을 지속하기 위해서라면 과학을 억압하는 일도 서슴치 않는데, 인식을 죄로 둔갑시켜 인간을 낙원에서 쫓아내는 창세기의 에피소드가 그 증거이다. 반면 "예수는 '죄'라는 개념 자체를 폐기했었"고(§41, 98), 인간들 사이에 권력관계를 형성하기보다 인간 자신이 신이 되는 것 또는 비유적으로 신의 아들이 되기를 꿈꾸었다.

 근대에 들어 사제는 칸트로 대표되는 철학자로 세속화된다. "신의 퇴락, 곧 '물 자체'"(§17, 47)와 같은 표현에서 사제와 철학자 사이의 범죄적인 유대관계가 드러난다. 기독교적 원한을 제 안에 감추고 있는 선은 실천이성의 개념을 통해 새로이 접근되지만, "보편타당하고 사심 없는 성격을 갖는 선은 환영에 불과하며, 그것에서 표현되고 있는 것은 삶의 쇠퇴와 삶의 완전한 소진 그리고 쾨니히스베르크적인 중국주의[역자: 무조건적인 순종을 미덕으로 삼는 태도]다."(§11, 33) 니체는 '실천적인 이성' 자체를 일종의 형용모순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칸트는 그러한 허구를 이용해 인간을 "'의무'의 자동기계"(§11, 34)로 격하시켜버린다.

 위선 이외의 비난의 지점들은 이미 유명하다. 예를 들어 그리스도교적 연민은 약한 자의 자연스러운 도태를 방해하고, 니체의 입장에서 실패한 삶을 말하자면 성공한 삶과 다를 바 없이 긍정함으로써 허무주의에 도달한다. "연민은 니힐리즘의 실천인 것이다."(§7, 26) 또 그리스도교는 자신의 존속을 위해 일부러 삶을 불행한 것으로 표상한다. "교회는 불행을 양식으로 삼아 살아왔고 스스로를 영원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불행을 만들어냈다."(§62, 163) 모든 비판은 그리스도교적 삶의 방식이 가치 있는 삶의 근본요소들--욕망에 대한 긍정, 르상티망의 배제, 권력의 건강한 추구, 거리의 파토스 등--을 무너뜨린다는 점으로 수렴한다. 

③정신으로서 건강한 삶. 불교 역시 욕망을 부정하면서 무를 쫓는 데카당한 종교지만, 그리스도교와 달리 도덕이 아닌 개인의 해탈을 목표로 내세움으로써 자연적인 세계를 도덕적인 세계로 왜곡하지 않는다. "그것은 '죄에 대한 투쟁'을 설하지 않고, 오히려 현실을 철저하게 존중하면서 '괴로움에 대한 투쟁'을 설한다."(§20, 50) 불교에서 선행이 의미 있는 이유는 오직 그것이  마음의 평화를 증진시키기 때문이다. "복수심, 반감, 원한" 또한 "섭생 목적에 비추어볼 때 전적으로 불건강"하다는 이유로 거부된다(§20, 51). 자기 자신의 정신건강이 최종적인 목표인 불교도의 이기심은 니체의 눈에 신성한 색채를 띠며, 은총과 같은 외적인 도움이 없이도 스스로 목적을 성취할 수 있다는 자기신뢰 역시 돋보인다(§21, 52). 

④육체로서 건강한 삶. 그러나 예수의 삶은 스스로를 방어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어리석고, 불교도의 삶은 고통에 대한 민감도가 지나치게 발달한 데다 모든 것을 정신화해버리는, 따라서 부자연스러운 삶이다. 니체의 눈에 인간은 육체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육체로서의 인간은 자연본성을 따를 경우 스스로를 보존하고자 하면서 그 이유로 성장을 추구하고, 성장의 결과 타인을 적극적으로 지배하고자 한다. "나는 삶 자체가 성장과 존속을 향한 본능, 그리고 힘의 축적과 힘을 향한 본능이라고 본다."(§6, 23) 중요한 것은 힘의 추구가 좌절되었을 때 복수심이나 르상티망에 사로잡히지 않는 것이다. 건강한 인간은 "미궁에서, 자신과 아울러 다른 사람들에게 가해지는 혹독함 속에서, 시험 속에서 행복을 발견한다. 그들의 기쁨은 극기다."(§57, 145)

*"순수정신이란 순전히 거짓말이다."(§8, 29) 정신 역시 동물적인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 인간 전체가 기계이다. 인간을 기계가 아닌 존재로 만들어주는 것으로 믿어지는 자유의지란 "부분적으로는 서로 모순되고 부분적으로는 서로 조화되는 자극들에 필연적으로 따르는 결과, 일종의 개별적인 반응을 가리키는 데 쓰일 따름이다."(§14, 41)

 남은 과제는 차라투스트라처럼 살라는 니체의 권유를 비판적으로 되짚어보는 것이다. 이를테면 도덕은 정말 니체의 말만큼 경멸할 만한 것일까? 단죄와 비밀스러운 우월의식의 수단으로 왜곡되지만 않는다면, 타인을 해치지 말고 되도록 사랑으로 대하라는 도덕의 원칙 자체에는 그것을 거부할 이유가 없어 보인다. 도덕이 발생적으로 기독교적 복수심으로부터 연원했다는 니체의 분석이 맞다손 치더라도, 미래의 도덕 개념으로부터는 복수심을 분리시킬 수 있을 것 같다. 도덕적인 삶으로부터 르상티망을 제거해낼 수만 있다면 '선한 차라투스트라'를 표상해보는 일도 그렇게까지 어렵지 않을 것이다.

 문득 ⟪진리와 방법⟫을 강독하던 중 (아이러니하게도 이 책을 번역하신) 교수님께서 바람 지나가듯 하셨던 말씀이 떠오른다. 정확한 워딩은 기억나지 않지만, '도덕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테제는 철학이 문제시할 대상이 아니라 그저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 수도 있다'는 직관의 표현이었다. 니체가 바로 이 직관을 상대화하려고 도덕의 계보를 추적한다는 점은 모두가 알고 있다. 하지만 니체 자신의 생각도 전제 없이 주어진 것일 수 없으며, 그가 차라투스트라를 옹호하기 위해 사용하는 자연의 개념도 매우 인위적인 것임이 분명하다.

 나는 선량함에 대한 가치평가로서 다수의 관점이 맞서는 모습을 본다. 모든 관점은 결코 보편적이지 않은 특수한 기준에 기반해 있고, 바로 그 이유로 다른 기준에 비추어보면 의심 가능하다. 어떤 결론에 도달하든, "덕이란 우리들 각자가 만들어낸 것이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 자신의 가장 사적인 방어수단이며 필수품이어야 한다."(§11, 33) 덕들의 전쟁은 현대성의 한 징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