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적 생각이 아닌 일상의 사실을 기록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마다 망설인다. 기억할 가치가 있는 사건은 무엇이며, 기억할 뿐만 아니라 표현할 가치까지 있는 사건은 무엇일까? 왜냐하면 어떤 의미에서는 모든 사건이 표현돼야 마땅하고—한트케 소설의 치졸한 디테일링을 생각하면—어떤 의미에서는 그 반대기 때문이다. 그 어떤 사건도 딱히 표현될 가치가 없다. 무게의 부덕함, 가벼움의 미덕. 그 사이의 균형을 찾느라 애를 먹고 있는 내 아이클라우드 메모장은 빵 터져버리기 일보 직전이다.
그래도 처음으로 국제 학회에 다녀온 일은 이야기할 만하지 않을까? ‘Edmund Husserl’s Troubled Quest for Eudaimonia’라는 제목으로 발표를 했다. 발표 자체보다도 Q&A 세션에서 즉흥적으로 대답을 할 일이 걱정됐었는데, 후설의 완벽주의에 대한 비판 하나와 칸트 윤리학과의 연관성에 대한 것 하나 이렇게 질문이 들어왔다. 전자에 대해서는, 후설에게서 전형적인 이념과 방법론의 페어링 가운데 후자의 중요성을 높이 평가하는 식으로 해석을 전개하면 대응이 가능하다고 답했다. 후자에 대해서는, 후설이 애초에 행복을 (a) 인격의 일관성이 (b) 도덕을 포함한 규범적 이상을 만족(시키려고 무한히 노력)하는 데서 찾기에, 인격(personhood)과 도덕을 불가피하게 그리고 의도적으로 분리하는 칸트 윤리학에 반대하는 셈이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후설과 20세기 중반 옥스포드 윤리학자들이 연결된다고.
발표 시간 외에는 다른 사람의 발표를 듣거나 네트워킹을 했다. 긴장하기는 하지만, 철학인 한정 E가 되는 나로서는 그런 네트워킹 시간을 나름 즐기는 편이다. 알아보고 싶었던 사람들 모두와 스몰 토크 및 연구 관심사 공유를 적당한 비율로 섞어 대화를 나눈 것 같다. 마지막 날 아침에는 리스본의 킹코스 같은 곳에서 명함을 인쇄했다. 정확히 말하면 명함보다는 구구절절, 그러나 최대한 깔끔하게 내 연구를 소개하는 팸플릿에 가깝지만. 앞면에는 인적사항 및 연락처, 뒷면에는 작업 중인 박사논문 프로젝트 초록을 담았다. 재밌었던 점은 (경영학과 출신 뱅커인) 언니는 뭐 이렇게 글이 많냐고 핀잔을 줬는데, 리스본에서도 그렇고 이어서 (또 네트워킹하러) 간 다름슈타트에서도 철학자들은 모두 빈 공간이 충분해 예쁘다 말해준 사실이다. 일정이 끝난 뒤에는 렉스, 안토니오, 모르, 마지막 날엔 스콧도 함께 백화점 푸드코트를 떠돌았다. 그들과 친구처럼 함께 저녁시간들을 보낼 수 있어 감사했다.
그렇지만 학회가 진행되는 내내, 마음 한 구석에서는 내가 여전히 좋아함직함(likeability)—한국말로는 사실 ‘사랑스러움’ 정도가 더 정확한 번역어일지도 모른다, 우리 문화에서는 사랑을 쉽게 말하니까—을 육화하는 데 많은 에너지를 쏟고 있구나 싶어 씁쓸했다. 여성인 인간으로서의 매력과 학자로서의 프로페셔널리즘이 충돌함을 경험할 때마다, 페미니즘은 더 이상 유관한 아젠다가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희한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순종과 예쁘장한 미소, 한국에서는 심지어 (부담스럽지 않은 선에서의) 애교가 이상적 여성상으로서 상당한 규범력을 가지고* 작동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네가 화장을 하고 공감적 말하기를 수행하는 것은 오롯이 네 선택이지, 누구도 네가 여자란 이유로 강요한 적 없으니 궁시렁거리지 말라는 식의 비판은 전혀 구조를 못 알아보는 처사다.** 그리고 문제는 저 여성상이 이상적 학자상과 충돌한다는 사실이다. 경험한 바로는 순종, 미소, 애교 대신 독립성, 정중하되 날카로운 비판, 어른스러움(어쩌면 나이-지긋함)이 실질적으로 학자의 미덕이기 때문이다.
*이 조건들을 만족하면 실존적으로 필요한 바들(e.g. 인정)을 획득하기가 상당히 용이하다는 뜻에서
**무려 75년 전 이미 보부아르는 “남성이 누리는 이점은 […] [독립적인] 인간으로서의 그의 소명이 결코 남성으로서의 그의 운명과 충돌하지 않는다”는 점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남성은 분열되어있지(split) 않다.” 반면 여성은 주권적 주체성을 획득하려면 자신의 여성성을—순종, 예쁘장함, 귀여움을—폐기해야 한다. 하지만 “여성성을 포기하는 것은 그녀의 인간성 일부를 포기하는 것”이다. 보부아르 역시 나와 마찬가지로 미소지니스트들의 입장을 다음과 같이 갈무리하며 냉소한다: “우리와 동등해지고 싶다고? 그러면 화장 그만하고 손톱 칠하지 말든가[, 참 나].” (Simone de Beauvoir, Trans. H.M. Parshley, The Second Sex, Vintage/Ebury, 2007, p. 762의 번역)
발표를 마치고 기쁜 마음으로 비뇨 베르데를 사러 밤거리를 돌아다녔는데--그다지 늦지도 않았고, 주위에는 시간상 닫긴 했지만 루이비똥 지점이 있을 정도로 수도 한복판이었다--한 가게 주인에게 와인이 있냐고 묻자 우린 와인을 팔지 않는다, 거리에 여자를 노리는 미친놈이 많으니 얼른 들어가라는 식의 이야기를 들었다. 선의로 이야기해주셨겠지만, 섹슈얼라이즈됐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려웠고, 외국인 여성일수록 더더욱 그렇게 바라봐진다는 사실이 상기되면서 집에 돌아오는 길이 무척 무섭게 느껴졌다. 역설적으로 와인을 마시면서는 포르투갈 넷플릭스에선 시청이 가능한 섹스 앤더 시티를 봤다. 1998년 뉴욕 맨해튼에서 캐리 브래드쇼가 여성의 자유롭되 안전한 섹스를 외친 지 26년이 지났지만, 리스본에서의 나는 여전히 두려움에 떨었다.
리스본과 다름슈타트를 떠돌며 혼자 한 생각들:
① 능력의 현실성에 타인의 인정은 얼마나 구성적인 기여를 하는 것일까? 누군가의 능력있음의 호소에 맞서 타인이 그를 인정하지 않고자 할 때에, 해당 타인은 천재의 능력에 대해 무지한 것일 수도(e.g. 살아생전 인기없던 반 고흐), 그저 과도하게 자신감 넘치는 아마추어리즘을 정당하게 거부한 것일 수도 있다. 현재 나의 능력은 어느 정도 현실적일까? 우리는 현실이 마치 그 누구의 승인 또는 불승인과도 무관한 객관성을 담지하는 것처럼 생각하지만 사실은 또는 슬프게도 그렇지 않다.
② 본질이 꼭 초시간적이어야 할까? ‘How timeless is an essence?’ (또는 ‘How timeless should an essence be?’)라는 질문이 그렇게까지 이상한 질문으로 들리지 않는다.
③ ‘대륙’이라는 단위에 대해 요새 부쩍 생각한다. 대륙에 대한 경험을 현상학적으로 분석해봐도 재밌을 것 같다. 같은 대륙에 속해있는 국가들은 지리적으로 붙어있기에 역사적으로 자주 전쟁을 치뤘을 확률이 높다(e.g. 한중일, 발칸 반도). 그런데도 막상 다른 대륙에 오게 되면 같은 대륙 출신들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너도 빵보다 밥이 좋아? 나도! 같은 사소한 합의가 은근히 기운 나게 해주는 것은 물론이고, 대화를 하려고 다가갈 때에도 부담감이 덜하다. 나도 그런데 다른 사람들도 그렇겠지 싶다. 그런 의미에서 아시아인이 유럽에서 학문으로, 그것도 학자들 사이의 소통, 토의가 중요한 인문학으로 ‘성공’을 거둔다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다. 문제는 저 거리(의 존재 혹은 부재)가 상당히 자연스러운 사태이며, 도덕적인 탓(blameworthiness)을 동반하는 것도 아니어서—마치 같은 가수를 좋아하는 사람을 가깝게 느끼는 것이 부당한 편애가 아니듯—아시아인이 겪는 어려움이란 구체적 책임 소재를 물을 수 있는 불의가 아닌 구조적 불의(structural injustice)가 된다는 사실이다. 내 이름이 이국적이어서 이곳의 교수자들이 내 이름을 기억하지 못할 때, 그들이 윤리적인 잘못을 범하는 것은 아니지만, 나는 교수자가 날 부르기를 주저하거나 고유명사가 아닌 보통명사나 대명사로 불리는 서러움을 통과해야 한다. 나는 아직도 벤이라는 아주 쉬운 이름을 가진 백인 남자아이에게 한 교수가 지난한 망설임 후 날 ‘(…) her’라고 어드레스했던 어느 오후를 잊지 못한다. 그에게는 잘못이 없다. 나에게 작은 상처가 남았을 뿐. 시간이 지날수록 그 상처가 더 작아지기를 희망한다. 이제는 거리를 지나며 듣는 니하오와 곤니치와에도 그다지 상심하지 않는다. 차별할 거면 좀 덜 식상하게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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