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흘 동안 똑같은 황갈색 자켓을 입고 도시 곳곳을 돌아다녔다. 이곳에서의 생활과 관련해 유난히 기쁜 마음이 솟는 요즘이다. 기억이 날아가기 전에, 또는 혹시 생길지도 모를 나쁜 일이 내 감정에 구름을 드리우기 전에 지금의 만족감을 보존하고 싶다. 그러고 보니 하늘을 장악해온 비구름이 걷히고 해가 나기 시작한 시점과, 갑자기 내 가슴이 잔잔한 감동으로 벅차오르기 시작한 시점이 꼭 일치한다. 햇볕 쬐는 일이 이렇게 중요하다.
목요일에는 정말 오랜만에 생산적이었고, 어제인 금요일에는 나름 꽃단장을 한 채로 봉준호의 영화 '미키17'을 봤다. 두 날 모두 자기 전에 도수가 낮은 맥주를 마셨는데 법칙 따르듯 끔찍한 악몽을 꿨다. 나는 술을 마시면 오히려 잠을 잘 못 잔다. 언젠가 행복을 도덕의 원리로 삼을 수 없다는 칸트의 주장을 읽은 것이 떠올랐다. 그 무엇도 경험 이전에, 그러니까 선험적으로 행복을 보장하지 못하기 때문인데, 칸트에 따르면 심지어는 건강조차 행복에로 필연적으로 이어지지 못한다. 지나치게 건강한 사람--이를테면 술을 마시고도 깊이 잘 수 있는 사람--은 방탕한 삶을 살게 되기 마련이다. 악몽 덕에 더 깊은 방탕함(?)에 빠지지 않게 동기 부여가 돼 다행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한다.
오늘은 생각했던 것보다 너무 늦게 일어나서 속상했다. 하지만 다음주에는 쭉 오전에 피아노를 치러 가기 때문에 미리 아침잠을 보충한다는 생각으로 합리화했다. 주먹만한 토마토를 썰어 올리브유에 구운 뒤, 계란을 부어 오믈렛 비슷한 것을 점심으로 해먹었다. 예전에 한 번 디에고와 다녀온 뒤로는 처음으로 대도서관에 갔는데, 건물 코앞에서 작은 축제 같은 것이 벌어지고 있었다. 무엇을 축하하는지 그 정체를 알 수 없었고 규모도 상당히 작았다. 음정을 못 맞추는 동네 아주머니들이 팝송을 부르고, 소수의 사람들이 두 줄 정도를 이뤄 그들을 응원했다. 그 광경이 왜 그렇게 흐뭇하게 느껴졌을까? 한국이었더라면 어떻게 도서관 앞에서 축제를 허가할 수 있느냐고 사람들이 욕하고, 항의하고, 시에서는 사과문을 내는 사달이 났을 것 같다. 나도 공부하면서 음악 소리가 들려 불편하긴 했지만, 아주 가끔일 뿐인 소음에 대해서는 그저 그러려니 하고 둔감하게 받아들이는 이곳의 분위기를 훨씬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도서관에서는 태그마이어 교수님의 '잘못과 죄' 아티클을 읽었다. 독일어로 온갖 신학 용어를 배울 수 있어서 좋았다. 원죄(Erbsünde), 위증(Meineid), 신성모독(Gottlästerung), 세례(Taufe) 등등. 다만 독일어 글은 읽는 데 너무 오래 걸린다. 모르는 단어가 많고, 문법적으로 낯선 문장도 적지 않게 마주치게 되다 보니 정확하게 읽고자 하면 한 시간에 한두 쪽밖에 읽을 수가 없다. 그렇다고 대충 읽자니, 훑기만 하면 사실 안 읽느니만 못하다. 철학 논문이란 대개 그런 것이다. 여섯 시에 도서관이 문을 닫아 집으로 향했다. 중간에 편의점에 들러 수프와 오이를 샀고, 사과 맛 젤라또 하나를 주문해서 교회 뒤편 계단에 앉아 먹었다.
주말을 맞아 도시에는 활기가 넘친다. 딱 봐도 데이트 중인 멋진 옷차림의 커플, 내 옆에서 도대체 가만히 있지를 못하는 귀여운 아이, 조기 축구 경기라도 했는지 똑같이 빨간 티셔츠를 입은 아저씨 무리, 다홍색 아페리티프를 마시면서 테라스에 나와있는 여자들. 광장은 식당에서 바깥에로 내놓은 테이블로 가득 차있고, 사람들은 맥주 한 잔에 담배를 두세 개비씩 피우며 대화를 나눈다. 보나 마나 영양가 없는 수다겠지만, 그것만큼이나 일상을 (아주 불가해한 경로로) 풍요롭게 만드는 것이 또 없다. 광장 주변의 좁은 골목에서는 튀김집에서 깡마른 플랜더스 소녀가 무언가를 사서 나온다. 맞은 편 가게에서는 인도계 피부와 머리칼을 가진 가족이 높은 의자에 앉아 피자를 먹는다. 길을 꺾으니 또 다른 튀김집을 만났고, 예전에 안면을 트고 대화를 나눈 적 있는 주인 아저씨께서 창밖으로 보였다. 서로 손을 흔들고 미소를 주고받으니 기분이 너무 좋았다. 아저씨께서는 티벳에서 벨기에로 오신 지 22년이나 됐다고 하신다. 한국에서 왔다고 했더니 와이프가 한국 화장품을 좋아한다고...... 저도요. 타지살이가 힘들다고 하셨지만, 말씀하신 바에 따르면 튀김집 바로 옆에 있는 만두집도 아저씨 것이다. 성공한 사업가......
집에 돌아와서는 정말 오랜만에 토마토 소스로 뭔가를 해먹었다. 담배를 피우고 싶은 마음이 들지만, 줄곧 금연 중이고, 그렇게까지 힘들진 않은 것 같다. 대신 탄산수를 벌컥벌컥 마시고, 올리브를 몇 알 입 안에 털어넣었다.
나는 어쩌다 오늘에 이르렀을까? 이성적인 섭리를 믿지 않지만, 모든 게 순전히 우연적인 에피쿠로스식 세계관도 틀린 것 같다. 알 수 없는 바람을 타고 이곳의 저녁에 당도했고, 고맙게도 그 바람에는 퍽 자비로운 구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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