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잡담이나 소회 같은 것

20250314 지중해식 아침과 서글픈 밤


 이상한 밤이다. 방은 춥고 몸이 무겁다. 그러고 보니 낮에도, 꼿꼿이 앉아있는 것만으로도 힘이 들었다. 그래도 아침 시간을 부지런하게 보낸 덕에 멋진 지중해식 도시락을 만들어서 나갔다. 피타 치즈와 오이, 퀴노아, 소금과 후추를 쳐서 닭고기 구운 것을 쌌다. 덕분에 피곤한 것치고는 하루종일 도서관에서 공부를 할 수 있었다. 

 지금은 침대 위에 반쯤은 앉아있고, 반쯤은 누워있다. 아이리스 머독의 ⟪바다여, 바다여⟫를 다 읽어간다. 2월에 읽기 시작했으니 한 달 남짓 붙잡고 있었다. 주인공 찰스가 자신의 탐욕과, 원한과, 허영심으로 꾸며낸 사랑의 거짓됨을 드디어 깨달았다. 페이지를 넘기는데 갑자기 눈물이 마구 흐르기 시작했다. 최대한 경쾌하게 일기를 써보려 했지만, 타자를 치는 지금도 마구 눈물이 난다. 나도 내 욕심으로 인해 삶 속에서 상당히 많은 소중한 것들을 파괴해오지 않았는가 싶어서….. 그리고 앞으로도, 나는 성자가 아니기에 아무리 노력해도 남을 수밖에 없는,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는 인간적 삶의 일부이기에 남김 없이 버리는 일이 딱히 바람직하지도 않은 욕망이란 것이 얼마나 많은 축복과 행운, 호의를 또 파괴하고 말 것인지…… 더 이상 그 어떤 아름다운 것도 파괴하고 싶지가 않다. 이 또한 욕망이겠지만, 아무튼 그 욕망으로 인해 울음이 멈추지 않는다. 

 불현듯 선도 악도 모두 외로움에서 비롯한다는 생각이 든다. 과학자들은 공감이나 규범의 준수를 선호하는 포유류 뇌 속의 보상 체계가 도덕을 발생시킨다고, 비슷한 말을 건조하게 표현하곤 한다. 울면서 그 건조한 명제를 촉촉하게 부풀리고 있자니 내 안의 동물성을 느낄 수 있다. 동물에게도 사후세계가 있다면, 그리고 개념상 사후세계란 영원한 것이라면, 그 영원성을 이용해 살면서 나에게 아무리 작았든 제 마음을 한 조각이라도 건네줬던 모두를 만나 하나하나, 영겁의 시간동안 꼭 안아주고 싶다. 옹졸한 인격과 몸의 한계로 무언가를, 그것이 무엇이든 무한히 베풀지 못해 미안했고, 한정된 마음을 내게 나누어줘서 고마웠다고. 당장 이렇게 생각한다 해도, 미래의 나는 또 다시 똑같이 옹졸하고 피곤하게 살아갈까 봐 무섭다. 또 다시 똑같이...... 나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신을 믿지 않지만, 놀랍게도 원죄론에 대해서는 의심하지 않은지 오래되었다...... 유학 생활은 하루하루 정말 보람차고, 이 나날들이 몇 년 뒤면 끝나리라는 게 몸서리 쳐지게 싫을 정도로 지나치게 행복한데, 그 행복과 양립이 가능한 방식으로 오늘밤은 쓸쓸하다. 방이 너무 춥다.


 매일 밤 브뤼셀에서 산 슈나우저 인형을 꼭 껴안고 유럽사 유튜브를 듣다 잠든다. 1차 세계 대전에 관심을 갖고 있다. 역사를 공부함으로써만 체험되는 종류의 실존적 해방이 있다. 역사를 왜 공부해야 하느냐는 질문에 흔히 과거의 실수는 피하고 지혜는 배우기 위해서, 그러니까 현재에의 효용을 위해서라고 답하곤 한다. 적어도 나에게 역사의 가치는 그런 것이 아니다. 역사는 무수한 인격적 디테일과 결코 복제될 수 없는 미묘한 사회적 맥락으로 성립하기에, 실제로 반복되는 것은 상당히 일반적인 수준의 인간적 진실뿐이고, 그게 무엇인지 알기 위해 역사 공부가 필요하지는 않다. 철저히 지나간 것에 대해 배우면서, 바로 그 철저히 지나갔음을 이유로 신비와 위안, 지적인 흥분을 느낀다.


 보통 이렇게 엉엉 울고 나면 이튿날 생리가 시작되곤 한다. 그걸 떠올리면 이 감정의 강도는 상대화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감정의 내용이 절대성을 잃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정체 모를 안도감과 한없는 슬픔, 이 쓸쓸한 밤에도 내가 살아있다는 자각에서 솟는 힘과 육체적 피로, 무엇보다 진실과 꿈 사이가 공존하며 심지어는 구분되지 않고 있다. 후설이 1920년 한 유고에서 '죄스러움 속에서의 덕스러운 삶'을 말했을 때, 이런 기분이었을는지(ein tugendhaftes Leben in Sündigkei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