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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담이나 소회 같은 것

20250301 faire le ménage


 고맙게도 하루종일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외롭지 않은 하루를 보냈다. 같이 커피를 마시고, 잠깐 도서관에서 혼자 공부를 한 뒤 똑같은 친구들을 또 만나 메타포에서 맥주를 마셨다. 브뤼헤 트리플이라는 맥주였는데, 도수가 높아 고작 한 잔 가지고 취해버렸다. 자아의 힘이 아직 미치기 전인 날것으로서의 세계에 대해 미유키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줬다. 아무런 종합도, 포착도, 인식도 가해지지 않은 순수한 질료에 대한 이야기였다.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후설과 메를로-퐁티 사이의 입장 차이는 어쩌면 자아와 자아 아닌 질료 사이의 구분을 끝까지 고수하느냐, 아니면 어느 지점에 이르러서는 포기하느냐에 근거한 게 아닌지 생각했다. 동시에 자아와 질료 사이 최초의 접촉에 관한 주장을 과연 현상학이, 아니 어떤 철학이든 정당하게 펼칠 수 있는지 의심스러웠다. 질료라는 개념이 철학자에게는 너무나 익숙하지만, 과학자들은 황당무개하게 생각할 것 같기도 하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죽고 나서 2300년 남짓이나 지난 오늘날, 형이상학의 사명과 지위란 무엇일까?

 잔을 비우고 나서는 같은 거리에 있는 베트남 음식점에 가서 닭고기가 들어간 쌀국수를 시켰다. 키르(Kir)라는 이름의 프랑스 식 칵테일도 마셔보았다. 까막까치밥나무 열매 리큐르에 화이트와인을 섞은 것이란다. 오랜만에 외식에 돈을 쓰니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자리 자체는 무척 즐거웠다. 다만 어떤 대화를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메타포에서보다 더 취했다.

 집에 와서는 잠시 누워 있다가 힘을 내서 집안 청소를 했다. 밀린 설거지를 하는데 물이 빠지지 않아서 당황했고, 어찌저찌 마치고 나서는 싱크대 뚫는 약물 남은 것을 전부 부었다. 샤워 부스도 오랜만에 청소했는데, 물때를 물로 씻어내는 일이 재미있었다. 손톱을 깎고, 환기를 위해 베란다 문을 열고, 양초를 켰다. 더 어렸을 때는 머스크 향이 부담스럽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우아하게 느껴진다. 며칠 전 불을 붙이려다 양초가 담긴 유리를 깨버렸었기 때문에 이번에는 더욱더 조심했다.

 그렇게 한숨을 돌리고 집안을 둘러보는데, 문득 내가 이 공간을 많이 아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시촌에서 E와 둘이 살아본 적은 있지만, 혼자 살기는 이곳에서의 지난 1년 반이 유일하다. 나의 물건이 구석구석, 점차 채워져 나가는 게 뿌듯하다. 현관에는 신발이 늘고, 부엌에는 양념이 늘고, 책장에는 책이 늘고, 벽에 붙이는 엽서가 는다. 수태고지 그림 옆에서 따뜻한 회색 침대 속에 누워있으면 정말 정말 포근하다. 이불이 나를 안아주면, 나는 슈나우저 인형을 안아준다. 공간이 나를 지켜주고 있다는 기분에 사로잡히면서, 내게 사면의 벽과 지붕이 있음에 감사하게 된다.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은 다행히 술이 좀 깼다. 새벽 세 시가 넘어가지만 졸리지는 않다. 머독의 소설을 조금 더 읽다 자고 싶다. 오후에 끊었던 지점에서 주인공 찰스의 은퇴 하우스에 옛 연인 두 명이 동시에 들이닥쳤다. 5-60대가 되어서도 욕망의 드라마는 끝나지 않는 것일까? 냉장고가 비었으므로 내일은 장을 봐야 한다. 비싸도 연어를 꼭 사고 싶다. 연어에 칼집을 내서 레몬 조각을 끼운 뒤, 버터를 바른 팬에 익히는 동안 요거트에 소금, 후추, 레몬올리브 기름을 섞어 소스를 만든 다음, 연어가 다 익으면 회향을 뿌리고 소스를 부어 먹고 싶다. 오랜만에 파스타를 해먹고도 싶은데, 왠지 모르게 내가 만든 파스타는 맛이 별로 없어서 망설여진다. 건강한 간식으로 셀러리와 석류, 다크초콜릿을 살까 한다. 오믈렛용 토마토도 사야 한다. 아시안 마트에 들러서는 우동면과 라면, 두부를 쟁여야지. 무기력하지 않을 때면 장보기는 자취생의 기쁨이 된다. 일도 잘 풀리고 있어서 더더욱 기쁘다. 요 며칠 간, 정말이지 행복하다.

 지금 읽고 있는 윌리엄스와 머독의 책을 다 읽으면 셸링 입문서를 한 권 읽을 계획이다. 미래의 나야, 화이팅!!!

아자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