쉽게 잠 들고 한 번 잠에 들면 꿈도 없이, 마치 새벽이 존재하지 않는 양 잠에 빠져드는 나날들. 전반적으로 기쁘고, 때로는 (이를테면 햇볕을 맞을 때, 브로콜리 따위를 데쳐 먹을 때) 황홀해진다. 그리고 고통스럽지 않은 방식으로 외롭다. 부스스한 머리칼로 아홉 시쯤 일어나, 아침을 먹는 동시에 정신없이 점심 도시락을 싸는 내 오전을 이루는 모든 몸짓과, 몸짓이 표현하는 행위, 행위가 표현하는 기획, 기획이 표현하는 가치관 모두에 대해 몇 자씩 적고 싶지만, 나의 모든 것을 적어내야 한다는 생각조차 저 외로움의 발로이며, 무엇보다도 은밀한 나르시시즘이라는 생각이 나를 막아선다.
나르시시즘: 자주 자기지시의 충동—‘내가’ 무엇을 하고 있다, ‘내’ 의견이 어떠어떠하다, 라고 생각하고 싶은 마음—이 인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면서 지낸다. 세계에 대한 모든 표상에 빠짐없이 ‘나는 생각한다’는 꼬리가 (심리적으로도 아니고 심지어는) 논리적으로 덧붙는다는 칸트의 사상은 너무나 근대인답다. 그래서인지, 물론 어떤 의도인지는 알겠다만은, 우스꽝스러운 지점을 분명히 함유하고 있다. 마치 시력이 나빠서 꼭 안경을 써야 세상을 볼 수 있는 사람이, 시력이 나쁘다는 사실에는 조금도 우스울 게 없지만, 그 안경의 구석에 작은 거울을 (또는 자기 이름표를) 하나 부착해놓고서 이게 이 안경이 작동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거거든요, 이렇게 말하는 것이 우스꽝스러운 것과 비슷한 방식으로 우스꽝스럽다. 그의 말이 참이든 거짓이든, 우리 모두가 저 귀여운 안경잡이인게 맞든 아니든 상관없이 그렇다. 다만 깔깔거리고 제낄 수만은 없는 것이, 나야말로 근대인의 정신에 가장 충실한 영혼이 아닌가 의심이 되기 때문이다. 객관에 맞서는 주관, 거의 자동적으로 동일성을 확보하는 자아, 그 자아의 인식, 인식 하에서만 의미를 가지는 세계, 계몽과 휴머니즘, 이 모든 것들이 내게는 너무나 매혹적이지만, 왠지 그 매혹에 따라 살아서는 안 될 것만 같다. (거의 모든 악덕의 배후에는 자기지시가 있다.)
오전의 말미 또는 오후의 시작 즈음에, 그러니까 도서관에 들어가기 전 피아노 파빌리온에 들러 (문자 그대로) 뚱땅뚱땅 피아노 연습을 한다. (자주) 실수로 틀린 음을 칠 때마다 새삼 작곡가들이 위대하다고 느낀다. 아예 잘못 쳤을 때는 물론이고—오류를 교정한 뒤의 멜로디는 그렇게 자연스러울 수가 없는데, 그 자연스러움이야말로 고도로 인위적인 배치의 산물인지라 매번 충격적이다—화음 처리에 사소한 문제가 있을 때도 마찬가지다. 이를테면 ‘낮은 라-높은 솔-높은 라’를 쳐야 하는데 ‘낮은 솔-낮은 라-높은 라’로 잘못 쳤을 때, 분명 소속 없는 음이 끼어든 것은 아닌데도, 악보에 충실하게 쳤을 때보다 명백하게 추하다. 악보 속 이런 작은 디테일에 열광할 때만큼은 상술한 자기지시가 잠시 멈추고, 나는 익명의 존재가 되며, 어쩐지 가장 덕스러운 판본의 나인 것만 같다. 이상한 일이다. 주체의 이름을 지우는 윤리학에 누구보다 반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나의 한 일부는 자아의 소멸에서, 다른 일부는 자아의 제련에서 덕을 찾는가 보다. 서로 원만하게 화해하시길……
나르시시즘을 중단시키는 앎: 팽이버섯은 밀봉을 해도 정말 빠르게 맛이 간다. 반면 토마토는 냉장고 구석에서도 꿋꿋이 붉다. 꿀벌은 생각 이상으로 통통하며, 데이지와 민들레는 둘 다 봄꽃이지만 정말 정말 다르게 생겼다. 늠름하게 생긴 민들레가 있는가 하면, 귀엽게 생긴 민들레도 있다. 한편 독일어 단어 ‘dumpf’는 ‘곰팡내 나는’을 뜻할 뿐만 아니라, ‘몽롱하고 둔한’ 역시 의미한다. 이토록 넓은 의미원을 지닌 단어라니, 한국인과 달리 독일인은 곰팡내를 표상할 적에 희미하게나마 몽롱함과 둔감함의 관념도 함께 생각하고 마는 것일까? 곰팡내와 둔감함의 관념이 서로 아무 상관도 없는 언어를 구사하며 자라난 우리와 그네들은 얼마나 미묘하되 결정적으로 다른 세계를 영위할 것인가? 아무튼 이런 세부사항을 수집하는 데서 뿌듯함을 느낀다. 그것도 윤리적인 뿌듯함을 느낀다.
파빌리온을 나오면 공부, 또 공부인데 솔직히 말하면 압박감에 토할 것 같다. 긴장성 두통 때문에 일찍 귀가하거나 속이 메스꺼운 날도 있다. 6월의 학회에서 정말 잘하고 싶다. 그 마음 덕분에 성실하게 시간을 보내게 되고, 그런 나 자신이 자랑스럽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바로 그 마음 때문에 괴롭다. 사람을 잘 만나지 않게 되고, 거기서 비롯하는 외로움이 고통스럽지는 않지만, 지겹기는 하다.
사실 사람 만나는 것보다 힘든 것은 카페 이용을 포함해 외식을 잠정적으로 중단한 것이다. 매일 카페에서 공부를 하던 시절도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일주일에 기껏해야 한 번, 마치 네잎 클로버라도 찾아낸 듯한 마음으로, 아니면 자주 돌아오지 않는 장날에 납작 복숭아를 집어들듯 설레는 가슴으로 카페 문턱을 넘고 있는 요즘의 내 모습이 생소하다. 하지만 학회 일정 등으로 3월과 4월에 독일을 다녀왔고, 6월에 또 이탈리아에 가야 해서 돈 쓰는 데 죄책감을 느낀다. 그렇다고 해서 소비를 아예 최소한도로 줄였는가, 하고 물으면 또 아니어서 민망하다. 오늘은 홀린 것처럼 아무 사전적 계획도 없이 벨트를 한 개 샀는데, 아무래도 올해, 그 어떤 브랜드보다도 대박을 친 듯한 끌로에 풍의 금색 벨트였고, 끌로에 벨트의 30분의 1 정도 되는 가격을 확인하자마자 눈이 '휘릭!!!' 하고 돌아갔다. 그런 의미에서 허리띠를 졸라 메려던 건 아니었는데, 원래 의도한 허리띠 졸라 메기에 아주 찬란한 성공은 못 거두고 있고, 그래도 매 끼니 집에서 챙겨먹지 않았더라면 덜 찬란한 성공은 고사하고 무자비하게 실패했을 것이기 때문에, 결론적으로 만족한다.
그 외에 일상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일들. 4월 내내 로이돌트 선생님과의 면담을 속 메스꺼워해 가며 준비한 덕에 독일어 실력이 바짝 늘었다. 처음으로 누군가와 몇십 분을 꽉 채워 독일어로만 대화한 것 같다. 당연히 문법적인 오류를 많이 범했고 발음도 구리지만 중요한 것은 내가 하고 싶은 말이 타인에게 전달되는 것, 내 질문이 (비판 당하더라도 그 전에) 온전히 이해 받는 것이다. 잘하는 것보다 진심으로, 진실하게 하는 것이 완벽주의자인 나에게조차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이번 테르민을 준비하면서 깨달았다. 무척 감사한 깨달음이다. 독일 기차국이 나를 하루종일 괴롭힌 탓에 면담 당일 날, 이름 모를 역 여러 개에서 거의 주저앉아 울 뻔했지만, 선생님께서 지각을 이해해주신 덕에 (그리고 마인츠 역의 무뚝뚝한 맥도날드 직원이 그래도 마치 아무것도 모르는 척, 내가 무언가를 주문하지 않았는데도 선생님께 급하게 연락을 드리는 사이 잠시 앉아있다 갈 수 있게 해준 덕에...) 면담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로이돌트 선생님께서는 날개만 없다뿐이지 천사시다.
다름슈타트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는 캔맥주를 마시면서 음악을 들었다. 에어팟의 배터리가 나갈 때까지 거의 서너 시간은 들은 것 같다. 달리는 기차 바깥은 칠흑 같이 어두운데 기차 안은 너무나 밝고 따뜻하고, 면담을 마쳤다는 생각에 마음은 홀가분하고, 술도 들어갔겠다 온몸으로 흥 타면서 음악을 들었다. 그런데 여담이지만 도이체 반은 객관적으로 문제가 있다…… 단순히 주관적인 불평이 아니라 아니, 엄연히 한 국가의 공공철도인데 국가적 신뢰를 떨어뜨릴 정도로 잘못 돌아가고 있다. 기차에서 떨어진 국가의 위신은 물론 맥주와 빵이 올려준다.
모든 구체적인 순간으로부터 자질구레하되, 바로 그 자질구레함 덕분에 비로소 숭고해지는 내용들을 어쨌거나 추상해서 2025년 봄의 정수만을 추출해볼 수도 있겠다. 요컨대 삶이 과연 나를 허락할 것인지, 말 것인지 시험할 필요가 전혀 없다는 사실, 그저 있으면 되는 것이지 세계를 향해 내 존재를 굳이 해명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 등등을 어색해 하면서도 하루하루 더 당연하게 여기게 되며, 매일 아침이면 믿음들이 자동적으로 갱신이 되는, 그런 봄이다. 일주일 정도 전에 애인과 통화하면서, 바질을 뿌린 감자였나, 연어였나를 먹는데 지나치게 맛이 있고 행복해진 바람에 허니, 내게 바질을 먹을 자격이 있는지 모르겠어요. 이렇게 말했더니 애인이 어처구니 없다는 듯이 웃었다. 웃지 말고 제게 바질 먹을 자격이 있다고 말해주세요. 정확히 이렇게 장난스럽게 요구를 했더니 그는 그 요구에 응하지 않겠노라고 아주 단호하게 말했다. 이유는 내게 바질 먹을 자격이 없어서가 아니라, 바질 먹을 자격의 유무를 묻는 질문 자체가 부조리해서였다. 그럴 자격이 없는 사람도 있나요?
*침묵을 지킴으로써 온갖 해석과 오해를 허용하는 일이 아무리 위협적으로 느껴질지라도 말이다. 왜냐하면 침묵을 지키지 않아도 어차피 해석과 오해는 일어나며, 무엇보다 그 누구도 딱히 나를 해석하고 오해하는 일에 심혈을 기울이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혼자 있는 시간이 길어지다 보면, 타인에게 나를 전적으로 이해시켜야 한다는 필요에 대한 공상 (경우에 따라 망상) 가운데서 그 공상의 전제로서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스스로에게 암시하고 싶어질 수는 있을 것 같다. 외로움이 나르시시즘을, 나르시시즘이 악덕을 낳으며, 반대로 팽이버섯과 민들레 따위에 대한 호기심이 예상치 못하게 덕으로 가는 길을 열어준다.
'잡담이나 소회 같은 것'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250406 시간이 마치 별빛 흐르듯 (4) | 2025.04.07 |
---|---|
20250314 지중해식 아침과 서글픈 밤 (0) | 2025.03.15 |
20250308 바람의 자비 (4) | 2025.03.09 |
20250301 faire le ménage (1) | 2025.03.01 |
20250225 기대 속에 사슬이 (1) | 2025.02.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