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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물

사생활(2023.6)

 방 안으로 그가 들어왔다. 문을 닫지는 않았다. 오히려 창문까지 활짝 열었다. 하나도 아니고 두 개의 창문을 열었다. 그는 두 개의 벽을 차지하고 소설과 철학서로 가득한 서가로 손을 뻗었다. 책 대신 꺼내든 것은 인센스. 곽에는 절 향이라고 쓰여 있었다. 그는 세속을 초월하는 것이 있다고 믿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 향을 가장 좋아했다. 어쩌면 세속과 초월 사이에 구분선이 없다고, 그렇게 믿는지도 몰랐다. 어차피 그는 늘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생각하며 일상을 살았기 때문이다. 알 수 없는 시공으로부터 넘어와 서울을 초토화시키는 고지라. 그는 종종 전후 일본에서 나온 영화를 보러 영상자료원이나 아트 시네마를 찾았다. 본드 스트리트에서 꽃을 사는 클러리서 댈러웨이. 버지니아 울프를 그는 언제나 감탄하면서, 밑줄을 쳐가면서 읽었다. 몇 해 전 노환으로 무지개 다리를 건넌 반려견 송이. 의사도, 심지어는 가족들도 포기한 송이를 죽기 전까지 계속 병원에 데려갔던 것은 그였다. 그는 여전히 송이의 사진이 인화된 티셔츠를 입고 산책을 가거나 잠을 잤다. 마지막으로 살아있지만, 그리고 건강하지만 결코 하루아침에 뛰어넘을 수 없는 거리에 사는 애인. 이런 것들이 그가 생각하는 보이지 않는 것들이었다. 절 냄새는 생각을 배가시키기도, 잠재우기도 했다. 오늘만큼은 후자였으면 좋겠다고, 그가 바라는 듯했다. 피부는 푸석푸석했고, 눈은 피로감으로 가득했다. 얼른 잠을 자야 내일도 최악이 아닌 컨디션으로 출근할 수 있었다. 그가 라이터로 향 끝에 불을 붙인 뒤 후, 하고 불었다. 방 안으로 알싸한 향기와 함께 그를 둘러싼 책들 사이로 고요가 깃들었다.

 조용히, 그리고 천천히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면서 그는 잠을 자야 한다는 생각과 자고 싶지 않다는 생각 사이를 오갔다. 그런 고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나는 알 수 있었다. 그가 토퍼 위가 아닌 책상 앞에 자리를 잡았기 때문이다. 요 며칠 사이, 그는 혼자만의 시간을 조금도 보내지 못했다. 논술 시험의 소위 시즌을 앞두고 그가 일하는 학원은 학생들로 북적였다. 그가 첨삭해야 할 답안지도 탑을 이뤘다. 하나가 끝나면 다른 하나. 그 하나가 끝나도 다음 하나. 배가 고파도 다음 하나, 손목이 아파도 다음 하나. 그래도 한동안만 견디면 쉴 수 있으니까, 라는 생각으로 버텼지만 12월이 오려면 한참을 더 기다려야 했다. 크리스마스를 애인과 함께 보낼 수 있을지에 대해 그는 여러 번 생각해보았다. 마음은 앞섰지만 여행 경비가 만만치 않았다. 무엇보다 바쁜 기간이 끝난다고 해서 노동도 함께 끝나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평생 노동해야 할 처지에 있었고, 그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의 아버지는 여전히 고향인 울산에서 배선을 만졌고, 그의 어머니는 기간제 교사로 사회과목을 가르쳤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던지, 그가 케루악이 펼쳐져 있던 책상을 떠났다. 토퍼 위에 눕고 보니 향은 거의 다 꺼져 있었다. 잠깐 책장을 뒤적인 사이 시간이 그만큼 흐른 것이었다. 그는 네 번째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습관대로 두어 번 어루만졌고, 액자 속의 나도 쓰다듬어주었다. 램프까지 끄니 밤이 완성되었다. 이제 머릿속만 잠잠해지면 완벽할 것이다. 그는 꿈 없는 구간과 꿈으로 넘치는 구간을 거쳐 내일에로 향할 것이다. 내일에는 내일의 밥과 내일의 담배, 내일의 첨삭과 내일의 피로가 있을 것이다. 그가 그렇게 내일로 향하는 사이, 일곱 시간만큼 시계가 늦게 가는 곳에서 그의 애인이자 나의 근원인 사람이 오늘을 살 것이다. 외국인들 사이에서 부대끼며 끊임없이 모국어를, 그리고 모국에 두고 온 애인을 그리워하겠지. 속으로 겁이 많고 앞으로 갈 길이 두려워도, 겉으로는 웃어보이겠지. 나는 그녀를 그보다도 더 잘 알았다. 나는 그녀가 그의 곁에 있어달라고 보낸, 그녀 영혼의 일부였기 때문이다. 나는 사진의 형태로 그의 방 안에 앉아 그녀 대신 그의 출근과 퇴근을, 독서와 잠을 지켜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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