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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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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누벨 마리(2022.9) 라 누벨 마리 아담한 식당이었다. 몇 개 되지 않는 테이블을 에메랄드 색 벽지가 따스한 빛깔로 둘러싸고 있었다. 유창한 영어를 구사하는 종업원이 나에게 메뉴를 가져다주면서 설명해줄까요? 라고 물었다. 하지만 나는 이미 내가 무엇을 먹을지를 알고 있었다. 치즈와 감자를 섞어 걸쭉하게 만든, 알리고란 이름의 프랑스식 요리였다. 삼 년 전, 무라사키 하나라는 이름의 여행 작가의 책에서 알리고에 대해 읽은 적이 있었다. 끈적하지만 잘 끊어지고, 황금빛이지만 구수하고, 먹다 보면 든든해지는 것을 넘어 듬직한 것이 뱃속에 들어차는 기분이라고 무라사키는 썼다. 듬직한 것을 먹는다는 그 기분을 궁금해한 지가 무려 삼 년이었다. 궁금증은 오랜 시간 환상의 입구가 되어주었다. 나는 직장의 점심 시간에 동료와의 수다나 간식..
라파와 줄리(2022.12) 배수아, ⟪밀레나, 밀레나, 황홀한⟫, 테오리아, 2022. 짧은 소설로 감상을 갈음한다. 라파와 줄리 라파는 빈에 사는 스무 살의 소년으로, 키가 훤칠하고 몸은 아주 깡말랐다. 그는 레몬색 반팔셔츠에 청바지를 입고 거리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여 버는 돈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관광객들이 빈에 대해 품어주는 환상의 덕에 그의 벌이는 불안정할 뿐 아주 나쁘지는 않은 편이다. 그의 특기는 아마추어답지 않게 깔끔한 더블스톱으로, 그가 두 현을 동시에 켜기 시작하면 사람들은 지갑에서 하나둘씩 동전을 꺼내보인다. 동전이 짤랑거리는 소리는 라파에게 반가운 반주이다. 라파의 버스킹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12시까지, 오후에는 15시부터 17시까지 도시의 가장 더운 시간을 피해 진행된다. 12시부터 15시 사이에 라파..
석류인간(2022.8) 문청으로서의 자존심 때문에 인정하는 데 시간이 꽤 오래 걸렸지만, 소설을 쓰는 재미보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얼굴을 맞대고 편안한 마음으로 취향과 논증과 위로를 주고받는 일의 소중함이 더 큰 요즈음이다. 이런 선호 체계 하에서 창작에 대한 내 욕망은 어디쯤 위치 지어져야 할까. 아직 배가 덜 고프고, 목이 덜 마르다. 이 사실에 잘못된 것은 없음을. “영지야, 나와 결혼해 줘. 매주 토요일처럼 매일을 보내고 싶어……” 2012년의 겨울이었다. 그 해 세계는 멸망하지 않았으며, 나는 그것 때문에 하루하루 실망해가던 중이었다. 실망감이 절정에 달했던 12월의 하루, 그 날 저녁의 거리는 폭설이 예고되었었는데도 차로 가득했다. 정말로 폭설이 내리기 전에 빨리 이동하고 싶은 사람들의 무리인 것 같았다. 아니면 직업..
비 오는 날, 생의 조각들(2017.5) 2017년이면 내가 학부 4학년을 통과하고 있었을 때구나. 본격적으로 습작을 시작하면서 꿈을 키웠던 시절의 단편. '모리돈부리'라는 덮밥집에서 사케동을 먹으면서 구상했던 기억이 난다. 언어에 대한 감각, 이를테면 콤마를 어디에 찍는 것이 심미적일지에 대한 관점이 지금과 달라 신기하다. 미국에 머물고 있는 동안 올리는 게 적합해 보인다. 하늘은 남색이고 육지는 따분하다. 미국 중서부의 어느 대형슈퍼마켓에서 사람들은 이전부터 셀 수 없이 사온 물건을 또 쥐고 또 담고 하고 있었다. 일주일 전, 일년 전과 마찬가지로 햄과 감자칩과 사과 알이 사람들의 봉지 속에서 등을 동그랗게 만 채로 웅크렸다. 계산대 앞의 캐시어는 표정도 없이 똑같은 행위를 몇백 번째 반복했다. 마트 옆의 1층짜리 상가건물도 따분하기는 매한..
화실 0장(2018.11) 유치하지만 진지했던 스물 네 살 가을의 추억. 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완성했던 장편소설. 총 15장까지 있었고, 안나를 행복하게 만들어주기 위해 마지막까지 노력했다는 기억이다. 0. 혼자 공책을 펴는 시간, 그때만큼은 테이블 위의 스탠드 불이 태양보다도 강력하다. 창문에 커튼이 쳐져 자연으로부터의 빛이 차단된 방 안에서, 안나는 얼마 전부터 배우기 시작한 프랑스어를 두 어절쯤 적어보았다. 그 사이 전구의 둥근 몸뚱어리가 눈꺼풀을 향해 인공의 열기를 쏘는 것이 느껴졌다. Je suis 알파벳들은 적히자마자 안나의 머릿속에서 제 음가를 연주했다. 그녀는 그 발음을 생각하면서 문득, 이 말들이 혹시 ‘Jesus’의 오타는 아닐까 하는 농담 같은 진담, 혹은 진담 같은 농담을 꾸며보다가 그만 두었다. 안나의 프..
미완 - 사과로부터의 푸른 빛(2022.2) 앙리 르 시다네르의 그림들은 견고해 보이는 우리네 세계가 실은 언제나 미세하고 부드럽게 진동하고 있으며, 매 순간 예측할 수 없는 색깔의 빛을 입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런 세계에 대해 고정불변하게 타당할 인식을 찾고자 한다면 실패할 수밖에 없을 뿐만 아니라 세계의 아름다움까지 훼손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인식은 일종의 반달리즘이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처음에는 인식의 효용에 대한 강박적인 기대와 그것의 덧없음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런데 이야기의 뒷부분으로 갈수록 인물이 메시지를 육화하지 못하고 단지 예시로 전락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사상이 조금이라도 배어있는 소설을 쓰고 싶은 사람이 맞닥뜨릴 수 있는 가장 흔하고 치명적인 실수가 아닌가 생각한다. I 오빠가 정성스럽게 피드백을 해줬음에도 불..
도도는 도도도도 / 비평가들(2022.1) (1) 회사에서 도도의 별명은 ‘도도는 도도도도’였다. 도도에게 일을 시키면 도도가 도도도도, 눈알을 잽싸게 굴리고 빠르게 타자를 쳐서 도도도도 프린터로 달려가 다시 도도도도, 서류가 필요했던 사람에게 전달했기 때문이다. 또는 도도가 도도도도, 전화를 걸거나 외근을 나가 볼일을 보고 잠시 커피를 마시는 요령도 없이 도도도도, 회사로 되돌아왔기 때문이다. 도도는 후배도 없는 유일한 말단사원에 불과했고, 입사 후 3년이 지나도 그 점엔 변화가 없었다. 하지만 능력 있고 성실한 데 있어서는 그녀의 상사들보다 배로 나았다. 아무리 규모가 작다고 해도 도도 없이는 회사 전체가 움직이지 않을 정도로 그들은 게을렀으며, 일은 자꾸만 위에서 아래로 끝내는 뿌리의 밑동인 도도에게로 내려왔다. 도도는 혼나지도 않았다. 도..
풀꽃과 장미의 수난(2021.12) 전문은 https://knower2020.com/forum/view/595615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올 포 미’의 첫날은 긴장감 넘치면서도 한산한 끝을 맞았다. 가게에는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간 나와 내 곁을 지키기 위해 반차까지 낸 혜연, 그리고 동네에 새로 생긴 피자집이 궁금해 걸음을 떼준 이웃들 몇 명이 전부였다. 아무리 가오픈 차원에서 단축 운영을 했다고는 하지만, 하루에 손님 네 명은 너무하다 싶었다. 혹시 이름이 피자집답지 않아서 그런가 싶기도 했다. 혜연과 꼬박 일주일을 ‘올 포 미’와 ‘미 앤 마이 피자’ 사이에서 토론한 끝에 어렵게 내린 결정이었는데...... 바닥에 떨어진 도우 부스러기를 줍고, 행주로 테이블을 닦으면서 혜연에게 역시 네 말을 들을 걸 그랬나 봐, 사람들이 여기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