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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사드(Marquis de Sade), <미덕의 불운>

사드(Marquis de Sade), ⟪미덕의 불운⟫, 열린책들, 2011

 

 '사디즘'이란 말의 원류가 된 사드 후작의 소설들을 한 번쯤은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해왔고, 마침 열린책들 출판사에서 번역된 판본이 있기에 구매했다. ⟪미덕의 불운⟫은 온갖 술수로 백작부인이 된 언니 쥘리에뜨와 달리 정직함과 자상함, 타인을 돕고자 하는 마음, 타인을 해치지 않고자 하는 마음, 은혜 입은 사람에게 보답하고자 하는 마음 등 거의 모든 미덕을 갖춘 동생 쥐스띤느가 미덕을 발휘할 때마다 바로 그 미덕을 이유로 매번 새롭고 보다 잔인해지는 불운들을 끊임없이 맞이하는 이야기다. 소설은 일종의 액자식 구성을 취하고 있어, 쥐스띤느가 아직은 자신의 정체를 숨긴 채 언니 쥘리에뜨에게 자신의 인생사를 털어놓는 장면에서 시작한다고 봐도 무방하다. 

 쥐스띤느의 사연은 책의 후반부에 이르러 마치 옛날 연극의 독백에서와 같이 본인의 입으로 요약된다(214-5). 그녀는 열두 살의 나이로 고아가 돼 고리대금업자 아르뺑의 하녀로 일하다, 절도에 동의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반지 도둑으로 몰린다. 이어 방탕한 생활을 일삼는 브레삭 후작의 집에서 그의 어머니의 침모로 일하다, 그녀를 죽이는 일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채찍질을 당한다. (심지어 쥐스띤느는 브레삭 후작을 연모하고 있었다.) 다음으론 의사 로댕의 하녀로 일하다, 그가 12살짜리 소녀에 대해 생체실험을 가하려는 것을 막았다는 이유로 죄수됨을 뜻하는 문신을 당한다. 마음의 위안을 얻기 위해 찾아간 쌩뜨-마리-데-부와 수도원에서는 신부 네 명에게 번갈아 가며 끔찍한 성적 착취의 대상이 되었다가 겨우 그 처지를 벗어나는데... 쥐스띤느의 고통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여로에서 달빌르라는 이름의 사내가 다친 것을 보고 그를 치료해줬지만 이번에도 미덕의 보상을 받기는커녕 고대의 노예에게 강제될 법한 강제노역에 시달리며 다시금 채찍질을 당한다. 

 "그리하여 저는, 복수심이나 수치스러운 관능에 이끌려 다른 사람의 고통을 즐길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오직 자존심의 만족이나 끔찍한 호기심 외에 다른 동기가 없어도 같은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사람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잔인한 만족감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인간은 선천적으로 악하며, 그것은 그들이 평온할 때나 정열의 광증에 사로잡혀 있을 때나 거의 마찬가지이고, 따라서 어느 경우이건, 다른 사람의 고통이 인간에게는 타기할 만한 즐거움이 됩니다."(173)

 

 쥐스띤느가 고통스럽게 오직 기도에만 의지해 삶을 이어나가는 사이, 그녀를 고통 속으로 빠뜨렸던 사람들은 모두 엄청난 부자가 되거나 명예로운 지위를 누린다. 쥐스띤느가 언니 쥘리에뜨와 재회하는 순간, 그러니까 액자 속의 이야기가 끝나는 시점은 쥐스띤느가 강제노역에서 풀려난 이후에조차 이어지는 불운들 가운데서 어느 아이를 불길 속에서 구해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 어머니에 의해 방화범으로 몰려 사형수가 되고 나서이다. 그녀의 사연을 듣고 연민과 의분에 사로잡힌 쥘리에뜨와 그의 연인 꼬르빌르는 자신들의 인맥과 돈, 법에의 호소를 통해 쥐스띤느를 구원하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행복도 잠시, 쥐스띤느는 천둥을 무서워하는 언니를 진정시키는 와중에 본인이 벼락을 맞고 사망한다. 쥘리에뜨는 쥐스띤느의 뜻을 이어받겠다며 백작 부인의 칭호를 버리고 수녀원에 들어가고, 꼬르빌르는 "국가의 중대사들을 두루 맡아, 백성의 행복이며 국왕의 영광이고 친구들의 행운이 되었다."(224)

 이 책에 대한 나의 감상은 5월 5일 새벽을 기점으로 180도 바뀌었기 때문에 두 감상을 모두 전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형식의 독후감은 정말이지 처음 써본다.


1. 5월 5일 새벽 이전(약 170페이지 가량 읽음). 나는 사드의 소설이라면 무조건, 도덕을 무자비하게 희생시키는 극단적 유미주의 소설일 줄 알았는데 편견이었다. 그의 소설은 세계의 참상을, 비윤리의 만연함을 고발함으로써 오히려 독자의 정의감을 고취시키는 측면이 있다. 특히 쌩뜨-마리-데-부와 수도원에서의 감금과 성 착취는 n번방 사건을 연상시켰으므로 나는 읽는 내내 극도의 역겨움과 공포 그리고 의분으로 떨었다. 그러니까 사드는 미덕의 '불운'을 제목 그대로 역설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을 읽고 난 뒤 '미덕은 불운을 낳으니 덕을 내버리자'고 생각하는 독자는 거의 없을 것이다. 반대로 약하지만 올곧은 쥐스띤느를 악몽 같은 삶으로 내몬 악한들에 대한 분노와, 인간 본성에 내재한 한계를 모르는 잔혹함의 가능성 앞에서의 무력감, 그리고 만일 쥐스띤느의 삶과 같은 것을 섭리의 일부로 내세우는 조물주가 있다면 그를 향한 불가해함의 감정에 이를 뿐일 것이다. ⟪미덕의 불운⟫이 싸드의 이후 문학 세계--나폴레옹이 그토록 끔찍하다고 매도했던--의 원류라는데, 여태까지의 내용만 봐서는 어째서 그가 표지에 적혀있는 대로 '도덕과 종교에 대한 대담한 반항자'인지 잘 모르겠다. ⟪미덕의 불운⟫은 혁명의 불길 가운데서 집필된 욥기이다.

2. 5월 5일 새벽 이후(싸드 후작의 실제 삶에 대해 알게 되었고, 책을 끝까지 읽음). 혁명의 불길 가운데서 집필된 욥기가 아닌 것 같다. 사드 후작에 대한 나무위키 아티클을 읽었는데, 그는 어려서부터 난봉꾼으로 유명했으며, 부활절에 성매매 여성을 학대한 사건으로 나라 전체를 떠들썩하게 만들었고, 또 다른 성매매 여성에게는 최음제를 오용하여 살인미수 혐의를 받았으며, 수녀인 처제와 근친상간을 벌인 뒤에도 부인과 함께 자신의 영지에서 가혹한 성행위를 이어갔다고 한다. 이때 미성년자인 시동들에게까지 음란행위를 강요했다(모든 정보의 출처는 namu.wiki/w/사드%20후작). 그의 실제 인생사를 알고 나니, 쥐스띤느를 강간하고 착취하는 장면들을 집필하면서 그가 쾌락을 느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 소름 끼쳤다. 그 생각은 쥐스띤느의 어처구니없는 죽음, 쥘리에뜨의 우스울 정도로 빠른 회개, 꼬르빌르의 동화 같은 성공이라는 결말로 인해, 그리고 미덕에 대한 조롱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는 이 미친 풍자소설의 마지막 문단으로 인해 굳어졌다.

"오! 이 이야기를 읽으시는 독자 제위께서도, 허영에 빠졌다가 스스로를 추스른 이 여인[쥘리에뜨]처럼 우리의 이야기에서 얻은 바가 있기를 바라노라. 그녀와 마찬가지로 여러분 역시, 진정한 행복은 미덕 속에 있으며, 또 미덕이 지상에서 박해당함을 하느님께서 용인하심은, 하늘에서 그에게 더 기쁜 보상을 준비하기 위함이라는 것을 확신하시기 바라노라."(224)

 

 사드 후작이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해 모르는 독자라 하더라도 쥐스띤느의 기나긴 불행을 지나칠 정도로 구체적으로 묘사한 이 소설이 위와 같은 말 몇 마디로 끝맺어졌을 때, 저것들이 죄다 반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완벽하게 속은 느낌이다. 여성 독자로서는 구역질이 난다. 반면 기욤 아뽈리네르는 그를 "이전에 존재하였던 가장 자유로운 정신"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하지만 내가 이런 자유까지 자유로서 존중해줘야 하는가? 허구의 문학이므로 사드의 실제 인생사와는 독립적인 자비를 베풀어야 하는가? 감정에 사로잡혀서 여러 반박 명제들만이 머릿속을 떠다닐 뿐 윤리학적으로 빈틈없는 체계는 아직 못 세우겠다. 이런 소설들을 접할 때마다 정말 솔직히 말하면 어쩔 줄 모르겠고, 미학을 제대로 공부했어야 했다는 회한만 밀려든다. 윤리주의에 대해서라도 논증 몇 개부터 찾아봐야지 싶다.


 화를 잠시 가라앉히고 시선을 전환하면 쥐스띤느를 둘러싼 인물들이 펼치는, 악덕을 정당화하는 논증들 중 몇몇은 생각보다 반박이 어렵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 논증들은 크게 다음과 같이 분류된다.

1. 사회구조에 의한 범죄의 불가피성. 빈자의 악덕은 "부자들의 무정함"에 의해 정당화된다. 악덕을 행하지 않으면 빈자는 살아남을 수 없도록, 예컨대 장발장이 빵을 훔칠 수 없도록 사회가 구조화돼있다. (--> '그러면 가난해도 법을 지키는 사람들은 뭐가 되냐'는 수준의 단순한 반박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우리들이 저지른 범행은 바로 저들[부자들]이 조장한 저들의 산물이며, 따라서 우리들을 짓누르고 있는 멍에를 조금이나마 가볍게 하기 위한 범행을 거절한다면, 그것은 우리들이 속임수에 떨어지는 꼴이 되는 거예요.(41)"

 

2. 악의 섭리 내로의 편입. 신의 섭리 자체가 "악행이 불가피한 처지 속에" 사람들을 집어넣었다(43). 악덕마저 신의 뜻이다(190). 신이 미덕을 행한 자에게 내세의 보상을 주는 것도 아니다. (--> 내세에서의 판도는 알 수 없는 문제고, 이 논증에 대해서는 많은 신정론들이 방패를 들이밀고 있다.)

"나 역시, 어떤 신이 존재한다면 이 세상의 악도 훨씬 적을 것이라 믿어요. 그러나, 이 지상에 악이 존재한다는 것은, 그 모든 무질서가 그 신의 필요에 의해 생겼거나, 아니면 악을 막는 것이 그의 힘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따라서 무력하거나, 그게 아니라면 심술 사나운 그러한 신을 나는 전혀 경외하지 않으며, 아무 두려움 없이 그를 무시하고, 그가 내리친다는 벼락도 비웃어요."(195)

 

3. 약육강식의 논리. 강한 사람이 약한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어야 할 의무는 없다. 힘들이 사람들 간에 불평등하게 분배되도록 만든 것은 자연 자신이므로, 오늘날의 약자인 빈자를 돕는 것은 자연의 균형과 질서를 거스르는 일이며, 그들의 "무기력과 빈둥거림을 고취"할 뿐이다(180). (--> 인간이 반드시 자연의 질서를 따라야 할 이유는 없다.)

4. 악덕의 유용성. 로르상주 백작 부인이 된 쥘리에뜨의 삶이 증거하듯, 악덕은 미덕보다 유용하다. 즉 부나 권력, 안락함 등을 쉽게 수중에 넣게 해준다. 반면 미덕은, 동생 쥐스띤느의 삶이 증거하듯, 배신과 가난, 염세, 심지어는 죽음만을 안겨준다. + 4-1. 미덕과 악덕 모두 저마다의 가치를 가진 삶의 방식이지만, 중요한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을 따라서 사는 것인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악덕을 택한다. 모두가 악덕을 행할 때 혼자 미덕을 행한다면 투쟁과 파멸에 이르고 만다. (--> 유용성은 당위를 낳지 않는다.)

5. 도덕 상대주의. 무엇이 범죄에 해당하는지는 개인의 견해마다 그리고 지역마다 다르다. 범죄에 따르는 회한은 금지라는 형식으로부터 비롯할 뿐, 행위의 내용에서 비롯하는 것이 아니다. (--> 정말 골치아픈 문제다. 상대주의 측에서 끝까지 물고 늘어지면 증명의 부담이 오히려 절대주의 쪽에 훨씬 많이 쏠린다.)

"범죄란 기실 존재하지 않거나 혹은 자연의 총체 속에서 필요한 것임을 확신하게 된다면, 범죄라는 것을 저지르면서 느끼는 회한을 정복하는 것 역시 쉬울 거예요."(191)

 글을 어떻게 마무리해야 할지 모르겠다. 책을 덮었을 때는 최근에 출간된 ⟪소돔의 120일⟫까지 읽어보고 난 뒤에 사드에 대해 최종적 판단--그런 것이 가능하기만 하다면--을 내려야겠다고 생각했었다. 심지어 내가 좋아하는 워크룸프레스라는 출판사에서 책을 디자인했다고 한다. 하지만 막상 독후감을 쓰다 보니 내가 이 이상의 미덕의 불운, 악덕의 융성을 심리적으로 견딜 수 있을지 모르겠다. 나는 아뽈리네르가 말하는 자유로운 정신은 못 되나 보다. (니체를 읽으면서는 난 초인은 못 되겠다 싶었었는데...)

 사유의 깊이가 부족한 독후감을 쓴 것 같아서 아쉽고 스스로가 한심한 밤이다. 얼른 연구실을 떠나 집으로 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