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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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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병모, <심장에 수놓은 이야기> 구병모, ⟪심장에 수놓은 이야기⟫, arte, 2020. 스포일러가 있다. 이제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작가 중 한 명이 된 구병모의 중편소설. 지하철역 안에서 꽃과 함께 팔리고 있던 것을 냉큼 집었다. 표지가 찢어지고 노출된 부분 모두에 먼지가 쌓여있었지만, 오랜만에 찜질방에 가는 길이었고, 나무 베개 따위를 베고 처음부터 끝까지 읽을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했기 때문에 개의치 않았다. 찜질방에 젊은 사람은 나와 애인뿐이었다. 식당의 불은 꺼져 있었으며, 코로나 이후 폐쇄된 듯한 사우나가 몇 개 되었다. 당연히 조용하고 어떻게 보면 조금 쓸쓸한 분위기의 공간이었다. 그러나 목욕탕 내부 평상에서 수다를 떨던 아주머니들의 웃음소리가 밝았고, 어렸을 때부터 줄곧 '때밀기'로만 알고 있었는데 어느새 통용되고 있는..
유희경의 시 '그해 여름'*의 영역 서로를 좋아하는지, 심지어 약간은 짜증스러워하는지 알 수 없지만, 그럼에도 계절 내내 함께 술을 마셨을 정도로 어떤 씁쓸한 기분을 꽤 오래 공유해온 사람들의 모습. 마지막 시어 '수치'를 얼마나 무겁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시의 분위기는 널뛰듯 달라진다. '흉내냄'이 정말 흉내에 불과한지, 그리고 '낄낄댐'이 정말 웃는 소리인지 결정하는 것도 저 '수치'의 무게다. 젊음을 자기혐오로 낭비하면서도 그렇게 소모되는 자신의 시간에 대해 모종의 나르시시스트적 애틋함을 느끼는 애송이 대학생들의 이야기가 될 수도, 그래도 삶의 회한을 어느 정도 안다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이 붉어진 눈시울을 노을 아래 숨기는 이야기가 될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지 간에 최대한 구어체에 가깝게 옮기고자 했고, 그 과정에서 내가 생각하기에 ..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9권 마르셀 프루스트, 김희영 옮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9권, 민음사, 2020, 모든 강조는 필자. 알베르틴에 대한 마르셀의 사랑은 그녀가 다른 여성 혹은 남성과 성적으로 얽힐까 봐 전전긍긍해 하는 불안에 의해 지탱된다. 그러나 마르셀이 아무리 앙드레와 운전사를 감시자로 말하자면 고용하여 알베르틴에게 보낸다고 할지라도 그녀의 모든 사생활을 파악하고 통제하는 일은 실질적으로 불가능하다. 이 때문에 저 불안은 말소될 수 없고, 무한히 증강하는 성격을 띠게 된다. "배신의 가능성"으로부터 오는 저 끝없는 불안감으로부터 마르셀은 고통을 경험하지만, 그 고통만이 역설적으로 알베르틴에 대한 그의 애정을 지속시킨다(172). "나는 고뇌를 멈추든가 사랑을 멈추든가 선택해야만 했다. 처음에는 욕망으로 형성된 사랑..
안윤, <남겨진 이름들> 안윤, ⟪남겨진 이름들⟫, 문학동네, 2022. 인물과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너무나 따뜻해서 작가를 동경하게 되는 소설들이 있다. ⟪남겨진 이름들⟫은 아주 느린 속도로 한 간호사의 삶, 그녀가 간병하는 여자의 삶, 그리고 그 여자의 남편의 삶을 응시한다. 그 셋은 희망의 달인들이다. 주어진 삶의 과제들에 묵묵히 응하고, 햇살과 과일 그리고 주변인의 온기로부터 그 어떤 쾌락과도 비교할 수 없이 값진 행복을 찾아낸다. 좋은 삶이란 절망을 피해가는 데 성공한 삶이기보다 절망 앞에서 포기하지 않는 삶임을 아주 조용하게, 그러나 절실하게 주장하고, 또 읽는 이에게 설득해내는 데 성공한다.
허수경,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허수경,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문학과지성사, 2016. 슬픔을 쏟아내기에 바쁜 시들, 한없이 우울한 귀결로 치닫는 시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아무 희망도 없는 새드 엔딩은 아무리 사실적으로 보일지언정 놀랍게도 비현실적이고, 그렇기에 무책임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추천 받거나 선물 받았던 시집들 몇 권에 대해, 그것들이 매우 인기있는 시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좋지 않은 평을 남겼었다. 그런데 허수경의 시들은 슬프고 우울한데도 불구하고 나를 사로잡았다. 시어들이 평이하되 아름답게 조합되어 있어서였을까? 운율 덕분이었을까? 곰곰 생각해 보았는데, 아무래도 그녀의 시 속 애수는 자폐적인 것이 아니라 타인으로부터 와서 타인에게로 흘러가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허수경 시의 화자들은 자신..
배수아, ⟪올빼미의 없음⟫ 중 '올빼미' 배수아, ⟪올빼미의 없음⟫, 창비, 2010, 모든 강조는 필자의 것. 완벽하게 혼자가 되었다면 더더욱 처절하게 타인의 존재를 갈구하고 외로움에 몸부림칠 법한데도 '날 찾아올 필요가 없어요'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의 강인함이란, 내가 이번 생에서 모방이나 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일까. "일년에 한 번 정도 날 찾아와요. 당신을 위해서, 그리고 나를 위해서. 매년 이맘때 이 도시를 방문해서 이 집의 문앞에 적힌 내 이름을 읽어줘요. 내 이름이 있으면, 나는 여기 살고 있는 거니깐. 그러면 망설일 필요 없이 문을 열고 들어와 가방을 내려놓고 여기서 한두 주일 지내요. 내게는 낡은 타이프라이터가 한 대 더 있으니 그걸 사용해서 내 방에서 번역 일을 해도 좋아요. 이 집 부엌은 비좁긴 하지만 간단한 아침식사나 수..
앙드레 지드, <반도덕주의자> 앙드레 지드, 동성식 옮김, ⟪반도덕주의자(L'immoraliste)⟫, 민음사, 2017, 모든 강조는 필자. 남편 미셸의 병이 낫고 생명력이 고양되는 가운데 아내 마르슬린의 병은 악화되어가는 서사를 기둥으로 갖는 이야기이다. 미셸은 건강해져감과 동시에 마르슬린의 표현을 빌리면 약자를 말살하는 반도덕주의를 개진해나간다. 하지만 정작 그 주의가 아내를 죽음으로 몰아가자 무력감과 허무주의에 빠져든다. 제목에 걸맞게 조금 더 뻔뻔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몰개성을 도덕으로 치부하는 사회를 삐딱하게 생각하는 메날크라는 인물만큼은 매우 좋았다. "처음에 나는 어떤 소설가나 시인 들에게서 삶에 대한 좀 더 직접적인 이해를 발견하기를 기대했다. 하지만 그들은, 그러한 이해가 있었다 해도, 솔직히 말해..
유희경, <당신의 자리-나무로 자라는 방법> 유희경, ⟪당신의 자리-나무로 자라는 방법⟫, 아침달, 2018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나는 나의 몰락을 아주 구체적으로 상상해보는 습관을 가지고 있다. 광기라면 광기다. 심리학에서는 '파국화'라는 딱딱한 용어로 부르곤 하는데 실제로도 아무 낭만 없는 불안의 난장판이 전부다. 나의 몽상은 특히 생리 직전에 심해지며 간혹 가다가는 침대를 벗어나기가 매우 힘들어지고 내가 나 자신을 지킬 수 있을 리 없다는 생각에 누군가 아버지 같은 존재가 나타나, 나를 지켜줬으면 하고 간절히 바라게 된다. 그러나 족히 몇 년은 반복된 일이며, 생리는 여성인 나에게 세계 행정의 일부로서 다달이 찾아오기 때문에 나에게도 나름의 대응체계가 마련되어있다. 이제는 몽상으로 인해 일상이 지장은 받아도 중단되지는 않는다. 내가 고안하는 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