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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9권

마르셀 프루스트, 김희영 옮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9권, 민음사, 2020, 모든 강조는 필자.

끝이 보인다

 알베르틴에 대한 마르셀의 사랑은 그녀가 다른 여성 혹은 남성과 성적으로 얽힐까 봐 전전긍긍해 하는 불안에 의해 지탱된다. 그러나 마르셀이 아무리 앙드레와 운전사를 감시자로 말하자면 고용하여 알베르틴에게 보낸다고 할지라도 그녀의 모든 사생활을 파악하고 통제하는 일은 실질적으로 불가능하다. 이 때문에 저 불안은 말소될 수 없고, 무한히 증강하는 성격을 띠게 된다.

 "배신의 가능성"으로부터 오는 저 끝없는 불안감으로부터 마르셀은 고통을 경험하지만, 그 고통만이 역설적으로 알베르틴에 대한 그의 애정을 지속시킨다(172). "나는 고뇌를 멈추든가 사랑을 멈추든가 선택해야만 했다. 처음에는 욕망으로 형성된 사랑이, 나중에는 고통스러운 불안에 의해서만 유지되었기 때문이다. [...] 정복할 부분이 남아 있을 때라야 사랑은 태어나며 존속한다. 우리는 우리가 완전히 소유하지 못한 것만을 사랑한다."(172) 어쩌면 마르셀의 겁과 질투, 연인의 모든 행방을 알고자 하는 열망, 그 끔찍한 소유욕은 그 자신에게마저 숨겨져 있는 은밀한, 이렇게 말해도 된다면 무의식적인 기쁨을 동반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갇힌 여인⟫에서의 마르셀은 마치 ⟪스완의 사랑⟫에서 스완이 오데트에게 그랬던 것처럼 연인을 향한 집착에 매몰되어 있다. 마르셀은 다음과 같은 구절들에서 사랑이란 특정한 타인을 향한 것이 아니라 그 타인이 야기하는 자신의 불안감에 대한 중독임을 천명하기에 이른다.

 "그녀는 편지를 약속했으며, 그래서 우리의 마음은 평온을 얻어 더 이상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다. 그런데 편지는 오지 않고, 어떤 배달부도 편지를 가져다주지 않는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불안이, 사랑이 되살아난다. [...] 이 사랑은 우리의 슬픔에서 왔으며, 어쩌면 우리의 사랑은 이 슬픔일 뿐이며, 검은 머리 소녀라는 대상은 거기서 아주 작은 부분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 대체로 사랑은 우리 몸을 대상으로 하는데, 다만 어떤 감동이, 사랑의 대상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그것을 되찾을 수 있을지 어떨지에 대한 불확실성이 그 몸 안에 녹아 있는 조건에서만 그러하다. [...] 그런 존재들, 그런 도주하는 존재들에게, 그들 자신의 기질과 우리의 불안한 마음이 날개를 달아 준다. [...] 그 존재를 잃어버릴까 봐 두려워할 때면 나머지 다른 이들은 모두 망각한다. 그 존재를 붙잡고 있다고 확신할 때면 우리는 그 존재를 다른 이들과 비교하고, 그 존재보다 다른 이들을 더 좋아한다."(149)

 

 집착은 연인이 "단순한 생리적 기능 외에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 즉 비생명체이자 물질로 전락할 때에야 진정된다(183). 그러나 연인은 결코 비생명체나 물질이 아니고 살아있는, 무엇보다 자유로운 행위자이기에 저 집착은 영속적이다. 프루스트가 내 눈에 보기에는 병적인 이러한 사랑의 모델--안정감과 신뢰가 아닌, 소멸의 두려움과 불신에 의해 근거 지워지는 사랑--을 마치 모든 사랑이 공유하는 보편적인 양태인 양 묘사하는 것은 매우 흥미롭다. "우리는 사랑의 대상이 육체 안에 갇혀 우리 눈앞에 누워 있는 존재일 거라고 상상한다. 그러나 슬프게도! 사랑은 이 존재가 과거에 차지했던, 또 앞으로 차지할 공간과 시간 속의 모든 지점으로의 확대이다. 그러므로 만일 이 존재가 접촉했던 장소나 시간을 알지 못한다면, 존재를 소유하지 못한 것과 다름없다. 그런데 이 모든 지점에 이를 수는 없다. 그 지점이 어디인지 지적되기만 해도, 어쩌면 그곳까지 손을 뻗을 수 있을 텐데.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찾지 못하고 그저 더듬을 뿐이다. 거기서 불신과 질투와 박해가 연유한다."(162) 그런데 정말 모든 사랑은 그것이 깨어질 가능성에 의해 지탱되는 것일까? 결코 깨어지지 않는 사랑은 사랑이기를 중단할까, 혹은 적어도 사랑의 마음을 불 끄듯 소화시켜버리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