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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유희경, <당신의 자리-나무로 자라는 방법>

유희경, ⟪당신의 자리-나무로 자라는 방법⟫, 아침달, 2018

달달 외워서 언젠가 술자리에서 낭독해보고 싶어지는 시였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나는 나의 몰락을 아주 구체적으로 상상해보는 습관을 가지고 있다. 광기라면 광기다. 심리학에서는 '파국화'라는 딱딱한 용어로 부르곤 하는데 실제로도 아무 낭만 없는 불안의 난장판이 전부다. 나의 몽상은 특히 생리 직전에 심해지며 간혹 가다가는 침대를 벗어나기가 매우 힘들어지고 내가 나 자신을 지킬 수 있을 리 없다는 생각에 누군가 아버지 같은 존재가 나타나, 나를 지켜줬으면 하고 간절히 바라게 된다.

 그러나 족히 몇 년은 반복된 일이며, 생리는 여성인 나에게 세계 행정의 일부로서 다달이 찾아오기 때문에 나에게도 나름의 대응체계가 마련되어있다. 이제는 몽상으로 인해 일상이 지장은 받아도 중단되지는 않는다. 내가 고안하는 데 성공한 여러 대응들 중 하나는 바로 나의 몰락 이후에도 잔존할 여러 아름다운 것들을 속으로 나열하고 상상해보는 것이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돌연히 회복될 수 없는 병에 걸려 아무도 문안 오지 않는 병원에서 창문만 바라보게 됐다든지, 내가 잘 보이기를 바랐던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갖가지 이유로 나를 조롱하거나 적대시하는 상황에서도, 나무의 껍질은 아름답다. 여름의 나무도, 겨울의 나무도 아름다우며 나무에 기대 명상을 하거나 시집을 뒤적이는 일은 아름답다. 몽상의 실현 이후에도 내 곁에 남아주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의 얼굴에 난 점, 핀 주름, 묻은 먼지가 아름답다. 이렇게 아름다운 개별자들을 하나둘씩 세다 보면 가끔씩 나는 변태 같지만 세계 자체의 아름다움에 눈뜨게 되는데, 그 순간 불안감은 와장창 깨져버린다. 너무나 화려했으나 푸쉬 한 번으로 산산조각나는 도자기처럼, 왜냐하면 몰락이란 것 자체가 존재하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