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문학

허수경,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허수경,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문학과지성사, 2016.

마곡나루에서

 슬픔을 쏟아내기에 바쁜 시들, 한없이 우울한 귀결로 치닫는 시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아무 희망도 없는 새드 엔딩은 아무리 사실적으로 보일지언정 놀랍게도 비현실적이고, 그렇기에 무책임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추천 받거나 선물 받았던 시집들 몇 권에 대해, 그것들이 매우 인기있는 시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좋지 않은 평을 남겼었다. 그런데 허수경의 시들은 슬프고 우울한데도 불구하고 나를 사로잡았다. 시어들이 평이하되 아름답게 조합되어 있어서였을까? 운율 덕분이었을까? 곰곰 생각해 보았는데, 아무래도 그녀의 시 속 애수는 자폐적인 것이 아니라 타인으로부터 와서 타인에게로 흘러가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허수경 시의 화자들은 자신 때문이 아니라 친구 때문에, 애인 때문에 슬퍼한다. 연약한 "비닐영혼"인 것이 맞다(116). 하지만 그 상실감을 이유로 그들 그리고 그들을 만나게 해준 세계를 원망하지는 않는다. 다만 "라일락"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이냐고, 청순하게 물을 뿐이다.


"가난하고도 즐거워 오랫동안 마음의 파랑 같을 점심 식사를 나누던 빛 속, 누군가 그 점심에 우리의 불우한 미래를 예언했다 우린 살짝 웃으며 대답했다, 우린 그냥 우리의 가슴이에요"(<레몬>, 32)

"우리의 몸은 추상화가 아니었다 우리는 내일이라도 이 삶을 집어치우며 먼바다로 가서 검은 그늘로 살 수도 있었다 언제나 차마 그럴 수 없었다 몸은커녕 삶도 추상화가 아니어서"(<오렌지>, 42)

"스크랩북 안에 든 오래된 사진이 / 정말 죽어버리는 것에 대해서 / 웃어버리는 거야, 라일락, / 아주 웃어버리는 거야"(<라일락>, 52)

 "누런 아기를 손마디에 달고 흔들거리던 은행나무가 물었다, 나, 때문인가요? / 첼로의 아픈 손가락을 쓸어주던 바람이 물었다, 나, 때문인가요? / 무대 뒤편에서 조용히 의상을 갈아입던 중년 가수가 물었다, 나 때문인가요?"(<돌이킬 수 없었다>, 78)

 "우리는 함께 철새들을 보냈네 / 죽음 어린 날개로 대륙을 횡단하던 여행자 / 먼 곳으로 떠나가는 모든 것들에게 입맞춤을 하면 / 우리의 낡은 몸에는 총살당한 입김만이 어렸네"(<나의 가버린 헌 창문들에게>, 82)

 "왜 얼굴 없는 바람은 저렇게 많은 손가락을 가져서 / 네가 떠난 자리를 수천 개의 장소로 만드는지 / 왜 네가 떠났는지 말해줄 수도 없다"(<사진 속의 달>, 93)

 "별들이 많다고 쓰다가 이생에 다시 만날 사람들의 숫자가 자꾸 줄어들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더러 만나보지도 못했던 유령들도 있어서 누군가 영혼의 물을 따라주자 나는 그걸 눈물이라고 부를 수도 있었네"(<유령들>, 109)

 "너는 왔고 이 세기의 비닐영혼은 말한다, 네 손에서는 손금이 비처럼 내렸지 네가 왔을 때 왜 나는 그때 주먹을 쥐지 않았을까, 손가락 관절 마디마다 돋아드는 그림자로 저 완강한 손금비를 후려치지 않았을까"(<너, 없이 희망과 함께>, 116)

 "오, 익숙한 이여 애인처럼 / 나를 떠나지 마라 / 슬며시 누르는 슬픔이 / 영혼 속의 물곰치 한 마리로 헤엄친다"(<지하철 입구에서>, 1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