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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김혜진, <불과 나의 자서전>

김혜진, <불과 나의 자서전>, 현대문학, 2020

 "그쪽으로는 아예 발길도 마라(140)."
 "그러게. 내가 남일동에 가지 말라고 했잖니. 그 동네는 사람을 미치게 만든다. 남일동은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동네야(169)."

 

 시야에 들어오는 것을 세세하게 묘사하기보다 홍이('나')의 내면을 따라가는 데 더 집중하는 서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읽는 내내 남일동의 풍경이 내 마음의 눈 앞으로 스쳐지나갔다. 남일동은 재개발 계획이 몇 차례나 무산되고, 산사태가 산 아래 집들을 덮치기도 하며, 바로 옆동네인 중앙동 사람들의 무시의 대상이 되는 허름한 동네다. 남일동의 주민들은 서로에게 정을 기대하고 실제로 어느 정도는 온기가 있는 공동체 생활을 영위하지만, 다른 주민을 대함에 있어 세간의 편견이나 억측을 넘어설 만큼의 사랑은 품고 있지 않다. 이 각박함의 이유 중 하나로 '여유 없음'이 내세워진다.

 이처럼 인간적이라고 감싸주기도, 마냥 비인간적이라고 깎아내리기도 어려운 남일동의 주민들 가운데 홍이의 부모가 있다. 홍이의 부모는 남일동에 살면서도 자신의 이웃들과 스스로를 차별화하고--이를 위해 때로는 모욕도 서슴지 않는다(22)--결국은 그곳을 빠져나오는 데 오랫동안 삶의 에너지를 소비한다. 그들에게 남일동에 산다는 것은 사회경제적 '하층민'임의 표지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홍이의 엄마가 노동조건이 열악한 조달청 하청 업체에서 일하는 남편을 공무원으로 소개하는 것 역시 그 표지를 떼기 위한 행위다. 그러나 작가의 비판의 화살은 두 사람, 계급적 상승이동만을 맹목적으로 쫓는 것처럼 보이는 홍이의 부모에게 직접 겨눠지지 않는다. 그보다는 이들을 남일동 바깥에 집을 구한다는 프로젝트에 이토록 집착하게 만든 시스템 자체--남일동과 중앙동 사이에 경계를 세우는, 그 시초를 파악할 수조차 없게 누구나 그 한가운데에 내던져지는 배제의 구조--를 향한다(고 읽혔다. 사태를 비판하면서도 그 속의 사람에게는 따뜻한, 그게 못 되면 적어도 미지근한 시선을 보내는 일이란 얼마나 어려운가. 그 온도가 독자에게까지 전해지기는 더더더 어렵다. 아마 남일동에 대해 중앙동 사람들이 보인 노골적인 혐오가 나로 하여금 홍이의 부모에게 자비로운 시선을 보내게 만들었는지도 모르겠다. 명백한 악인의 등장은 덜 명백한 악에 대한 자비로운 이해를 가능케 한다는, 작법 상의 교훈을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이런 두 사람 아래서 자란 홍이는 남일동에 대한 세간의/부모의 시선에 영향 받지 않으려고 하나 그럼에도 일대의 공기를 지배하는 혐오의 색채에 때로는 어쩔 수 없이, 때로는 제 의지에 따라 물든다(111 등지). 홍이는 직장 내 괴롭힘의 피해자가 되어 사직서를 낸 뒤 "아무 계획도 없이 하루하루를 소진하(30)"던 중, 스트레스가 원인일 것으로 추정되는 알레르기의 치료약을 구하기 위해 남일동의 제일약국에 드나든다. 그러다 최근 남일동에 이사 온 싱글맘인 주해와 그녀의 딸 수아를 만나게 된다. 작품의 중반부까지 주해는 거의 초인에 가까운 존재로 묘사된다. 그와 동시에 홍이는 주해의 행동력과 행동을 동경하는 관찰자처럼 그려진다(고 읽혔다. 홍이도 남일동 내에서만 여러 차례 이사를 다녔던 자신의 과거를 고백하며 주해와 독립된 서사의 발화 주체가 되지만, 주해라는 인물이 너무나 강력한 나머지 내내 주의가 덜 갔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작품이 후반부에 이르러 주해의 과거사가 밝혀지면서 그녀를 향한 홍이의 분열된 시선이 다시금 서사를 견인한다. 사실 관찰자로서 홍이의 처지는 조금 복잡하다. 주해의 유일한 친구이면서도 그녀에게서 베이비시팅의 대가로 최저임금을 받으며, 가장 중요하게는 남일동이 아닌 중앙동의 주민이기 때문이다. 이 점이 주해와 그녀 사이의 거리를 유지시키며, 타인을 이해하는 일이--설령 그 타인이 사랑의 상대라 할지라도--얼마나 어려운지를 상기시킨다. 관찰자는 단순히 관찰되는 인물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고유하디 고유한 개인사와 탄탄한 내적 논리를 지닌다. 당연한 얘기지만 관찰의 위치 역시 세심하게 계획되어야 한다).

 주해는 구청과 시청을 오가며 집 앞에 가로등을 설치하고, 남일동 내에 마을버스를 들여오며, 제일약국 앞에 마녀시장이란 이름의 벼룩시장을 열어 마을--이렇게 불러도 된다면--의 분위기를 쇄신한다. 이 모든 거사는 그녀가 레스토랑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로 일하고, 초등학교 입학을 앞둔 딸을 홀로 키우며, 이혼한 전 남편의 어머니에게 시달리는 와중에 틈틈이 이루어진다. 왜 이렇게까지 해서 "사람들 마음을 얻어야" 하냐는 홍이의 물음에 주해는 "내가 필요해서 하는 일(95)"이라고 답한다. 주해는 순수한 이타심만을 지닌 천사여서, 또는 모든 것을 구원한다는 소위 영원히 여성적인 존재여서 마을에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처한 사회경제적 맥락--집값이 비교적 저렴한 남일동을 벗어나서는 삶의 터전을 구하기 어려움--과 스스로의 역사--전에 살던 인일동에서 일어난 문제가 되풀이되지 않도록 마을 사람들에게 잘 보여야 할 유인이 있음--를 판단의 기준으로 삼아 이렇게, 저렇게 행위할 것을 의지하고 그대로 실천하는 주체적 인물이다. 그녀는 누구보다도 딸인 수아 앞에서 강인한 모습을 보이기 위해 분투한다(117). 이는 비단 자신의 딸뿐만 아니라 아래 세대 일반에 더 나은 세상을 물려주려는, 보다 보편적인 내리사랑의 모습으로 읽힐 수도 있다. 주해는 레스토랑의 주방일을 그만 둔 뒤엔 남일동의 재개발추진위원회에서 임시직으로 일하며 재개발 이후 들어설 아파트의 입주권을 가질 수 있기를 꿈꾼다. 이 꿈은 주해에게 소중함을 넘어 너무나 절실한 것이어서 나로서는 '꿈'이라는 아득한 이름으로 부르기도 미안한, 반드시 현실이 되었으면 하는 종류의 바람이다. 

 그러나 끝을 몇십 쪽 남기지 않은 상태에서 작품의 분위기는 돌변한다. 수아가 중앙동 주민들의 자녀만 다니는 학교에서 '남민(남일동 난민)'이란 혐오표현을 듣는 것이 그 전조다. 어느 날 재개발추진위원회의 사무실 앞에 날 선 태도의 사람들이 몰려들어 주해를 찾고 몰아붙인다. 그로써 주해가 남일동에 이사 오기 전, 간호조무사로 일하던 병원에서 윗선에서 "시키는 대로(150)" 아이들에게 수면제를 주사했던 과거가 밝혀진다. 작가는 주사를 제조하고 투약을 가장 먼저 결정했을 의사와 간호사가 아닌 간호조무사에게 사람들의 분노가 겨눠지는 이상스럽고 현실적인, 무엇보다 무참한 상황을 조성한다. 주해의 어둠--자기합리화, 마땅한 죄의식이 주는 피로를 견디지 않으려는/감당할 수 없어 하는 무력함--을 마주한 홍이는 다른 마을 사람들처럼 실망감을 품은 채 그녀를 멀리하기 시작한다. 그 즈음 홍이의 알레르기--세계의 추위와 무심함에 대한 그녀의 민감성과 연약함을 보여주는 장치--가 더욱더 심해진다. 주해는 끝내 자신의 과거를 추궁하는 사람들을 피해, 그리고 마을 사람들의 무자비한 비난을 피해 남일동에 살기를 포기하고 남일동보다도 더 외진 곳으로 이사한다.

 이후, 주해가 민원을 넣어 생긴 '도서관 겸 카페'에 드나드는 노인이 주해를 욕하며 그녀가 마을 공동체를 위해 이룬 일들을 깡그리 무시하는 장면은 이 소설에서 가장 슬프고 화가 나는 대목이다(2호선 지하철에 앉아 이 대목을 읽으며 느꼈던 분노의 여운은 꽤 오래 갈 것 같다).

 "누가 그래? 그 새댁이 그래요? 도서관이고 버스고 다 시에서 결정하고 시행하는 일이지. 어디 한 사람 힘으로 되는 것인가. 별소리를 다 듣네. 어디 가서 괜히 그런 말 꺼내지 말아요(162)."

 

 그러나 주해에 대한 노인의 애정 없는 가십에 홍이는 마치 동문서답을 읊듯 주해가 마을에서 바꿔놓은 것들을 나열한다("엉뚱한 이야기(162)"). 다른 마을 사람들의 무심함과 홍이의 태도가 서로 확연히 대비되는 지점이다. 그녀는 주해가 있었을 당시엔 깨끗했던, 그녀의 집 앞 골목이 다시 더러워진 것을 보고 "실망감과 배신감(165)"을 느낀다. 그리고는 버스 종점에 가서 근처에 나뒹구는 무단쓰레기를 불태우기 시작한다. 작품의 절정부에서 홍이는 그 불이 "저 남일동을 모두 집어삼켰으면 좋겠다고 생각(167)"한다. 그녀가 무너뜨리고자 하는 남일동은 주민들에게마저 체화된 차별의식과 각박함, 중앙동의 타지로서의 정체성, 나아가 "한 사람 안에 한번 똬리를 틀면 이쪽과 저쪽, 안과 밖의 경계를 세우고, 악착같이 그 경계를 넘어서게 만들던 불안"의 육화다.

 재개발 계획은 무산되었지만 남일동의 건물들은 하나하나 철거되어간다. 주해와의 첫만남이 이루어졌던 제일약국이 철거되는 모습을 "두 눈을 크게 부릅" 뜨고 바라보는 홍이의 모습이 소설의 마지막 문장 속에 담긴다. 본다는 것은 기억한다는 것이고, 기억하는 일은 기록하는 일로 이어진다. 이런 기록이 바로 문학의 사명 중 하나가 아닐까. 그 아무도 자비로운 해석을 베풀지 않은, 심지어는 명백한 공에 대해서도 인정받지 못한 주해의 삶을 문학이 아니면 그 무엇이 기록해줄는지 당장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렵다. 


 사족 1) 남일동은 허름하고 멸시받는 장소임에도 왜 하고 많은 감정 중에 '두려움'의 대상인 걸까(24, 122, 125 등지)? 죽을 때까지 그곳을 빠져나오지 못할 수도 있으리라는 데 대한 두려움일까? 그렇다면 주민들의 눈에 남일동은 경멸적일 정도로 왜소한 동시에 공포를 유발할 만큼 거대한 대상이다. 이 두려움이 개인 안에서 유지되거나 해소되는 것이 아니라 "끝없이 누군가에게 옮아가고 번지며, 마침내 세대를 건너 대물림되고 또 대물림(126)"된다는 작가의 통찰이 슬프게 빛났다.

 사족 2) 몇 달 전에 읽었던 박민정 작가의 단편 <신세이다이 가옥>에서도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집' 또는 '내 집'이 가지는 의미에 대한 성찰을 엿보았던 것 같은데 시간 될 때 한 번 비교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