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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ise

Antwerp


 루프트 교수님과의 면담, 그로만 교수님 수업에서의 발표를 모두 마치고 가뿐해진 마음으로 떠났다. 스스로에게 보상을 준다는 생각을 정말 오랜만에 했는데, 자기연민처럼 보일지는 모르겠지만, 덕분에 무척 즐거운 1박 2일이었다. 혼자였지만 많이 웃었고, 어쩌면 혼자였기 때문에 많이 웃을 수 있었다. 타지살이를 하면서 놀라운 점은 내가 외로움을 많이 타는 편이고, 지금도 조금은 쓸쓸하게 느끼지만 그런 것치고는 혼자서 상당히 잘 논다는 사실이다. 누구와도 대화하지 않고 며칠을 보낸 뒤, 새삼스럽게 오, 며칠동안 입을 안 열고도 그냥저냥 지냈네, 레벨업, 같은 소리를 중얼거리게 된다.

 기차를 타고 산 하나 없는 플랑드르의 평원을 지나는 중, 바로 앞에 앉은 장발의 남자가 너무 험악하게 생겨서 쫄았다. 그렇게 움츠린 채로 가만히 있었는데 갑자기 띵똥, 하고 낯익은 소리가 들려왔다. 그 험악한 남자가 듀오링고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갑자기 긴장이 풀리면서 남자에게 미안해졌다. 외국어를 공부하는 사람은 웬만하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개인사에 크고 작은 실수나 잘못은 있겠지만 그것은 내가 심판할 몫이 아니고, 다만 자신에게 외재적인 어떤 질서를 배우고 싶어하는 그 겸허한 마음이 선해 보인다.

 시내에서 조금 떨어진 안트베르펜-베르헴 역에서 리디아를 만나 모로코 식 아침식사를 했다. 너무 맛있었다. 허영심이 섞여있을지 모르는 나의 묘사 실력으로 망치고 싶지 않을 정도로. 그러고 나서는 PAKT라는 이름의, 과거에는 공장지대였던 컴플렉스에 가서 커피를 마셨다. 잔뜩 수다를 떤 다음 포옹으로 이별한 후, 싸게 예약한 호텔에서 '백 투더 퓨처'를 보며 저녁 시간을 보냈다. 창피하게 맥주 한 캔으로 취해버렸다. 정신의 날이 무뎌지고, 볼은 달아오르다 못해 얼굴의 존재감 전부가 희미해진 채로 욕조에 누웠다.

 욕조에 누워 쓴 메모들: '사랑이랄지 삶에 대한 애착이 정상적인 한도치를 초과해 누구라도 안아주고 싶다', '최소한의 자비와도 양립하지 못하는 정의를 나는 믿지 않는다', '젊은 배우의 죽음에 며칠째 서글프다. 사람들은 이해와 정당화를 구분하지 못할 뿐더러, 각각에 대해서도 상당히 얕은 생각만을 하는 것 같다. 스스로의 허물로 인해 괴로워하는 이를 보면 우리는 그를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허물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정의의 이름으로 심판하면서도, 충분히 자비로울 수 있다. 성찰을 심화한다면 자비로울 때만이 진정한 의미에서 정의로움을 알 수 있다. 자제력 없고, 욕망과 충동 앞에서 패배하며,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조용히 사랑하는 사람, 상대조차 망각한 죄로 괴로워하는 사람, 지나간 과오를 착실한 미래로 보상할 수 있다고 헛되지만 감사한 마음으로 믿는 사람, 당신은 나의 벗이다. 나도 그만큼 무모하기 때문이다', '음악은 너무 아름답고 쓸모 없다. 현실의 그 어떤 디테일도 바꾸지 못한다. 하지만 현실 자체를 지탱한다. 그래서 쓸모의 유무라는 범주를 음악에 적용해 평가하는 것 자체가 아마 오류일 것이다'

 미래에 대해서도 조금 생각했다. 학자로서의 길은 험난하다. 나는 과연 실적이란 것을 많이 쌓을 수 있을까? 강의하고 싶은 주제들은 정말이지 넘쳐나고, 잘할 자신도 있다. 남들 앞에 나서서 나의 성찰들을 공유하는 일을 무척 무척 좋아한다. 하지만 강의할 자격을 얻으려면 실적이 필요하다. 얼마 전 제출한 논문은 한 달째 'under review'라는 팻말을 달고 0과 1만으로 이루어진 디지털 세계 어딘가를 떠돌고 있다. 해낼 수 있을까? 새 컨퍼런스에 내놓았던 초록이 최근에 받아들여져서 무척 기뻤지만, 그것만으로 자존감을(또는 자존심을) 채우기에는 발표와 퍼블리슁 사이의 난이도란 천지차이이며, 후자가 훨씬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동시에 아무도 날 원하지 않고 적도 없어 암울할 수 있는 와중에 계속해서 공부를 이어나가고, 기회를 쫓고,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스스로가 자랑스럽기도 하다. 역시나 자기연민 같지만, 자기연민 덕분에 버텨내는 때도 있게 마련이다. 덕스럽고 무기력하기보다, 자기연민에 겨워서라도 밥알을 씹고 산책을 나가는 게 나은 시간들이 있다. (그런 동시에, 스스로가 자랑스러워봤자, 또 리젝되면 헛수고라는 현실적인 생각에 괴롭다.)

 한숨 잔 다음날에는 관광을 했다. 관광과 진정한 여행을 구분하고 후자만을 진짜배기 경험으로 치는 관점이 있다는 것을 안다. 나는 그 관점에 동의하지 않는다. 관광객은 무척 유쾌하며, 마음 편안한 지위다. 삶 자체가 작업물이 되어야 하며, 여행도 삶의 일부라는 데 동의하지만, 매 순간 힘 팍 주고 살 수는 없다. 힘 팍 안 줘도 예술가처럼 멋지게 살 수 있다면 참 좋겠지만, 그럴 자신도 없거니와, 그게 별로 즐겁게 생각 되지도 않는다. 속물적으로 이곳저곳에서 자잘한 기념품을 사서 들뜬 채로 돌아다녔다. 리드 박물관이란 곳에 우연히 맞닥뜨려, 고야와 뭉크, 뒤러의 판화를 구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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