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당신 자신은 방해가 됩니다. 방해만 될 뿐입니다. 진실을 이룩하고 싶다면 스스로를 지우십시오. 자아가 삭제되었을 때 비로소 그 빈자리(la vide)에서 신과 실재가 만납니다. 자아가 살아있을 적에는 신이 실재를, 실재가 신을 만날 수 없습니다. 당신 자신은 모든 것을 파괴하고, 낮은 곳에로 끌어내리는 중력의 근원지에 불과하며, 그 힘의 발효가 정지되어야만 진실이 은총으로서 가능합니다. 그러니 방해하지 마세요. 더 이상 방해하지 마세요…… ⟪중력과 은총(La Pesanteur et la grâce)⟫에서 프랑스의 신비주의자 시몬 베유는 이렇게 속삭인다. 주장이 아니라 속삭임에 가깝다. 하지만 그 어떤 주장보다도 단정적이며 엄격하다. 단순히 학문적인 견해를 펼치는 것을 넘어, 윤리적 삶에 대한 계율이 되기를 희망하기 때문이다. 윤리적 삶을 도모하는 데 자아는 그 이기심으로 인해 방해가 된다는 베유의 입장은 영국의 철학자 아이리스 머독에게 전해진다. 그녀는 옥스포드에서 수학했으나, 니킬 크리슈난은 제노포빅하다고까지 평했던 당시 영국 철학계의 분위기에 예외적이게도 소위 대륙철학에 적대적이지 않았다.
베유와 마찬가지로 머독은 이기적인 자아가 탐욕으로 인해 실재를 제 멋대로 왜곡하는 일을 경계한다. 윤리를 위해 중요한 것은 자아를 ‘비자아화’함으로써(unselfing) 실재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이다. 시선이 윤리의 근원적 자리이며, 주의 깊은 시각(vision)에 비하면 자유로운 행위는 부차적이다. 봄이 아니라 함에 방점을 둔 기존의 옥스포드 윤리학은 윤리의 본질을 꿰뚫는 데 실패한다. 다만 머독의 문체는 베유의 것보다 훨씬 힘 있으며, 고통에 그저 처해버림으로써 그 순수한 당함의 사태로부터 윤리적 삶의 희망을 찾는 듯한 베유의 철학보다 훨씬 적극적인 자아관을 갖고 있다. 물론 본다는 것은 내 바깥에 있는 것의 이미지에 당해버리는 일이 맞지만 어디를 어떻게 볼 것이며, 그렇게 봄으로써 스스로 무엇이 될 것이고, 세계는 무엇이 되어나갈 것인지 규정하는 일은 내가 머독을 독해하기에 주관의 몫이다.
"많은 철학적 실수가 도덕성[이라는 특수한 윤리학적 체계]에 엮여 있다. 도덕성[의 체계]는 의무(obligations)[의 의미]를 오해한다. 의무가 [기껏해야] 윤리적 고려사항의 단지 한 가지 유형만을 이룬다는 것을 보지 못한다. 도덕성[의 체계]는 실천적 필연성(practical necessity)[의 의미]를 오해한다. 실천적 필연성이 의무에만 특유하게 [작동한다고] 생각한다. 이 모든 것을 떠나서 도덕성[의 체계]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 자신의 아주 특별한 의무 없이는 경향성뿐이라고, 그 자신의 순전한 자발성(voluntariness) 없이는 강제(force)뿐이라고, 그 자신의 궁극적으로 순수한 정의 없이는 아무 정의도 없으리라고 [잘못] 생각하게 만든다. 도덕성[의 체계]가 범하는 철학적 오류들은 [사실] 삶 [자체]에 대한 깊이 뿌리 내려져 있고 아직까지도 강력한 몰이해(misconception)의 가장 추상적인 표현에 불과하다." (Bernard Williams, Ethics and the Limits of Philosophy, Fontana Press, 1993 (originally 1985), p. 196, 강조는 나의 것)
삶에 실제로는 없는 데다, 있다고 해도 그게 왜 바람직할지 불분명한 도덕적 순수성을 부여하고자 하는 시도는 허황되었다. 윤리의 권역에서조차 우리는 행운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으며, 인격(성품, character)이란 (우리네 희망사항에 반해) 자발적 선택 바깥의 영역에 놓인다. 삶의 정체를 오해하지 않고도 윤리학을 수행할 수 있는 다른 반성(reflection)의 방식이 필요한데, 기존의 철학, 심지어는 철학 일반이 이를 충족시켜줄 수 있을지, 이에 윌리엄스는 회의적이다. 철학은 그 학문의 특성상 지나치게 일반적이고(general) 명제화의 가능성에 집착하기 때문이다(discursive).
윌리엄스의 견해는 철학만이, 정확히 말하면 현상학만이 윤리적 삶을 인도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에드문트 후설의 견해와 반대된다. 환상을 걷어내고 윤리적 경험에서 실제로 무엇이 드러나는가, '윤리적인 것'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사태는 정확히 어떤 모습의 현실인가를 직시해야 한다는 데서 두 사람은 동의한다. 하지만 과연 철학적인 종류의 반성이 이 과제를 수행하고 행위자를 좋은 삶에로 이끌 수 있느냐는 질문에는 다른 대답을 내놓는다. 윌리엄스는 철학적 반성이 윤리적 삶의 근본적인 1인칭적 성격(radically first-personal character)을 오해하며, 그 과정에서 이를테면 결코 필수불가결하지 않은 선택지인 규칙 세우기에 집착하거나(계약론적 전통) 행위자성을 더 이상은 납득하기 어려운 형이상학에 근거해 빈곤하게만 이해하고(칸트적 전통), 자아의 과도한 희생을 요구한다(공리주의적 전통). 반면 후설은 철학적 반성이야말로--오직 철학적 반성만이--각 행위자에게 무엇이 진실로(wahr) 윤리적인 삶인지를 그것도 1인칭적으로 계시해준다고 생각한다. 철학적 반성이 결여된 삶은 소박하고(naiv) 익명적인 삶으로서, 진정성(Eigentlichkeit)을 결여하고 있기에 엄밀한 의미에서는 개별화되어있지조차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