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에밀리 카스파, ⟪명령에 따랐을 뿐!?⟫, 동아시아, 2025.
카스파에 따르면 (전적으로 자발적으로 행위를 규정할 수 있는 경우에 비해) x 또는 y해야 하며,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명령이 내려질 경우 뇌의 특정 부분의 활동이 유의미한 수준으로 둔화돼 행위자성이 생물학적으로 약화된다. 대중서이지만 전문적인 지식을 깊이와 명료도 모두를 갖춰 담고 있다. 다만 제노사이드의 가해자 집단을 대상으로 한 인터뷰를 자료로 활용하고 있어 여러 가지 의미에서 읽기가 힘에 부친다. 그들을 이해하기만 하고 정당화는 결코 하지 않으려는 저자의 고군분투를 읽어낼 수 있는데, 아주 깨끗한 성공을 거두지는 못하는 것 같다. 죽이지 않으면 당신을 죽이겠다고 말하는 정권 하에서* 인간의 양심이 과연 어디까지 살아있기를 우리는 정당하게 기대해도 좋은가? 당연히 사람을 죽이느니 제가 죽겠습니다, 하고 말하는 양심이 사람을 죽이는 양심보다 의심의 여지없이 선하겠지만, 그렇게 말한 사람은 정말로 죽음을 맞아 이제는 우리 곁에 없다... 다른 한편, 죽이지 않으면 당신을 죽이겠다고 말하는 정권 하에서 양심 대신 자신의 목숨을 선택한 살인자에게 우리는 어떤 유형과 내용의 연민을 어느 정도까지 제공해도 좋은가? 쉽게 말해 연민은 어디까지 (a) 적절하며fitting 나아가 (b) 정당한가legitimate? 아니면 아무 단서조항이나 예외 없이 철저히 (a) 부적절하거나 (b) 부당한가? 그리고 그와 같은 연민이 함유하는 이해는 (저자를 포함한 우리 모두의 의사, 상식, 의지, 거부감, 불쾌, 불쾌 이상의 저항, 납득 불가능성, 이 모든 것으로부터 독립적으로) 연민의 대상이 되는 행위의 정당성에 그 어떤 종류의 영향도 미치지 않는 게 정말 사실인가? 그 영향이 체험에 입각해 심리적인 것이든, 개념의 관계망 속에서 논리적인 것이든 말이다. 이해와 정당화는 어떤 의미에서 어느 선까지 구분되며, 어떤 의미에서 어느 경우에는 중첩되는가? 하나 같이 불편하고, 불편함을 넘어 위험하기도 한 이 질문들로부터 카스파는 (상술한 고군분투에도 불구하고) 그저 도피한다. 적어도 내가 읽다가 힘에 부쳐서 그만 둔 그 지점까지는 그렇다. 남겨진 질문들의 무게는 오롯이 독자의 몫이며, 그런 이유로 독서는 더없이 고통스러워지기 때문에, 솔직히 말해서 그 누구에게도 이 책을 추천하고 싶지 않다. 딱히 카스파의 잘못은 아니고, 안셀무스가 ⟪프로슬로기온⟫에서 한탄했듯 유한자인 인간의 눈에는 정의와 자비가 충돌하는 것처럼 보일 수밖에 없는 탓이다.
*단, 행위자성의 생물학적 약화는 이와 같이 고도로 위협적인 협박성의 명령뿐만 아니라 그저, 말하자면 명령의 형식만 발동돼도 다른 강도로지만 확실히 일어난다고 한다.
2. Iris Murdoch, Existentialists and Mystics: Writings on Philosophy and Literature, London: Chatto & Windus, 1997.
이를테면 레지스탕스에 가담할 것인가, 그러지 않을 것인가와 같은 드라마틱한 선택의 상황을 도덕적 행위자성이 발휘되는 가장 패러다임 격의 맥락으로 설정하는 실존주의에 대한 비판이 통찰력 있다. 도덕은 그와 같은 극적 고뇌의 순간에 잠깐 고개를 들었다가 평소에는 존재감이 흐린 두더지 같은 무엇이 아니다. 도덕은 오히려, 이를테면 욕심을 채우려다가도 불현듯 창밖의 풍경에 눈길을 던지게 되었는데, 그대로 북양가마우지새를 가만히 바라보게 되는 일상적인 순간에조차, 아니 그런 순간에야말로 비로소 성립하는 것이다.
3. Edmund Husserl, Trans. Richard Rojcewicz, André Schuwer, Ideas Pertaining to a Pure Phenomenology and to a Phenomenological Philosophy: Second Book Studies in the Phenomenology of Constitution, Dordrecht: Kluwer, 1989 (translation of Hua IV).
후설이 개별-인격됨(Persönlichkeit)의 본질에 대해 설명하는 부분들을 골라 읽었다. 오랜 시간동안 한풀 꺾여있던 후설에 대한 애정을 결정적으로 회복시켜준 독서였다. 자아와 비자아 사이 최초의 접촉에서 출발해, 후자의 말하자면 감탄스러울 정도로 낯선 순수에 기어이 익숙한 질서를 부여하고 말겠다는 전자의 노력으로부터 우리네 실존의 게네시스가 설명될 수 있다. 저 노력이 수동적이지만 자유롭다는 역설과, 그 역설에 대한 후설의 지지부진한 해명 가운데서 형이상학 일반의 거의 모든 문제들이 건드려진다. 읽다 보면 후설의 장황함, 갈팡질팡함이 오히려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현명함의 증거임이 드러난다. 마치 질료와 질료에 형상을 부여하는 이성 사이 관계를 전부, 투명하게 통찰해낸 양 1도 안 장황한 철학이야말로 그 자신감 이면에서 (편견 없는 체험 속에는 오직 불투명하게만 주어지는) 사태 자체를 왜곡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막힘없이 문제들 사이를 돌파하는 형이상학은 바로 그 막힘없음을 이유로 비판 받을 만하다. 애초에 자아와 비자아가 그 본질상, 개념상, 실재상 근본적으로 상이한데 접촉할 수 있다는 것, 그 접촉의 결과로 (순전히 자아의 것이기만 하지도, 순전히 비자아의 것이기만 하지도 않은) 의미가 창출된다는 것 자체가 사유에게는 신비이다. 그리고 대개 오만하지 않은 철학은 신비를 만나면 말을 더듬는다.
4. Edmund Husserl, Hrsg. von Ulrich Melle, Vorlesungen über Ethik und Wertlehre 1908-1914, Dordrecht: Kluwer, 1988 (Hua XXVIII).
후설의 초중기 윤리학이 집대성된 책이다. (이런저런 이유로) 제한된 시간 내에 포괄적이되 세심하게 이해해야 한다는 압박감 때문에 문자 그대로 토할 것 같은 마음이 계속 들었다. 꾸역꾸역 읽었으면서도 독서를 그다지 즐기지는 못했다. 설령 시간이 충분했더라도 아주 즐거운 독서는 아니었을 것 같다. 윤리학은 분명 수학이 아닌데, 정확히 말하면 수학과 가장 먼 학문인데, 괴팅엔 시기의 후설은 윤리적 숙고와 숙고를 돕거나 방해하는 심정 및 성정의 역학을 마치 수학적 변수들인 양, 방정식 풀 듯이 취급한다. 이 책 속의 내용은 대부분 틀렸다기보다는 안일하게 쓰였다. 적어도 지금의 내 평가는 그렇다.
5. Sophie Loidolt, Anspruch und Rechtfertigung: Eine Theorie des rechtlichen Denkens im Anschluss an die Phänomenologie Edmund Husserls, Springer, 2009.
사태 자체는 인식의 주체에게 (특정한 요구Anspruch가 담긴) 말을 걸어오는ansprechen 방식으로 주어진다. 이에 따라 인식의 주체는 [반드시?] 정당성(Recht, Richtigkeit, Wahrheit usw.)의 관념을 매개로—그러니까 정당성의 범주 Legitimationskategorie를 거쳐[서만?]—그에 응답하게 된다. 이 관념 및 범주가 인간 주체에게 기대하는 바에 그 인간이 미치는가, 미치지 않는가가 이성의 핵심적인 관심사이다. 그러나 과연 지적인 인식이 아니라 윤리적 판단의 권역에서도 이성이 과연 동일한 정당성의 기준을 동일한 방식으로 만족시키기를 추구할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해 로이돌트는 매우 단호하게 아니라고 말한다. 그 단호함 때문으로 매력적이지만 조용한 이의를 품게 되는 책이다.
6. Hubertus Tellenbach, Melancholie: Problemsgeschichte, Endogenität, Typologie, Pathogene, Klinik (Vierte, erweiterte Auflage), Berlin [&] Heidelberg: Springer, 1983.
병적인 우울만을 조명하기보다 그런 삽화 (또는 삽화의 연속체)에로 이르는 전질병적prämorbid 성격의 특질이 과연 무엇인가, 곧 우울장애에 특별히 취약한 이들은 어떤 사람들이며, 어떤 전우울적prä-melancholisch 상황을 통과해 우울 삽화에 이르는가를 묻는 책이다. ‘멜랑콜리아’를 넘어 ‘튀푸스 멜랑콜리쿠스’에 주목하는 것이다.
우울하기 쉬운 인간의 유형[이 공통적으로 누리는 존재의 질감]에 주목하는 텔렌바흐의 문제의식은, 적어도 내가 읽기에, 다음의 두 가지 의의를 지닌다. 첫째, 진단의 상황에서는 인위적으로 구분될, 그러나 실제로 주체에 의해 체험될 적에는 상당한 친화력을 가지고 있는 현상들이 함께, 총체적 고통을 함께 구성하는 요소들로서 자연스럽고 그리하여 정당하게 다뤄질 수 있다. 이를테면 DSM-V는 우울장애와 강박장애를 구분하지만, 불확실성을 견디지 못하는 특질은 사실 둘 모두에 유의미한 방식으로 공유되는 무엇이다. 둘째, 원래는 뿌리부터 이파리까지 건강하기만 한, 또는 적어도 병은 없는 백지 상태인 내면에 철저히 외부적인 것인 충격(e.g. 해고, 사별, …)이 가해져서 비로소 질병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입증된다. 튀푸스 멜랑콜리쿠스의 멜랑콜리아는, 즉 우울하기 쉬운 인간의 우울은 (내 독해가 맞다면) 그 사람의 그-사람됨Persönlichkeit 자체를 본질적으로 구성하는 것이지, 그 그-사람됨에 (일어나긴 했지만 실은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는 외부의 충격으로 인해) 단지 우연하게만 부착된 무엇이 아니다. 이 통찰은 절망적이기는커녕, 오히려 (생물학적인 (무)질서에만 집착하고 환자의 1인칭적 체험을 도외시한다면 암시되지 못했을) 치료의 새로운 전개 방식을 상상할 수 있게 해준다고 생각한다not so much depressing as liberating. 현상학적 정신병리학의 의의를 압도적인 설득력으로 입증해내는 책이다.
7. 그외 틈틈이 하지만 다소 게으르게 베유와 울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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