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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아이리스 머독, <도덕 속 시선과 선택> 요약

Iris Murdoch, 'Vision and Choice in Morality' in Existentialists and Mystics: Writings on Philosophy and Literature (ed. by Peter Conradi), London: Chatto & Windus, 1997, pp. 76-98.

오래 전 자목련이 피었을 무렵 빌렸던 책을 이제야

"대강 무어(G. E. Moore) 이후로, 우리가 [다음의] 두 가지 질문을 서로 구별할 수 있다고 가정되어왔다. [바로] '내가 따를 도덕(my morality)은 무엇인가?'와 '도덕 그 자체(morality as such)란 무엇인가?' [사이의 구별이다. 윤리학과 메타윤리학 사이] 이 구별에 대한 최초의 열광의 시기가 지난 후, 윤리학은 서서히 그것을 덜 자명한(simple) 것으로 생각하는 방향에로 움직이고 있다."(Murdoch 1997, 76)


 머독에 따르면 윤리학에 대한 '현재의 관점'은 다음의 특징들을 지닌다. 첫째, 한 사람을 도덕의 관점에서 규정하는 일은 외부에서 관찰 가능한 그의 행동에 의거해서만 가능하다. 도덕적 삶 자체가 바깥으로 드러난(overt) 선택들의 연속일 뿐이다. 그래서 이를테면 '내면의 삶(inner life)'은 행동주의적 사유라는 [여과기를] 거쳐서만 [도덕적으로 유의미하게] 취급된다. 둘째, "도덕적 판단은 변덕 또는 취향의 선호와는 달리 행위자가 생각하기를 그와 동일한 처지에 놓인 다른 모두를 위해[서도] 타당할 이유들에 의해 지지된다"(77). 이 같은 보편주의는 한 상황에서 [무엇이 도덕적으로 현저한지what is ethically salient]가 [심지어는 사실의 옷을 입고] 객관적으로 명시될(specify) 수 있음을 전제한다. "도덕적 개념이란 그렇다면 거칠게 보아 활동의 특정한 권역에 대한 객관적인 규정(definition)에 권유 또는 금지가 더해진 것이 된다."(77) 도덕적 개념에 대한 이 같은 이해는 고유한 자유의 관념을 동반한다. [바로 상황에 대한 그러그러한 객관적 규정에 대해 (특정한 방식으로?) 권유하거나 금지할 자유 말이다.]

 머독이 현재의 관점에 대해 가장 먼저 지적하는 것은 해당 관점이 애초에 무엇을 윤리학의 자료로 삼는지와 관련된다(the initial assembly of data). 만일 현재의 관점에서처럼 행동과 선택, 그것을 (이유들reasons에 입각해) 추동하는 논증(argument)만을 윤리학의 자료로 삼는다면 "도덕에서 특정한 중요한 면모들을 놓칠" 것이다(80). 구체적으로 말해 현재의 관점은 [윤리의 실재로부터 유리되는데,] 우리가 한 사람을 도덕적으로 판단할 때 실제로 고려하는 것인 "삶에 대한 [그의] 총체적 비전(total vision of life*)"의 윤리학적 중요성을 간과하기 때문이다(80). 이 비전은 예를 들어 한 사람이 어떻게 침묵하는지, 무엇을 웃기다고, 또는 매력적이라고 여기는지 등 보다 규정하기 어려운(elusive) 요소들로 이루어져있다.

 머독은 한 사람의 도덕성이 표현되는 중심적인 [계기를paradigmatic occasion] (사르트르나 보부아르처럼) 확정적인 선택(definite choice)의 상황(e.g. 전쟁에 참여할 것인가, 어머니를 지킬 것인가? 공산당에 가입할 것인가, 말 것인가?)으로 생각하지 않고, [특정한 상황 하에 이루어지는 사건들로 환원되지 않는] 개별적인 태도나 자기반성, 삶에 대한 비전의 문제로 사유해볼 것을 [권유한다.] 도덕에 대한 이와 같이 새로운 관점 하에서는 도덕적 어휘가 '좋다/선하다(good)', '옳다(right)' 이상으로 풍부해진다. 나아가 도덕성의 차이란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상의 차이가 아니라 저마다 사용하는 개념의 차이**, 개념의 사용이 함의하는 삶에 대한 비전상의 차이가 된다. 삶의 비전은 물론 외부에서 관찰 가능한 퍼포먼스로 표현되곤 하지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며--그리고 오직 그 경우에만 윤리적으로 유의미한 것이 아니며--근본적으로 "확정적인 퍼포먼스로부터 분리 가능한 무엇인 게 맞다(is)."(83, 강조는 원저자)

*e.g. 개별적인 인격의 (행동이 아닌) 존재의 질감(81); "한 사람의 일반적인 개념적 태도와 매일매일의 '존재'"(85); ...

**도덕성은 "개념의 파생물(ramification of concepts)"이다(89). 그리고 비전 자체가 "개념들의 집합"이다(92).

 그러나 머독이 주장하는 바대로 도덕 및 윤리학의 중심을 행동이 아닌 비전으로 옮길 경우, 한 사람의 도덕적 [신념]은 논증의 형태로 확정시키기 어려운 것이 되며, 완벽한 소통을 [한갓된 꿈으로 전락시키는 데다, 한 행위자가 자신의 삶, 자신이 특정한 비전에 입각해 해석해온 그 삶으로부터] 완전히 물러나(withdraw) 반성할 수 있다는 식의 자유의 관념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그러나 어쩌면 이 자유의 관념은 희망사항에 불과하며*, 그러한 자유를 믿는 것이 의무라고 생각하는 것조차 자유주의적인 이상의 산물이지 [두루 타당한 요구인 것은 아니다.]

*애초에 정말 그런 실존주의적 자유가** 희망함직한 무엇인지도 의심해볼 수 있겠다. 당신은 정말로, 설령 당장 스스로가 제 아무리 가증스러울지라도, 기존의 삶의 모든 맥락으로부터 탈각된 채, 그로부터 말하자면 기형적으로 돌출된 채, 백지와 같이 깨끗하되 아무 이름도 지니지 않는 한 명의 점적인 존재로서 윤리적 판단에 임하고 싶은가?

**머독에게 실존주의란 세계의 의미와 가치를 인간적 의식의 함수로 만드는 사상이다. 실존주의의 반대편에 마르크스주의가 있는데, 마르크스주의는 세계의 특정한 의미와 가치를 의식에 의해 영향 받지 않는 객관적 사실로 만든다('실존주의 영웅' 중, 110f.). 실존주의는 마르크스주의가 인간에게서 의심의 능력을 박탈한다고 비판하고, 마르크스주의는 실존주의가 (지나친 반성으로 인해) 행동력을 마비시키며 사회개혁을 향한 진실한 열망을 결여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카뮈의 리외는 실존주의적 영웅의 대표주자로서, 아무 확신도 못 가지는 채로도 선을 행한다. 

 보편적인 호소력을 지니는 논증이 아닌 (개별적으로 중요한) 우화(personal fable)*나 비유(metaphor)의 윤리학적 무게를 머독이 강조하는 것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이다. 어떤 도덕적 전망은 그것이 보편적인 호소력을 지니는 보편적 법칙의 예시냐, 아니냐의 질문을 제기하는 것 자체를 부적절하게 만든다. "혹자가 나폴레옹이라면 그는 모두가 자기 자신처럼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86)

*머독의 주장은 겉으로는 지나치게 독창적이어 보이지만 '내가 ~였다면 어떻게 행동하거나 사유했을까?'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본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공명할 주장이다(예수, 조르바, 차라투스트라, ...).

 [대개] 도덕은 미술과 대조되는 것으로 이해되어왔으나, 도덕이 보편적 법칙이어야만 한다는 사고로부터 위와 같이 탈피할 경우, 그리하여 "세계의 고갈될 수 없는 디테일을 강조하는 도덕적 태도들, 이해라는 과제의 끝없음, 자신이 개인들과 상황들을 [곧 그 의미를] '테이프로 붙여 고정시켰다(tape)'는 가정을 하지 않는 일의 중요성, 지식을 사랑과 연결시키는 일 그리고 고유한(unique) 것에 대한 통각을 통한 정신적 통찰의 중요성"을 도덕에 대한 우리네 개념적 이해(conception)에 포섭시킬 경우, 도덕과 미술 사이의 거리는 상당히 좁혀진다(87). 그리고 이를테면 세계의 세부 그리고 이해라는 과제의 무한성 등에 대한 인지는 반드시 행위를 마비시키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겸허를 불러일으키고, [순진한] 사랑의 표현으로 자리매김할 수도 있다. 

 [도덕이 상황에 대한 객관적 판단과 그에 대한 보편적 법칙의 적용 여부를 선택하는 문제 이상이 되는 일,] 즉 현재의 관점이 영위하는 윤리학적 시야가 지나치게 좁다는 점을 [상술한 방식으로 부각시키는 일]을 혹자는 위험하다고 평가할 수 있다. 도덕성과 관련해 투명한 소통이 불가능해질 것이고, 자의가 산출될 것이며, 급기야 [설득되기를 포기하는] 폭력으로 번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같은 R. M. Hare 식의 걱정에--그리고 이 걱정을 언어에 대한 집착으로 해소하고자 하는 진영 일반을 향해--머독은 (기술과 처방을 담당하고 둘을 결합시킬 줄 아는) 언어란 본래 내재적인 한계를 안는다고 대응한다. "심지어는 이해가 철회되어야(withheld, 삼가져야) 하는 순간들조차 존재한다."(90, 강조는 원저자) 그리하여 [윤리적 '정답'이 불명확한 상황에서 요구되는 것은] 상황에 관여된 사실들의 보다 명확한 기술이 아닐 수 있다. 오히려 (도덕적인 함의를 지니는) 특정한 이야기나 개념에 대한 내면의 성찰을 통해 행위자가 스스로의 비전을 변경시킴으로써 상황을 새롭게 바라보는 일이 선을 고무한다. 머독은 그러한 개념의 예로 희망사랑을 든다(91).

 현재의 관점은 (어떤 동기에 의한 것이든) 자연주의의 오류에 대한 반감을 기반으로 삼고 있다. 설령 자연주의의 오류를 완벽하게 타파하는 논증이 없을지라도 현재의 관점 역시 제각각 특정한 개념(e.g. 공리, 의무, ...)에 입각해 사실들의 중요성을 저울질하고 세계의 기술 방식을 선택한 산물이며, 무엇보다도 초월적인 것(the transcendent)이 도덕성에서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는 일을 막지 못한다. 이제 자유란 같은 상황에서 다른 선택을 내리는 능력이 아니라, [삶에서] 사용할 개념을 변경하거나 한 개념을 더 깊이 이해하는 "성찰의 양상"에 가까워지며, 나아가 [자동적으로 갖추게 되는 것이 아닌 노력해서] 갖춰야 할 무엇이 된다(95). "진정한 자연주의자는 도덕적 존재로서 우리가 우리를 초월하는 현실에 몸담고(be immersed) 있으며 도덕적 성장은 이 현실에 대해 알게 되는 일(awareness) 그리고 그 목적에 대한 순종(submission)에 있다고 믿는다."(96, 강조는 원저자)*

*1950년대 머독의 사유에서도 이미 자아의 윤리적 지위와 관련해 윤리학적 긴장이 엿보인다. 한편으로 개별적인 내면의 삶이 중요하고, 그리고 저마다의 우화 또는 서사가 그 삶을 가꾸기 위해 필요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초월적 현실에 대한 순종이 요구되고 있다. 이 현실의 인지를 위해 개별적(personal) 상상이 반드시 필요한가, 아니면 오히려 자아는 삭제되어야 마땅한가?

 [동시에 자연에 대한 이와 같은 순종에는 다양한 개념과 비전을 이유로 다양한 모양새가 있다.] 그 차이들은 철학적으로 중요하며, 도덕성에 대한 규정 혹은 정의를 수적으로 축소시키거나 단순화하는 일은 따라서 [그 자체로 비철학적이다](cf. Williams 1985). "윤리학은 차이들의 수준에[그 다양성에] 머물러야 하며, 삶의 도덕적 형식들을 [그저] 소여로 취해야지, 그것들의 배후로 가서 한 개의 형식을 [찾고자] 해서는 안 된다."(97, 강조는 원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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