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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의 각주들

10: 손 나름의 의지

 어렸을 때 하농이 너무 싫어서 한 번만 치고도 포도송이 세 알 채우고 그랬는데 뒤늦게 후회가 된다. 후설이 피아노를 쳤더라면 절대 스스로 의지하는 대로 몸을 움직일 수 있다는 자신감을 운동감각의 모토로 잡지는 않았을 것이다. 머리로 알고 바라는 것을 건반 위에서만큼은 도저히 손이 못 따라간다.

 손으로 이미 건반을 치고 있는 와중 ‘곧 새끼 손가락으로 다음 음을 쳐야지’ 따위의 생각을 삽입할 수는 없다. 그런 생각에 의식을 할당했다가는 박자를 놓치기 때문에 정신이 아니라 무조건 손만으로 익혀서 넘겨야 하는 구간들이 있다. 그렇다면 중간에 말고 사전에라도 음을 숙지하면 되겠지? 같은 생각도 안 통한다. 아무리 사전에 머릿속으로 되뇌고, 원하고, 의지하고 무슨 거창한 마음을 먹든 내게 어려움을 안겨주는 음을 쳐야 하는 바로 그 순간만 되면 기억력과 새끼손가락 사이 연결이 끊긴다. 이 음은 내 손의 크기나, 다음 음으로 넘어가는 데 대한 용이성 등등을 이유로 반드시 새끼손가락을 쓰는 게 맞는데, 그러니까 기억된 논증은 완벽한데 새끼손가락이 기억의 말을 안 듣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새끼손가락이 소위 무지성의 살덩어리에 불과한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새끼손가락이 의지를 거부하는 이유는 본인에게 주어진 음에 악센트가 달려있으니 힘을 실어야 할 텐데, 자신에게는 그런 힘이 익숙하지 않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다. 나름의 논증을, ‘정신’을 가지고 기억을 거부하는 것이다. ‘이런 일은 힘 좋은 중지한테 시키라고욧’ 같은 반항을 따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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