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352) 썸네일형 리스트형 2025년 4-5월의 독서 1. 에밀리 카스파, ⟪명령에 따랐을 뿐!?⟫, 동아시아, 2025. 카스파에 따르면 (전적으로 자발적으로 행위를 규정할 수 있는 경우에 비해) x 또는 y해야 하며,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명령이 내려질 경우 뇌의 특정 부분의 활동이 유의미한 수준으로 둔화돼 행위자성이 생물학적으로 약화된다. 대중서이지만 전문적인 지식을 깊이와 명료도 모두를 갖춰 담고 있다. 다만 제노사이드의 가해자 집단을 대상으로 한 인터뷰를 자료로 활용하고 있어 여러 가지 의미에서 읽기가 힘에 부친다. 그들을 이해하기만 하고 정당화는 결코 하지 않으려는 저자의 고군분투를 읽어낼 수 있는데, 아주 깨끗한 성공을 거두지는 못하는 것 같다. 죽이지 않으면 당신을 죽이겠다고 말하는 정권 하에서* 인간의 양심이 과연 어디까지 살아있기.. 20250429 바질 먹을 자격 쉽게 잠 들고 한 번 잠에 들면 꿈도 없이, 마치 새벽이 존재하지 않는 양 잠에 빠져드는 나날들. 전반적으로 기쁘고, 때로는 (이를테면 햇볕을 맞을 때, 브로콜리 따위를 데쳐 먹을 때) 황홀해진다. 그리고 고통스럽지 않은 방식으로 외롭다. 부스스한 머리칼로 아홉 시쯤 일어나, 아침을 먹는 동시에 정신없이 점심 도시락을 싸는 내 오전을 이루는 모든 몸짓과, 몸짓이 표현하는 행위, 행위가 표현하는 기획, 기획이 표현하는 가치관 모두에 대해 몇 자씩 적고 싶지만, 나의 모든 것을 적어내야 한다는 생각조차 저 외로움의 발로이며, 무엇보다도 은밀한 나르시시즘이라는 생각이 나를 막아선다. 나르시시즘: 자주 자기지시의 충동—‘내가’ 무엇을 하고 있다, ‘내’ 의견이 어떠어떠하다, 라고 생각하고 싶은 마음—이 인다는.. 20250406 시간이 마치 별빛 흐르듯 봄날의 햇살, 꽃, 식사. 자목련과 아네모네, 데이지, 벚꽃은 벌써 져버렸다. 동명이인인 언니들을 초대해 오픈 샌드위치를 대접했다. 과카몰레에 석류알, 구다 치즈에 연어, 고르곤졸라 치즈에 구운 바나나, 마지막으로 비트 훔무스에 소고기 안심을 올렸다. 의외로 손이 많이 갔고 장도 왕창 봐야 했지만 내가 그동안 받아온 정신적인 지지에 비하면 작기만 한 보답이었다. 그리고 더 많은 식사들. 필리핀 음식이라는 코코넛 우유 아도보, 닭갈비, 콩나물 해장국 등. 요리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었고 미각도 그다지 세련되지 않다 보니 그냥 혼자서 빠르게 먹을 수 있는 일품 요리가 대부분이지만, 레퍼토리를 늘려가는 재미가 있다. 다음 장 보는 사이클에서는 각 언니가 추천해준 연어 오챠즈케와 셀러리볶음에 도전할 것이다. .. 버나드 윌리엄스, <윤리학과 철학의 한계> 요약 Bernard Williams, Ethics and the Limits of Philosophy (3rd impression with amendments), London: Fontana, 1993 (originally published in 1985). 모든 '[]'는 나의 해석.1장: 소크라테스의 질문 철학은 “일반적(general)이고 추상적이며, 합리적으로 반성적인” 탐구의 형태를 취한다(1). 구체적으로 말해 “반성적 일반성과 합리적으로 설득력 있다고 자청하는(claim) 논증의 양식”을 특징으로 가지는 학문이다(2). 그런 철학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how one should live)’라는 소크라테스의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가? 한편으로 철학자의 입장에서는 이에 긍정적으로 대답한다는 것이 .. 2025년 2-3월의 독서 1. Henning Tegtmeyer, 'Schuld und Sünde'. In: Handbuch Religionsphilosophie (Hrsg. von H. Schulz et al.), Springer 2025, 413-424. 오랜만에 대도서관에 가서 읽었는데, 집중력이 흐려질 때마다 체스보드 무늬 스테인드글라스를 쳐다보면서 마음을 다시 다졌다. 생각했던 것보다 술술 읽힌다는 인상 반, 그래도 독일어 독해인지라 시간이 오래 걸려 난처하다는 인상 반. 보통은 세속적인 맥락에서 제3자의 이익을 침해하는 데서 따르는 잘못(Schuld, 책임)과 명백하게 종교적인 맥락에서 성립하는* 죄(Sünde) 개념을 각각 정의하고 (무엇보다도) 둘 사이의 개념적인 중첩을 드러내고자 시도하는 글이었다. *= (인격을 .. 아이리스 머독, <바다여, 바다여> "세월이란 사람들의 현실로부터 우리를 갈라놓고, 사람들을 떼어놓아 유령으로 바꿔놓[는다고들 하]지. 그게 아니라, 그들을 유령이나 악마로 변형시키는 건 오히려 우리야. 과거에 대한 쓸데없는 선입견들이 그런 환영을 만들어내고는 유령 헬렌을 위해 트로이의 영웅들이 싸우게 만들었듯이 힘을 발휘하지."(II-177) 소설은 바다의 광채와 식도락에서, 물빛과 아스파라거스에서, 그러니까 완전한 행복과 낙원의 이미지에서 출발한다. 1인칭 화자인 주인공 찰스는 바다가 드러내는 모든 시청각적 세부를 흡수할 줄 아는 이지적인 인물이다. 또 식사 한 끼도 허투루 먹는 법이 없도록 삶의 물질적인 면모 역시 사랑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예계를 은퇴했지만 여전히 정력적인 그에게서 독자는 좋게 말하면 (기껏해야) 예민하고, 나.. 20250314 지중해식 아침과 서글픈 밤 이상한 밤이다. 방은 춥고 몸이 무겁다. 그러고 보니 낮에도, 꼿꼿이 앉아있는 것만으로도 힘이 들었다. 그래도 아침 시간을 부지런하게 보낸 덕에 멋진 지중해식 도시락을 만들어서 나갔다. 피타 치즈와 오이, 퀴노아, 소금과 후추를 쳐서 닭고기 구운 것을 쌌다. 덕분에 피곤한 것치고는 하루종일 도서관에서 공부를 할 수 있었다. 지금은 침대 위에 반쯤은 앉아있고, 반쯤은 누워있다. 아이리스 머독의 ⟪바다여, 바다여⟫를 다 읽어간다. 2월에 읽기 시작했으니 한 달 남짓 붙잡고 있었다. 주인공 찰스가 자신의 탐욕과, 원한과, 허영심으로 꾸며낸 사랑의 거짓됨을 드디어 깨달았다. 페이지를 넘기는데 갑자기 눈물이 마구 흐르기 시작했다. 최대한 경쾌하게 일기를 써보려 했지만, 타자를 치는 지금도 마구 눈물이 난다. 나.. 20250308 바람의 자비 사흘 동안 똑같은 황갈색 자켓을 입고 도시 곳곳을 돌아다녔다. 이곳에서의 생활과 관련해 유난히 기쁜 마음이 솟는 요즘이다. 기억이 날아가기 전에, 또는 혹시 생길지도 모를 나쁜 일이 내 감정에 구름을 드리우기 전에 지금의 만족감을 보존하고 싶다. 그러고 보니 하늘을 장악해온 비구름이 걷히고 해가 나기 시작한 시점과, 갑자기 내 가슴이 잔잔한 감동으로 벅차오르기 시작한 시점이 꼭 일치한다. 햇볕 쬐는 일이 이렇게 중요하다. 목요일에는 정말 오랜만에 생산적이었고, 어제인 금요일에는 나름 꽃단장을 한 채로 봉준호의 영화 '미키17'을 봤다. 두 날 모두 자기 전에 도수가 낮은 맥주를 마셨는데 법칙 따르듯 끔찍한 악몽을 꿨다. 나는 술을 마시면 오히려 잠을 잘 못 잔다. 언젠가 행복을 도덕의 원리로 삼을 수 없.. 이전 1 2 3 4 ··· 44 다음 목록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