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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산한 땅(2024, um den Sommer) 동쪽 나라의 사람들에게 서역 크라메타는 음산한 땅이었다. 아득한 국경 너머로는 여행은커녕 통행도 금지되어있었기에, 누군가는 그곳을 오아시스 하나 없는 사막으로, 누군가는 대륙의 모든 썩은 물이 모여 고이는 늪으로 상상했다. 확실하게 알려진 단 한 가지는 그곳에도 사람이 산다는 사실이었다. 그것도 이 넓은 대륙에 고대로부터 줄곧 살아온 원주민이. 기록된 역사에 따르면 원주민들은 본래 대륙 동녘의 비옥한 땅에 살았으나, 농사를 지을 줄 알면서도 식인 풍습을 즐기고 글자를 몰랐으며 쌀과 함께 흙을 집어먹었다. 어린이마저 온몸을 문신으로 뒤덮고 있는 야만인 무리를, 바다를 건너온 왕가의 선조들이 몰아낸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천 년 전 일이었다. 여전히 문명이 있을 리 만무한, 현재 그들의 삶의 모습과 터전을 직..
Firenze 부주의하다면 부주의했고, 억울하다면 억울했다. 단 하루만에 비행기 한 편과 기차 세 편을 내리 놓쳤다. 갑작스러운 데다 상당한 추가 지출이 있어 그로써 마치 내 존재의 무게라도 감해진 듯, 하루종일 허했다. 목구멍에서 신 맛이 나도록 실컷 뛰어가놓고 세 번째 기차를 놓쳤을 때는 로마 도심의 잿빛 정류장에 주저앉았다. 훌쩍거리면서 여행함이라는 실존의 양태를 저주했다. 하지만 마침내 피렌체 역에 도착해, 거리의 식당으로부터 스며나오는 누런 빛깔과 끊이지 않는 말소리에 맞닥뜨리자 스르륵 긴장이 풀렸다. 마음을 다스리고 시뻘건 플로렌타인 스테이크를 뜯었다. 또 먹고 싶다. 이번 여행의 큰 수확은 내 죽음 이후의 시간성에 대해 생각해볼 기회를 얻었다는 점이다. 물론 그런 시간이 있으리라는 것 정도야 당연히 알고 ..
버나드 윌리엄스, <가치의 충돌(Conflicts of Values)> 요약 Bernard Williams, ‘Conflict of Values’ in Moral Luck: Philosophical Papers 1973-1980,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1, pp. 71-82. 가치들이 [문자상에서뿐만 아니라] 실질적으로 다수(plural)인 데다 서로에게로 환원이 불가능해(irreducible) 갈등하는 상황에 대해 성찰한 글이다. 문제시되는 여러 가치들 중 어떤 하나의 (또는 그 이상의) 가치는 반드시 상실할[=희생될] 수밖에 없는 이 같은 가치들 사이의 갈등은 병리적인 것, 그리하여 이론이나 역사적 과정을 통해 극복되어야 할 것이 아니다. 그 같은 견해에 반해 윌리엄스는 가치 간 충돌을 필연적일[불가피할] 뿐 아니라 가치를 추구하는 인간적 삶..
20241027 (미)성숙한 나날 이런저런 생각을 정말 많이 하는데 기록될 가치가 있는지 모르겠거나 공부만으로 진이 빠져 기록하지를 못한다. 대부분은 까먹고 만다. 어쨌든 오늘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악한 것이 아니라 그저 피곤한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어제는 쇼트트랙 월드투어를 보면서 혹시 앞에 있는 선수가 의도적으로 방귀를 뀌어서 바로 뒤에 몸을 숙이고 달리던 선수가 모멘텀을 잃어버리면 공식적 페널티의 대상이 될 수 있을지 없을지 고민했다. 이래서 내가 S 아닌 N이구나 싶다. 한편 지난 일기들을 읽다 보면 '나 잘 지내고 있어요, 저 A도 해치웠고 B도 해냈고 C도 해나가는 중이랍니다' 식의 강박적인 패턴이 보인다. 그 누구도 내게 행복이나 성과를 증명하라 요구하지 않았는데. 자랑스럽기보다는 슬프고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나는 왜 그랬..
2024년 8-9월의 독서 유학지에 되돌아왔다. 아직 10월이지만 패딩 점퍼와 코트를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한껏 몸을 싸맨 이곳 사람들은 정작 우산은 챙기지 않은 채 비를 뚫고 자전거를 탄다. 슬슬 우울해지기 쉬운 계절이라, 비타민D 보충제를 부엌 테이블에 꺼내놨다. 아무래도 햇수로 2년차다 보니 처음과는 많이 다르다. 외롭거나 고민이 있을 때 마음 편히 부를 수 있는 이곳 친구들을 사귀었고, 언제든 의지할 수 있는 한국인 언니들이 있다. 집안일도 감을 익혔고 외식은 거의 하지 않는다. 레시피도 다양화해보고 있다. 무사히 연구석사 과정을 졸업했고, 박사논문 프로포잘은 2안 정도를 완성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생활은 그다지 정리되어있지 않다는 느낌이다. 권태나 절망의 고통은 아니다. 권태를 느낀다기에는 박사 입학 여부를..
20240929 역사가도 비평가도 아닌 이런저런 문제로 9월 초중순 내내 안절부절 못하고 지내다 이번 주부터 내면의 평화를 되찾았다. 외부 사정이 크게 달라진 바는 없고 내가 어떻게 대처할지 정도만 결정한 것인데도 마음이 많이 편안해졌다. 여기 있는 친구들과 한국인 언니들의 서포트가 도움이 됐다. 언니들은 내 블로그를 모른다... 수줍게 고백해요, 아이시떼룻! 아무튼 정오 전에는 일어나려 노력하고, 외식을 줄이고(맛있는 간장국수 레시피를 발견해 이틀에 한 번은 꼭 먹는다) 신학기를 맞아 새로 연 카페를 찾아다닌다. 설거지나 청소를 할 때는 샤이니의 옛날 앨범을 차례로 듣는데, 고3 때 하도 많이 들었다 보니 10년만에 만나는 곡들도 가사가 기억이 난다. 가끔 애인이 노래를 추천해주지만, 내 귀는 사실 그의 것만큼 세련되지 못하다. 얼마 전에는..
막스 셸러, <윤리학에서의 형식주의와 가치에 기반한 비형식적 윤리학>, 2부 5장 7절 요약 Max Scheler, Trans. by Manfred S. Frings & Roger L. Funk, Formalism in Ethics and Non-Formal Ethics of Values: A New Attempt toward the Foundation of an Ethical Personalism, Evanston, IL: Northwestern University Press, 1973, 모든 이탤릭체는 셸러의 것, 강조는 나의 것, '[]' 안은 단순 패러프레이징을 넘어 나의 해석이 추가적으로 들어간 부분.2부 5장 7절: 윤리적 가치에 대해 소위 양심적인 주관(Die sog. Gewissenssubjektivität der sittlichen Werte) 사람들 사이의 의견차는 사실 도덕의..
윌리엄 셰익스피어, <햄릿>: 사유와 멜랑콜리 윌리엄 셰익스피어, 김민애•한우리 옮김, ⟪셰익스피어 4대 비극⟫, 2023, pp. 9-250."아니, 이건 좀 다시 생각해 봐야겠는데."(146) 두 번역가 님 중 어느 분께서 쓰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작품 해설에 따르면 "햄릿은 우유부단한 인물의 전형이 아니라 오히려 합리적으로 사고하고 판단하는 근대적 인물이었다."(875, 강조는 내 것)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그는 합리적이었기 때문에 우유부단해졌다. 자신의 아버지가 죽임을 당하는 동일한 상황에 놓였을 때에 격정적으로, 즉시 행동에 돌입한 레어티즈와 달리, 햄릿은 미친 척 가장하는 계획을 수립하고, 복수가 이루어질 최적의 타이밍을 계산했으며, 친서를 위조하는 등 자기의 이익에 맞게 상황을 조작했다. 그러나 장시간에 걸쳐 숙고된 이 모든 합리적 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