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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나드 윌리엄스, <윤리학과 철학의 한계> 요약 Bernard Williams, Ethics and the Limits of Philosophy (3rd impression with amendments), London: Fontana, 1993 (originally published in 1985). 모든 '[]'는 나의 해석.1장: 소크라테스의 질문 철학은 “일반적(general)이고 추상적이며, 합리적으로 반성적인” 탐구의 형태를 취한다(1). 구체적으로 말해 “반성적 일반성과 합리적으로 설득력 있다고 자청하는(claim) 논증의 양식”을 특징으로 가지는 학문이다(2). 그런 철학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how one should live)’라는 소크라테스의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가? 한편으로 철학자의 입장에서는 이에 긍정적으로 대답한다는 것이 ..
2025년 2-3월의 독서 1. Henning Tegtmeyer, 'Schuld und Sünde'. In: Handbuch Religionsphilosophie (Hrsg. von H. Schulz et al.), Springer 2025, 413-424. 오랜만에 대도서관에 가서 읽었는데, 집중력이 흐려질 때마다 체스보드 무늬 스테인드글라스를 쳐다보면서 마음을 다시 다졌다. 생각했던 것보다 술술 읽힌다는 인상 반, 그래도 독일어 독해인지라 시간이 오래 걸려 난처하다는 인상 반. 보통은 세속적인 맥락에서 제3자의 이익을 침해하는 데서 따르는 잘못(Schuld, 책임)과 명백하게 종교적인 맥락에서 성립하는* 죄(Sünde) 개념을 각각 정의하고 (무엇보다도) 둘 사이의 개념적인 중첩을 드러내고자 시도하는 글이었다. *= (인격을 ..
아이리스 머독, <바다여, 바다여> "세월이란 사람들의 현실로부터 우리를 갈라놓고, 사람들을 떼어놓아 유령으로 바꿔놓[는다고들 하]지. 그게 아니라, 그들을 유령이나 악마로 변형시키는 건 오히려 우리야. 과거에 대한 쓸데없는 선입견들이 그런 환영을 만들어내고는 유령 헬렌을 위해 트로이의 영웅들이 싸우게 만들었듯이 힘을 발휘하지."(II-177) 소설은 바다의 광채와 식도락에서, 물빛과 아스파라거스에서, 그러니까 완전한 행복과 낙원의 이미지에서 출발한다. 1인칭 화자인 주인공 찰스는 바다가 드러내는 모든 시청각적 세부를 흡수할 줄 아는 이지적인 인물이다. 또 식사 한 끼도 허투루 먹는 법이 없도록 삶의 물질적인 면모 역시 사랑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예계를 은퇴했지만 여전히 정력적인 그에게서 독자는 좋게 말하면 (기껏해야) 예민하고, 나..
20250314 지중해식 아침과 서글픈 밤 이상한 밤이다. 방은 춥고 몸이 무겁다. 그러고 보니 낮에도, 꼿꼿이 앉아있는 것만으로도 힘이 들었다. 그래도 아침 시간을 부지런하게 보낸 덕에 멋진 지중해식 도시락을 만들어서 나갔다. 피타 치즈와 오이, 퀴노아, 소금과 후추를 쳐서 닭고기 구운 것을 쌌다. 덕분에 피곤한 것치고는 하루종일 도서관에서 공부를 할 수 있었다.  지금은 침대 위에 반쯤은 앉아있고, 반쯤은 누워있다. 아이리스 머독의 ⟪바다여, 바다여⟫를 다 읽어간다. 2월에 읽기 시작했으니 한 달 남짓 붙잡고 있었다. 주인공 찰스가 자신의 탐욕과, 원한과, 허영심으로 꾸며낸 사랑의 거짓됨을 드디어 깨달았다. 페이지를 넘기는데 갑자기 눈물이 마구 흐르기 시작했다. 최대한 경쾌하게 일기를 써보려 했지만, 타자를 치는 지금도 마구 눈물이 난다. 나..
20250308 바람의 자비 사흘 동안 똑같은 황갈색 자켓을 입고 도시 곳곳을 돌아다녔다. 이곳에서의 생활과 관련해 유난히 기쁜 마음이 솟는 요즘이다. 기억이 날아가기 전에, 또는 혹시 생길지도 모를 나쁜 일이 내 감정에 구름을 드리우기 전에 지금의 만족감을 보존하고 싶다. 그러고 보니 하늘을 장악해온 비구름이 걷히고 해가 나기 시작한 시점과, 갑자기 내 가슴이 잔잔한 감동으로 벅차오르기 시작한 시점이 꼭 일치한다. 햇볕 쬐는 일이 이렇게 중요하다. 목요일에는 정말 오랜만에 생산적이었고, 어제인 금요일에는 나름 꽃단장을 한 채로 봉준호의 영화 '미키17'을 봤다. 두 날 모두 자기 전에 도수가 낮은 맥주를 마셨는데 법칙 따르듯 끔찍한 악몽을 꿨다. 나는 술을 마시면 오히려 잠을 잘 못 잔다. 언젠가 행복을 도덕의 원리로 삼을 수 없..
8: 좋은 삶에 대해 사유하는 길은 유일하지 않다 당신 자신은 방해가 됩니다. 방해만 될 뿐입니다. 진실을 이룩하고 싶다면 스스로를 지우십시오. 자아가 삭제되었을 때 비로소 그 빈자리(la vide)에서 신과 실재가 만납니다. 자아가 살아있을 적에는 신이 실재를, 실재가 신을 만날 수 없습니다. 당신 자신은 모든 것을 파괴하고, 낮은 곳에로 끌어내리는 중력의 근원지에 불과하며, 그 힘의 발효가 정지되어야만 진실이 은총으로서 가능합니다. 그러니 방해하지 마세요. 더 이상 방해하지 마세요…… ⟪중력과 은총(La Pesanteur et la grâce)⟫에서 프랑스의 신비주의자 시몬 베유는 이렇게 속삭인다. 주장이 아니라 속삭임에 가깝다. 하지만 그 어떤 주장보다도 단정적이며 엄격하다. 단순히 학문적인 견해를 펼치는 것을 넘어, 윤리적 삶에 대한 계율이 되기..
20250301 faire le ménage 고맙게도 하루종일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외롭지 않은 하루를 보냈다. 같이 커피를 마시고, 잠깐 도서관에서 혼자 공부를 한 뒤 똑같은 친구들을 또 만나 메타포에서 맥주를 마셨다. 브뤼헤 트리플이라는 맥주였는데, 도수가 높아 고작 한 잔 가지고 취해버렸다. 자아의 힘이 아직 미치기 전인 날것으로서의 세계에 대해 미유키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줬다. 아무런 종합도, 포착도, 인식도 가해지지 않은 순수한 질료에 대한 이야기였다.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후설과 메를로-퐁티 사이의 입장 차이는 어쩌면 자아와 자아 아닌 질료 사이의 구분을 끝까지 고수하느냐, 아니면 어느 지점에 이르러서는 포기하느냐에 근거한 게 아닌지 생각했다. 동시에 자아와 질료 사이 최초의 접촉에 관한 주장을 과연 현상학이, 아니 어떤 철학이든 정당..
Antwerp 루프트 교수님과의 면담, 그로만 교수님 수업에서의 발표를 모두 마치고 가뿐해진 마음으로 떠났다. 스스로에게 보상을 준다는 생각을 정말 오랜만에 했는데, 자기연민처럼 보일지는 모르겠지만, 덕분에 무척 즐거운 1박 2일이었다. 혼자였지만 많이 웃었고, 어쩌면 혼자였기 때문에 많이 웃을 수 있었다. 타지살이를 하면서 놀라운 점은 내가 외로움을 많이 타는 편이고, 지금도 조금은 쓸쓸하게 느끼지만 그런 것치고는 혼자서 상당히 잘 논다는 사실이다. 누구와도 대화하지 않고 며칠을 보낸 뒤, 새삼스럽게 오, 며칠동안 입을 안 열고도 그냥저냥 지냈네, 레벨업, 같은 소리를 중얼거리게 된다. 기차를 타고 산 하나 없는 플랑드르의 평원을 지나는 중, 바로 앞에 앉은 장발의 남자가 너무 험악하게 생겨서 쫄았다. 그렇게 움츠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