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Reise

Athens

 "시체의 창백한 피부 색깔로 된 벽지에 걸린 달력을 나는 보고 있었다. 작년의 달력이었다. 새해가 되었을 때 떼어내지 않았다. 새로운 시작 따위를 할 기력이 없었다. 작년의 달력만큼 쓸모없는 존재가 있을까?"라는 문장군을 미술관에서 떠올렸다. 파르테니스라는 화가의 그림이 너무 마음에 든 나머지, 이미 절반도 지난 2023년도 달력을 단지 그의 도록 형태를 띠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구매한 바로 다음 순간이었다.

 스스로를 쓸모없다고 생각하는 저 여성 인물은 얼마 전 회사에서 정리해고를 당했다. 자신의 잘못으로 직업을 잃은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수치심에 허덕인다. 퇴사를(주변 사람들에게는 해고가 아닌 퇴사라고 알려져있다) 계기로 기분을 전환하기 위해 떠난 이국의 수도 아테네에서마저 괴로움에 시달린다. 지중해 음식을 먹고, 뜨거운 햇살을 받으며 피부를 태우고, 무엇보다 관광을 하지만 그녀의 웃음은 반쪽짜리이다. 자신이 아무런 존재 의의도 없는 한갓된 무언가, 긍정적인 것이든 부정적인 것이든 가치와 결부되어있는 그 어떤 속성도 예화하지 않는 채 단지 존재하기만 하는 '순수 무엇'으로 남을까 봐 두렵기 때문이다. 순수 무엇은 세계의 운행에 조금도 개입하지 않는다. 순수 무엇이 되는 일의 공포는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치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니다. 순수 무엇이 되는 일의 공포는 그것의 가공할 만한 중립성에 있다. 그녀는 자신이 절대적으로 중립적인 무엇이 되는 데 겁을 내고 있다.

 그녀는 아테네의 높은 언덕 위에 우뚝 솟아있는 신전들의 무리 한가운데서 그와 같은 겁에 휩싸인다. 사람들이 파르테논에 보내는 열광을 그녀는 이해하지 못한다. 그녀의 눈에 파르테논은 이미 힘을 상실한 신의 사체일 뿐이다. 신의 척추인 기둥은 반토막이 났고, 피부인 색칠은 벗겨졌으며, 무엇보다 지붕이, 그러니까 신의 대가리가 날라가 있다. 파르테논은 앞으로의 인간사의 행방에 아무 영향도 끼칠 수 없어 이를테면 작년의 달력과 하등 다를 바가 없다. 그것은 실재하지만 실재하지 않고, 현실 내부의 특정한 공간을 차지하지만 현실의 일부는 아니다. 부서진 파르테논은 절대적으로 중립적이다. 부서진 파르테논은 그녀 자신이다. 폐허 속에서 그녀는 그녀 자신을 본다.

 그런데 파사드의 파괴된 조각 가운데 하나에서 그녀는 태아의 형상을 읽어낸다. 그녀의 앞에 나타난 태아는 어머니에게조차 잉태 사실이 알려져 있지 않은 상태로, 존재이자 무이고, 비활성화된 것이지만 동시에 생명 그 자체이다. 그녀는 태아에게서 순수 무엇의 절대적 중립성을 발견한다. 그리고 태아의 관념을 매개로 순수 무엇의 절대적 중립성이 자유 그리고 무한한 가능성과 결합될 수 있음을 깨닫는다.

'Reise' 카테고리의 다른 글

Naples / Pompeii / Ischia / Sorrento / Positano  (32) 2023.09.10
Naxos / 용기에 대한 메모  (9) 2023.08.30
Mykonos  (20) 2023.08.29
울산  (5) 2023.07.25
마곡나루  (2) 2023.06.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