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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ise

Leipzig


 

 에드문트 후설은 자아에 의한 구성* 이전의 비자아적 존재자를 근원질료(Urhyle)라 일컬었다. 구성에 논리적으로 앞서기에 'Ur'가 붙고, 구성에 의해 형상(morphē)이 그처럼 아직 부여되지 않았기에 질료라 불린다. 후설에 따르면 세계가 우리에게 현재 경험되는 이 모습으로 경험되는 이유는 자아가 저 구성적 성취를(Leistung, accomplishment) 통해 근원질료에 질서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국역에서는 종종 '작업수행'으로 번역되기도 하는데, '성취'라는 표현이 무척 중요하다. 세계가 저 홀로, 레디메이드로서, 원래 이렇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주관의 성취를 통해 비로소 이렇게 존재한다는 것. 주관 없이는 세계가 아예 없다는 식의 이야기가 아니라, '이렇게' 우리가 잘 아는 방식대로 세계가 존재하는 것은 주관의 성취 덕분이라는 뜻이다. 구체적으로 말해 근원질료에 질서를 부여하는 저 구성적 성취는 종합을 통해 이루어진다.

*i.e. 존재의미 및 양상(있음, 없음, 의심스러움 등) 및 타당성을 특정한 방식으로 부여하거나 인정함으로써 '경험' 성립시키기

 그런데 종합이란 적어도 개념적으로는 이렇게도, 저렇게도 이루어질 수 있는 무엇이다. 물론 우리는 인간이기에 인간의 종합이 따라야만 하는 규범을 따라 종합을 수행한다. 그 결과 내가 보는 꽃과 남이 보는 꽃 사이에, 관점이나 정동에 의한 효과 등등을 제하면, 그 모습상 아주 큰 차이는 없다. 누구도 색맹이 아니라는 전제 하에 나에게나 남에게나 붉은 꽃은 붉어 보이도록 종합된다. 붉은 꽃의 표면은 또한 매끄러워 보이도록 종합된다. 하지만 이는 꽃잎이 저 홀로, 레디메이드로서, 원래 붉고 매끄러워서가 아니라, 나와 남이 인간적 종합의 규범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저 붉음과 매끄러움, 즉 세계(의 일부)의 존재방식이 우리네 종합, 그것도 아주 특수한 규범을 준수하는 종합의 산실이라는 현상학적 진실을 우리는 망각한다는 점이다. 후설의 말을 빌리면 이는 소박성 또는 안일함(Naivität, naivety)에 해당하며, 소박성은 초월론적 현상학의 적이다.

 내가 생각하는 회화의 가치는 우리가, 인간의 눈이 해내는 종합이 얼마나 특수하고 그저 우연한지 보여주는 데 있다. 이 세계가 다른 방식으로 종합될 수 있다는 사실을, 그리하여 세계가 달리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위 두 그림은 모두 꽃을 그렸지만, 꽃의 존재를 상당히 다르게 표현함으로써 우리네 눈앞에 있는 꽃이 꼭 그런 방식으로 종합되어 존재할 필요가 없음을 폭로한다.

 폭로의 효과는 화가의 의도와 무관하다. 인상주의 회화나 점묘화, 이후 입체파 회화 등등에서 인간적 종합의 우연성이 특히 두드러진다고 생각하긴 하지만, 어떤 시대의 화가이든 그가 실재를 얼마나 있는 그대로 반영하고자 의도했는지와 무관하게 그림은 실재가 되는 데 어차피 실패한다. 폭로는 불가피하다. 회화는 반드시 현실의 달리-있을-수-있음을 보여줄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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