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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i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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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strict of Columbia 4 20220806 워싱턴 D.C.에서 이스탄불로 가는 비행기 안. 지상으로부터 11,277미터나 솟구쳐 있는 데다 언니와도 잠시 헤어진 지금, 눅눅하지만 간이 잘 된 대구 요리를 먹고도 맛에 대해 재잘거릴 사람이 없다. 완벽하게 혼자다. 오직 나의 불안과 나의 기쁨만이 내 곁을 붉고 푸른 정령들처럼 맴돌고 있다. 불현듯 그리운 연구실의 사람들과 그랬던 것처럼 티격태격, 오손도손 하면서. 우선 지금 타고 있는 비행기의 출발 시간이 지연되었기 때문에, 이스탄불에서 코펜하겐으로 가는 비행기를 놓칠 수도 있으리라는 꽤 실질적인 불안. 동시에 두 번째 비행기를 그렇게 놓쳐서 설령 섬머스쿨 첫 날을 결석하게 된다 해도 세상이 무너지는 것은 아니며, 어찌어찌 언니가 있는 호텔에 도착해 함께 잠들 수 있으리란 믿음에서 ..
District of Columbia 3 D.C.의 미술관들에서 느꼈던 바들을 끼적여본다. 더 어렸을 때는 그림으로부터 무언가를 배우거나 이론에 대한 영감을 습득하려고 애썼었다. 생산성에 대한 강박을 무겁게 느꼈던 것 같다. 지금은 그림에 관한 한 거의 확고한 쾌락주의자가 되었다. 가르침을 주기보다는 즐거움을 주는 그림들이 더 좋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기록에 대한 욕망을 느끼는 것을 보면, 무상성의 우위에 대해 완전히 동의하고 있지는 못한 것 같다. D.C.의 심장부에 위치해있는 국립미술관. 건물의 외면은 웅장한 것치고 밋밋하지만 내부가 정말 멋지게 꾸며져있었다. 실내의 중앙정원에서 웨딩 촬영을 하고 있던 커플이 떠오른다. 부디, 마치 미래만이 있는 양 행복하세요. 국립미술관에서 멀지 않았던 허쉬혼 박물관. 내부에 전시된 작품들 중에서는 솔직..
Alexandria / Georgetown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괴로운 일이 생겨 일주일 정도를 누워있다, 굶었다, 미친 듯이 먹다, 웅크리다, 다시 자기만 하면서 지냈다. 하이데거와 면세 담배가 없었더라면 자책을 되풀이하다 제 정신을 유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엄마가 다 같이 나들이를 나가고 싶다고 해서 겨우 힘을 내 집 밖으로 나섰다. 조지 워싱턴의 생가인 마운트 버논에 다녀왔다. 마음은 여전히 편하지 않았지만, 나에게 가족이 있다는 사실을 계속 되새기려고 노력했다. 24시간을 가족들과 꼭 붙어있는 지금, 나의 슬픔은 나만의 슬픔이 아니기에.
Boston 20220623 원래는 22일 저녁에 도착할 예정이었지만, 비행기가 8시간 남짓 연착되는 바람에 새벽 4시 반이 넘어서야 보스턴에 떨어졌다. 설상가상으로 위탁한 수하물이 D.C.를 아예 떠나지도 않았다는 소식을 들었고, 잠깐이라도 눈을 붙이려 했건만 빌린 에어비앤비의 문마저 열리지 않아서 복도에 쭈그리고 앉아 아침 8시까지 꼬박 하룻밤을 새웠다. 9시에 바로 독일어 시험이 있었기 때문에도 스트레스가 컸지만, 중간에 엄마와 나 사이에 있었던 실랑이들이 유달리 아픈 기억으로 남았다. 철학 공부를 하더라도 교수가 되지 못할 수도 있다고 했다가, 그러면 지금이라도 진로를 바꾸라는 말을 듣고 그에 예민하게 응수하고 만 것이다. 그 대화가 어찌저찌 마무리된 뒤에는 위탁수하물의 행방과 에어비앤비 출입과 관련한 나의 ..
District of Columbia 2 무척 잘 먹고 있다. 외식을 자주 하지 않아서 거의 집에서만 챙겨먹는데도 살이 쪄서 돌아갈까 봐 걱정이다. 김치 대신 올리브를, 밥 대신 계란프라이를 주식으로 삼고, 내 몸통만한 레이즈 감자칩을 (지금도) 먹고 있다. 내 유학생활의 청사진이 그려지는 기분이다. 단기임대한 집에 식기세척기가 있어서 한국에서와 달리 설거지 걱정 없이 온갖 식기류를 꺼내 쓸 수 있는 것도 편하다. 한국에서는 믹스커피 따위를 마실 때, 뜨거운 물을 붓고 난 후 컵을 단순히 살살 흔들거나 포장지로 커피를 저었었는데, 여기서는 아무 생각 없이 티스푼으로 커피가루를 듬뿍 뜨고 휘젓기까지 할 수 있다. 설거지를 하는 일이 손목에 부담이 가는 나 같은 사람에게는 사소하지 않은 축복이다. 커피는 세이프웨이라는 식료품점에서 5달러짜리 인스턴..
District of Columbia 1 잔여시간 5:00. 워싱턴으로 가는 비행기 안이다. 사랑스러운 S가 지난 해 생일에 선물해주었던 분홍색 노트에 첫 글자들을 막 새겨 넣어보고 있다. 시간이 너무 잘 가서 무서울 정도다. 이륙 즈음의 멍하고 혼미한 감각을 유도제 삼아서 바로 잠에 들었고, 기가 막히게 점심 때에 맞춰 깨어났다. 제육쌈밥이 아닌 미국식 소고기 스튜를 고르면서, 내가 이 여행에 큰 기대를 걸고 있거나 적어도 달콤한 인상을 가지고 있음을 실감했다. 밥을 먹고 나서는 블랙커피를 연달아 두 잔 마셨다. 그런 다음 독일어 공부를 잠깐 하다가 프루스트를 꺼냈다. 사교계 신사 스완과, 지저분한 소문을 꼬리처럼 달고 사는 오데트가 불장난 같은 것을 시작했다. 악명에 비해 오데트는 꽤나 사랑스러웠으며, 반면 스완은 그에 대한 다른 인물들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