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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ise

Naxos / 용기에 대한 메모


 거대한 페리를 타고 낙소스 섬으로 넘어왔다. 낙소스 섬에서는 아기오스 프로코피우스 해변 옆에 숙소를 잡았다. 실제로 사흘 내내 오후에는 바다에만 머물렀다. 염분이 많아 수영을 하지 못하는 나도 둥둥 띄워주는 고마운 물 속에서 용기에 대해 이것저것 사색할 수 있었다.

 전장에서 병사들이 쓴 에세이들을 토대로 쓰인 Mystery of Courage (2002)를 읽고 있는데, 덕분에 몇 가지 조건들만을 제시함으로써 용기의 모든 사례를 포괄하는 어떤 정의를 제시하는 일은 무척 어렵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내가 목표로 삼는 작업은 아무래도 용기의 본질을 독단적으로 규정하는 일보다 용기를 발휘하는 주체의 의식을 탐사하는 것이다. 그리고 현상학이 주객 이분법의 해소를 꿈꾸는 것과는 별개로--나는 사실 이 꿈이 실현 불가능하며, 주객의 구분은 인식의 조건이기에 그것을 넘어서는 권역은 적어도 인간에게만큼은 신비의 장소라고 생각한다--이런 주관주의적 접근에 많은 영감을 준다는 것은 두 말할 것도 없다. 후설의 철학만 해도 자칭 초월론적 주관주의를 표방한다.

 용기에 대한 주관주의적 접근이 발견해내는 것은 바로 용기가 발현되는 양태의 다양성이다. 무한에 가까운 이 다양성은 내가 생각하기에 서로 양립이 불가능한 행위 또는 태도들이 동시적으로 용감해질 수 있다는 패러독스를 낳는다. 예를 들어 자신의 꿈을 찾아 안정적인 직장을 포기하는 결정도 용감하지만, 가족의 생계를 위해 자신의 꿈을 포기하는 결정 역시 우리네 상식 내에서 충분히 용기 있는 선택으로 이해될 수 있다. 심지어 전자보다 후자가 정념의 도움을 덜 받기 때문에 보다 더 용감한 결정에 해당한다는 직관도 타당하다.

 용기의 패러독스로부터 이끌어질 수 있는 첫 번째 결론은, 용기라는 덕성이 그 자체로는 결코 행위를 지도해줄 수 없다는 것이다(not action-guiding). 풀어 말해 '용감하라'는 명령은 추상적 형식에 불과할 뿐, 그 어떤 구체적인 행위도 지시해주지 않는다. 이는 이를테면 절제나 친절함(generosity) 같은 다른 많은 덕들과 용기가 차별화되는 지점이다. '용감하라'는 명령이 구체화되는 것은 용기의 목적을 설정하는 주체의 이성의 작용을 통해서이다. 즉 용기의 내용물은 이성에/이유에 의존적이다(reason-dependent). 이로부터 두 번째 결론이 도출되는데, 바로 모든 행위가 적절한 이유와 결부되기만 한다면 용감한 것으로 해석 가능하다는 것이다. 세련되게 말하자면 임의의 행위 x가 용기를 예화하는 해석의 세계가 적어도 하나는 있다. 그러므로 모든 용기는 특정한 해석 하에서의 용기다. 이때의 해석이란 드러난 행위 또는 태도로부터 그것의 이유, 더 넓게는 의도 및 목적성 일반을 추적하는 작업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현실적으로 모든 행위가 용감한 것으로 규정돼선 안 될 것이다. 용기가 만약 개인적인 해석의 문제만으로 환원된다면, 자신의 행위를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제 삶의 모든 궤적을 무결하며 무조건적으로 용감한 것으로 둔갑시키고자 하는 위선자가 있을 수 있다(여기서 나는 ⟪법철학⟫에서 나타난 헤겔의 칸트적 도덕성 비판을 염두에 두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용감한 행위자에게 용기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바로 양심(conscience/Gewissen)이다. 양심은 개별 행위자의 주관적인 해석과 공동체의 객관적인--나는 이 말을 '상호주관적으로 조율된'이란 의미에서 사용한다--해석 사이의 괴리를 최소화하고, 후자의 해석이 전자의 해석을 규제하게 만든다. 이는 플라톤이 ⟪법률⟫에서 경고했듯 진정한 용기가 좋은 공동체 속에서만 가능하다는 주장으로 이어진다. 나쁜 공동체 속에서는 개별 주체의 양심이 바람직한 방향으로 작동할 수 없기 때문이다. 흔히 도덕적 용기(moral courage)라고 말해지는 것을 발휘하는 경우--이를테면 시민 불복종의 경우--개별 행위자의 주관적인 해석은 공동체의 객관적인 해석을 넘어서기도 한다.

 여기서 더 진행시키고 싶은 것은 실존주의 철학자들의 작업물과 나의 작업을 연결시키는 일이다. 하이데거가 ⟪존재와 시간⟫에서 울부짖은 진정성의 문제와 용기의 해석학이 서로 연결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 연결고리가 내 안에서 아직 구체적으로 명제화되지 않았다. 또 용기가 이유에 의존적일 적에 세계내존재의 근본적인 불확실성 또는 애매성이 개입해 주체로 하여금 자신의 선택의 정당성을 확신하기 어렵게 만든다는 이야기도 하고 싶다. 물론 이를 전개하기 위해서는 양심에 대해 논하기 전에 삽입될 별도의 철학적 서사를 짜야 할 것 같다. 이는 윤리적인 선택과 그것의 말하자면 보증(warrant)과 관련된 이야기이므로, 용기의 인식론으로 확장될 여지가 있다.

 궁극적으로는 경험적 용기 이전의 초월론적인 용기에 대해서 사유하고 싶다. 주체의 모든 경험을 가능케 하는 것으로서의 초월론적 용기에 대해서는 그것의 존재만 어렴풋이 확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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