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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ise

Mykonos


 구름이 페가수스 모양으로 모였다가 아무런 영웅적인 이야기도 없이 싱겁게 흩어졌다. 나는 그리스의 파티 아일랜드라고도 불리는 미코노스의 호텔 수영장에 있었다. 얼핏 페인트로 칠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하얀 흙으로 만들어진 듯 자연스럽게 보이는, 그러나 오래 들여다보면 인공성이 드러나는 건물 안에서 칵테일을 마시면서. 머리 위로 올리브나무 잎이 오랫동안 깎지 않은 강아지의 머리털처럼 살랑거렸다. 등 뒤로는 바닷바람이 뜨거운 햇살을 중화시키며 부드럽게 불어왔다. 그러니 아무 걱정거리도 없어야 했다. 천국의 형상을 본따 만들어진 휴양 호텔 안이었기 때문이다. 저녁에는 올드 타운에 내려가볼 예정이었다.

 이틀 전 나는 다니던 대학의 자퇴 원서를 카페에서 작성하고 카페 옆의 PC방에서 인쇄했다. PC방에서는 아르바이트생과 그녀의 남자친구가 카운터를 보고 있었다. 아르바이트생에게 인쇄할 파일을 넘겨주는 내내 그녀의 남자친구는 그녀의 귀지를 팠다. 휴대폰으로 플래시라이트를 켜고, 본래의 용도를 알 수 없는 도구를 든 채 말이다. 프린터기가 내 자퇴 원서를 인쇄하는 동안에도 그의 애정어린 노동은 계속되었다. 나는 한때는 들어가지 못해 안달이었던 학교를 내 손으로 자퇴하고 있는데, 눈앞에서는 누군가 귀지를 파고 있다니 웃음이 나왔다. 사실 학부 중퇴가 아니라 대학원, 그것도 유학을 위한 박사과정 중퇴였기 때문에 내 상황도 딱히 무게감 있는 무엇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서울대를 떠난다는 것이 나에게 작기만 한 일일 순 없었다. 햇수로 10년이나 다녔고 수많은 추억과 악몽, 기대와 슬픔이 깃들어 있는 곳이었으므로.

 물론 미코노스 같은 관광지는 미련을 씻기에 최적이었다. 올드 타운은 화려했다. 바다가 노을빛에 물들어가는 해안가는 여행객으로 가득했고, 골목 안으로 들어가면 호텔과 마찬가지로 새하얀 건물들에서 보석과 옷을 팔았다. 나는 언니와 함께 타운에서 가장 유명한 해산물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갔다. 다행스럽게도 예약을 해놓고 노쇼한 커플이 있어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우리는 우선 구운 문어를 애피타이저로 주문하고 화이트 와인을 마셨다. 그런데 내가 문어의 사진을 찍기 위해 핸드폰을 가방에서 꺼내려 했을 때 가방의 덮개가 와인 잔을 건드렸고, 잔이 넘어져 술이 내 테이블을 적셨을 뿐만 아니라 옆 테이블에 앉아 있던 남자의 눈 안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나는 당황해서 연신 사과를 했는데, 너무 당황했다 보니 영어도 잘 나오지 않았고, 아임 쏘리보다 더 유창하고 정중한 방식으로 사과의 말을 건네고 있던 언니의 말을 바보 같이 반복하기만 했다. 남자는 딱 봐도 기분이 무척 상한 것 같았다. 그는 우리의 사과를 받아주지 않았고, 말없이 화장실로 사라졌다. 나는 착잡한 마음으로 그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는 동안 언니가 남자의 일행에게 너의 친구는 괜찮은 거냐고 물었는데, 일행은 자기 일이 아니므로 당연히 노 프라블럼이라는 이상한 대답을 돌려줬다. 화장실에서 돌아온 남자는 와인 잔이 넘어졌을 당시 놀란 우리의 손짓과 급한 사과말을 프랑스어로 조롱하듯, 그리고 화를 내며 흉내 냈고, 민망해진 내가 다시 사과말을 건네자 마침내라고 해야 할지, 감사하게도라고 해야 할지 떨떠름한 목소리로 알겠다고 대답했다. 의도한 일이 아니었으므로 억울했지만, 동시에 내가 잘못한 것이 맞았으므로 억울할 일은 아니었다. 미안한 마음은 식사 내내 지속되어 그때 내가 문어 이후로 뭘 먹었는지 지금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호텔의 하얀 테라스에 앉아 연초 대신 액상 담배를 피웠다. 여전히 종결되지 않은 일들이 많다고, 충분히 해결하지 못한 과제들이 한국에 많이 남아있다고 느꼈다. 몇십 회기의 상담과 주변 사람들의 애정 담긴 위로를 받아왔지만, 내가 가한 것이든 입은 것이든 모든 상처로부터 치유되었다고 말하기에는 일상 중에도, 아니 여행 중에도 괴로운 생각들이 침투해온다. 그러나 과거를 이유로 아직 젊기만 한 나의 삶이 이미 망가져있다고 확언한다면 부조리에 가깝게 틀린 짓일 터였다. 길고양이가 유난히 많은 섬의 정경을 내려다보며 딱 일 년만 근심 없이 살아보자고, 자유롭게 지내면서, 내가 가진 잠재적인 능력과 선함을 세상에 보여주자고 결심했다. 내가 언젠가 큰 잘못을 용서받았을 때 들었던 말인 '가벼운 마음'을 가지고서 말이다. 일 년의 행복 같은 것은 내가 아니더라도 모든 인간에게 무조건적이고 절대적으로 허락되는 것이 아닐까? 그렇게 당분간만이라도 스스로의 행복을 우선시해보자고 생각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애인의 얼굴과 용기의 본질에 대한 어렴풋한 관념이었다.

 남은 날들에는 그리스식 보드카를 마시고 델로스 섬의 유적지를 둘러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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