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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담이나 소회 같은 것

20210520 다채로운 5호선

 김포공항에 도착했을 때 나는 빠르지만 환승을 해야 하는 공항철도를 탈지, 환승이 없는 대신 느릿느릿한 5호선을 탈지 고민했고 결국 후자를 택했다. 제주도에 가져간 책을 모두 읽고 싶었는데 허연의 시집을 절반 정도 남겨놓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5호선 플랫폼에 도착해 노선도를 확인하자마자 내 선택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눈대중으로만 봐도 김포공항역과 우리 집에서 그나마 가까운 역 사이에 무려 스물 네댓 번 남짓의 정차가 예정되어있었다. 그래도 시집은 다 읽을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나는 회한을 달래야 했다.

 그런데 시집을 다 읽은 것 외에도 색색의 보석 같은 체험들을 몇 개 더 통과한 것 같아, 이렇게 무언가를 끼적여본다.

 첫 번째는 철저히 시각적인 체험이었다. 5호선의 상징색이 보라색인 줄은 알고 있었지만 좌석이 이렇게까지 세련된 라벤더 색상일 줄은 몰랐다. 게다가 약간 키치하면서도 골동품 비슷한 아우라를 풍기는 다이아몬드 무늬 디자인이라니--나는 몇몇 관광버스들에서만 비슷한 미적 체험을 한 적이 있었다. 종점에 가까워 거의 텅 빈 지하철에 올라타자마자 카메라를 꺼내들었다. 그리고는 자연스럽게 사진 찍힌 자리의 맞은편에 앉았다.

 처음엔 캐리어를 문 근처의 봉에 기대 두려고 했는데 안일한 생각이었다. 자꾸만 내 손이 닿는 영역 너머로 굴러가려는 캐리어를 붙잡은 뒤, 나는 여자답지 않게 다리를 쫙 벌리고 발목만 오므린 다음 그 사이에 내 골칫거리를 고정시켰다. 호피 무늬 가방으로 허벅지의 모양새를 가리고, 백합 무늬 원피스를 입은 채 다이아몬드 무늬 의자에 앉아있는 나는 현란했고 더없이 촌스러웠다.

 그렇게 세련된 5호선의 밤 열차 안에서 촌스러웠던 내가 쥐고 있던 시집은 검정색이었다. 그것도 일부러 곳곳에 하얀 점들을 박아 더 칠흑 같아 보이게 만드려는 의도가 노골적인 검정색. 말하자면 새까만색. 1부와 2부는 비교적 무덤덤하게 읽었었는데, 사랑과 이별을 말하는 3부에 다다르니 시인의 삶이 꼭 내 삶 같았다. 사랑과 이별의 이야기는 대체로 진부하지만 진부하지 않은 다른 이야기들보다 감동적이다. 그 누구의 천국도 지옥도 똑같지 않기 때문이다. 사랑이라는 하나의 이름 하에 무한 개의 천국이, 이별이라는 하나의 이름 하에 무한 개의 지옥이 가능하고 또 현실적이다.

 몇 번 지하철이 멈추더니 차에 사람이 차기 시작했다. 내 옆에도 누군가 자리를 잡았다. 그는 남색 양복을 입고 있었고 덩치가 무척 컸다. 내가 그의 등장에 어깨를 움츠리자 그는 내게서 먼 쪽으로 최대한 몸을 기울여주었다. 내 시인에게는 애인에 대한 권태와 그리움이 공존하는 게 아닌가, 심지어는 번갈아 나타나는 게 아닌가 하는 끔찍한 생각에 이르렀을 때 우연히, 내 시야의 구석에 남자의 휴대폰 화면이 들어왔다. 그런 것은 엿보지 않는 게 예의라는 걸 알면서도 나는 잠시 시집에서 눈을 뗐다. 그는 멜론이나 지니 비슷한 음악 어플리케이션으로 찬송가들을 검색하고 있었다. 그토록 독실한 남색 정장의 신사 옆에서 내가 읽고 있던 시집의 제목은 ⟪불온한 검은 피⟫였다.

 내 심장이 뛰기 시작한 것은 3부가 아닌 4부에서였다. 내 시인 때문이 아니었다. 시집의 끝이 다가오는 만큼 열차도 서울 시내에 들어서면서 점점 내 목적지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마포 즈음에서 옆자리의 남자가 코를 크게 훌쩍였다. 우리 줄 사람들은 맨 정신에 맨 귀였다면 모두가 들었을 게 분명할 정도로 크게. 그저 콧물이 나왔을 확률이 높았지만, 그건 이성의 결론에 불과했다. 나는 본능적으로 그가 콧물과 함께 울음 역시 참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코를 풀 수단이나 말하자면 기회원인이 없어, 반쯤 귀찮음이 섞인 태도로 콧물을 넘기는 소리와 공공장소에서 울음을 참기 위해 콧물을 넘기는 소리는 다르기 때문이다. 이건 공공장소에서 울음을 참아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실제로 남자는 몇 번 더 같은 데시벨로 코를 크게 훌쩍였고 한두 번은 내게 들릴 정도로 신음했다. 이어폰을 꽂은 것 같지는 않았는데, 그저 찬송가의 제목들을 검색한 것만으로 어떤 감동에 차오른 걸까? 나는 한 번 더 고개를 돌리게 되면 진짜 실례가 될 것을 알았기에 눈을 불온한 붉은 활자들에 집중한 채 마음속으로만 가설을 세워나갔다. 아, 블루투스 이어폰이겠지. 내가 얼마 전에 케이스만 잃어버려서 콩나물 대가리들은 살아있는데 충전은 하지 못하는.

 그러나 그가 실제로 음악을 듣고 있었는지 아니었는지는 별로 상관이 없었다. 어쨌든지 간에 그는 내가 단 한 번도 해보지 못한 체험의 한가운데서 실존하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초월자와 만나는 신비의 체험. 나는 전혀 모르는 신비의 감각 또는 감정, 또는 둘 중 어느 것으로도 범주화할 수 없는 무언가를 내 옆자리의 남자는 알고 있었고, '알다'라는 동사가 부적절하다면 적어도 신비에 당하고는 있었다. 나는 일순 신비를 당하고 있는 그가 너무 부러워져서 신비를 당하는 사람의 표정은 대체 어떤 것일까, 나도 지어본 적이 있는 표정이라면 내게도 희망이 있는 것일까 따위를 생각했다. 실례를 무릅쓰고서라도 고개를 돌리고 싶은 욕망이 일었다. 그러나 동시에, 내가 지어본 적도 없는 표정이면 어떡하냐는 절망적인 물음이 떠오르자 욕망은 끓는 물에 녹듯 시끄럽게 사그라들었고. 나는 옆사람의 눈물을 최대한 외면하는 채로--사실 그것이 가장 예의 있는 일이기도 하니까--김경주 시인의 발문을 빙자한 감상문까지 완독해냈다. 시집을 덮었을 때 딱 청구역에 도착했으므로 나는 캐리어를 손에 꽉 쥔 다음 조신한 자세로 일어섰다. 하필이면 내리는 문이 내가 앉았던 자리 쪽에 있어서 나는 어쩔 수 없이 몸을 180도 돌려야 했고, 본의 아니게 남자의 표정을, 정확히 말하면 그의 얼굴을 보게 되었다. 그의 얼굴은 핏빛이었다.

 아린 손목으로 캐리어를 들고 계단을 오를 자신이 없어 엘리베이터를 이용했다. 청구역에선 5호선과 6호선이 교차하기 때문에 대합실로 올라가기까지 엘리베이터를 두 번이나 타야 한다. 닫힘 버튼이 작동하지 않는 첫 번째 엘리베이터 안에서 나는 나 자신과 투쟁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내 안의 악마는 술 마시고 우는 일이란 신비체험이 아니라 비일비재하고 진부하기 짝이 없는 단순한 주정, 사건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그저 어느 사태에 불과하다고 냉소했고, 내 안의 천사는 그 진부함 속에 신비가 깃들어있었을 수 있다고, 도리어 신비는 진부함 속에만 깃들 수 있는 것이라고 반문했다. 게다가 술을 마신 뒤 보통은 지상적인 것에 더 집착하게 되지 초월의 노래를 찾아 듣지 않지는 않냐고 악마를 쏘아붙였다. 두 번째 엘리베이터를 찾아 가는 길에서 나는 두 목소리 모두 나름대로 일리가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나는 여하튼 간에 내 앞가림이 가장 중요한 처지에 있었고, 언제나 내 앞가림부터가 중요한 처지에 놓여있었고. 그러니 내 옆에 앉았던 남자가 신비와 취기 중 무엇을 체험했는지는 사실 내 알 바가 아니었던 것이다. 어찌 보면 천사의 위력이 무색하게 악마가 승리한 듯도 보이는 결론이었다. 그러다 어느새 두 번째 엘리베이터 앞에 도착했다. 문이 닫힐 때까지 시간이 걸렸던 것처럼 열릴 때까지도 시간이 걸렸고 그 틈을 타서 나는 좌우를 조금 둘러보았다.

 대체 누가 청구역의 기계실 문을 연분홍색으로 칠하자 말한 것인가. 마찬가지로 닫힘 버튼이 작동하지 않는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힐 때까지, 나는 연분홍색 철문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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