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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은선, <도움받는 기분> 백은선, ⟪도움받는 기분⟫, 문학과지성사, 2021 화자는 무인 존재가 되고 싶다. 생명을 저주하는 삶이고 싶다. '0'이라는 기호를 동경하며,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고민한다. 절망, 하강, 몰락, 우울에 대한 열정과 그로부터 따라나오는 역설적인 생기로 넘치는 이 시들을, 단순히 모순으로 취급해버리지 않기 위해 나는 어떤 독법을 선택해야 할까. 어쩔 줄을 몰라서 그저 읽고 또 읽었다. 잘 와닿지 않은 구절도, 마음을 날카롭게 찌르는 구절도 모두 수용하려 애쓰며 페이지를 끝까지 넘겼다. 그렇게 내내 혼란스러웠던 마음으로, 아픔과 슬픔으로 가득한 이 시집의 끝에 다다랐는데 어째서 나는 '도움받는 기분'을 느낀 것일까? 그 숱한 아픔과 슬픔을 죄다 통과하고도 어째서? 이전에 최승자 시인의 시집을 박하게 평가..
갈산 치낙, <푸른 하늘> 갈산 치낙, 서경홍 옮김, ⟪푸른 하늘⟫, 수다, 2011. 사람이 성취가 아닌 상실을 통해서 비로소 비약할 수 있다는 것은 삶의 아이러니다. 무겁게 침묵하는 푸른 하늘과, 부산스럽게 새 제도를 쏟아내며 전통문화에 러시아식 정치사상을 혼입하는 사회 사이에 어느 투바 족 유목민 아이가 끼어있다. 아직 초등학교에도 가지 못하는 나이지만 형제와의 이별, 할머니의 죽음, 개 아르지랑의 죽음을 거치며 처음으로 실존의 의미를 묻게 된다. 첫째, 누나 토르라아와 형 갈카안이 새로운 공화국의 설립과 함께 의무가 된 초등교육에 참여하기 위해 유르테(게르)를 떠난 일은 아이에게 자신 또한 언젠가는 가족과 유목사회의 전통으로부터 멀어지리라는 불안감을 심는다. 오랜 시간 동안 화폐 문화조차 제대로 정립된 적 없이 오직 양을 ..
Antonio Aguirre, <Genetische Phänomenologie und Reduktion> 일부 정리 A. Aguirre, Genetische Phänomenologie und Reduktion: zur Letztbegründung der Wissenschaft aus der radikalen Skepsis im Denken E. Husserls, Den Haag: Martinus Nijhoff, 1970. "회의는 인식과 현실성의 관계를 뒤집는다 [...] 현실성은 경험의 덕분으로만 현실성이다. 시작에서의 에포케, 순전히 방법적 형태 속의 에포케는 회의적 에포케이다. 그것은 존재하는 것의 객관성을 건드리지 않고, 존재와 존재자의 의미에 대해 진술하지 않으며, 다만 숙고의 방법적 시작을 위해 자명한 [데다] 그것을 위해 객관적인 것이 거기 있는 주관성이 없다면 객관적인 것에 대해서 말할 수 없을 것이라는..
에드문트 후설, <정적 현상학적 방법과 발생적 현상학적 방법들> 번역 Husserliana XI, Analysen zur Passiven Synthesen, s.336-345 (Statische und genetische phänomenologische Methode) 번역. 모든 강조는 필자의 것이다. [336] 우리는 발생의 법칙들이라는 표제(Titel) 하에 [다음을] 구분해야 한다. 1) 체험류 속 개별적 사건들의 잇따름에 관한 법칙들에 대한 소급지시(Nachweisung)라는 의미에서의 발생의 법칙들. [이] 무매개적인, 필연적인 연속의 법칙들은 구체적인 사건들을 위한 것이거나 추상적인 국면들, 그와 같은 사건들의 계기들, 예컨대 경과하는 체험들에 파지들이 또는 그때그때마다의 인상적 국면에 파지적 국면이 필연적으로 연결됨[과 같은 사태(Anschluß)]를 위한 ..
하인리히 뵐,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하인리히 뵐, 김연수 옮김,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혹은 폭력은 어떻게 발생하고 어떤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가)⟫, 민음사, 2008 제목에 굉장히 충실한 내용을 담고 있는 책이다. 단순히 조금은 바보 같고, 위태로운 사랑에 빠졌을 뿐인 카타리나 블룸이 언론에 의해 테러리스트, 창녀, 체제에 위협적인 공산주의자 등으로 낙인 찍히면서 명예를 실추 당하고, 조금의 죄의식도 없이 자신의 아픈 어머니와 자신을 문자 그대로 죽음 또는 적어도 죽음에 가까운 억울한 처지로 내몬 기자 퇴트게스를 살해한다. 황색 저널리즘에 대한 작가의 분노가 거의 투명하다시피 한 인물들과 서사를 곧장 통과해 독자에게 아무런 매개도, 해석의 여지도 없이 전달된다. 아무리 이 글이 '소설'보다는 '이야기' 또는 '팸플릿'으로 의도..
이남인, <현상학과 해석학> 이남인, ⟪현상학과 해석학⟫, 2004, 서울대학교 출판문화원 "발생적 현상학의 관점에서 보자면 후썰의 초월론적 주관은 하이데거의 현존재와 마찬가지로 단순한 반성적 자기의식의 주체가 아니라, 세계의식을 토대로 다양한 유형의 대상을 해석하는 해석의 주체이다. 그리고 후썰의 초월론적 주관은 하이데거의 현존재와 마찬가지로 단순한 인식의 주체가 아니라, 나름대로 생의 관심을 가지고 어떤 기분 속에서 살아가는, 근원적으로 실존하는 주체이다. 더 나아가 후썰의 초월론적 주관은 하이데거의 현존재와 마찬가지로 유아론적인 주체가 아니라, 상호주관적이며 역사적인 존재방식을 지니고 있는 주체이다."(515) 후설은 '현상학'의 이름으로 철학사에 위대한 족적을 남겼음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철학자들의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하이..
이남인, <후설과 메를로퐁티 지각의 현상학> 이남인, ⟪후설과 메를로퐁티 지각의 현상학⟫, 한길사, 2013. "정적[statisch] 현상학적 분석은 불투명한 소여의 정체를 해명하기 위해 거기에서 시작해 그 타당성의 정초토대인 명증적인 소여를 제시하는 방향으로 진행되는데, 그 이유는 정적 현상학의 경우 모든 불투명한 소여들의 타당성의 토대는 명증적인 소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 발생적[genetisch] 현상학은 어떠 소여가 있을 경우 그 소여의 투명성의 정도와 무관하게 그것보다 시간적으로 앞서면서 그 발생을 가능하게 해주는 일체의 것을 해명함을 목표로 한다."(132) 메를로퐁티의 ⟪지각의 현상학⟫이 현상학의 창시자 후설에게서 받은 영향을 다각도로 분석하는 책이다. 책이 내세우는 핵심적인 테제는 메를로퐁티가 비판하는 후설의 현상학은 후..
Rudolf Bernet, Iso Kern, and Eduard Marbach, <An Introduction to Husserlian Phenomenology> 일부 정리 Rudolf Bernet, Iso Kern, and Eduard Marbach, An Introduction to Husserlian Phenomenology, Northwestern University Press, 1993 출간된 지 30년이 넘어가지만 여전히 자주 추천되는 후설 입문서로, 내가 읽은 것은 1989년에 독일어로 쓰인 책이 영어로 번역된 판본이다. 세 저자 모두 노령임에도--또는 그 연륜의 덕으로--아직까지도 현상학 학계 내에서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모두 벨기에의 루뱅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마쳤으며, 후설리아나 전집 편집에 참여했다. R. Bernet은 하이데거의 철학과 정신분석학까지 넘나들면서 넓은 관심 분야를 소화하고 있고, I. Kern은 후설과 칸트의 비교연구로 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