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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학일기 같은 것을 정기적으로 쓰고 싶다는 생각에 새 카테고리를 파게 되었다. 서울대입구역 3번 출구 근처에 내가 정말 좋아하는 분위기의 술집이 있다. 지난 해 봄에 쓴 ⟪바다 망령의 숨⟫에서 주인공이 모르는 남자와의 사랑에 마음을 의지하려다 그와 같은 행위의 절대적 무의미함을 깨닫고 관둔 술집의 이미지는 그곳에서 따왔다. 철학과의 동료이자 친구들을 그곳으로 이끌고 갈 때마다 나는 그곳이 혁명을 모의하기 좋을 만큼 음습해서 맘에 든다고 말하곤 했다. 저녁에 들어가 새벽까지 머무르기도 하고, 타임킬링에 불과했던 수다에서부터 진지한 대화까지 모두 나눌 수 있었던 곳으로, 내 대학원 생활을 한 개의 장면으로 집약해야만 한다면 그곳 구석의 이미지를 나는 택할 것이다. 어느 날의 새벽, 그곳에서 술을 마시다 내가..
후설과 머독에 대한 메모 명증에 기반한 후설의 행복론이 현실(reality)의 직시를 중시하는 머독의 윤리학과 상통하는 부분이 많다고 생각하던 중 그래도 두 철학 사이의 차이들에 대해서 역시 민감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부유하는 생각들을 언젠가 체계적인 글로 옮겨 투고하고 싶다. 우선 이번 학기에 제출할 페이퍼에 각주로 넣어볼 수 있을 것 같다. '[]' 속의 언명은 나의 해석이 짙게 들어간 부분들. ① 후설에게 윤리적 쇄신(renewal, Erneuerung)을 담당하는 기관은 의지, 구체적으로 말해 자신이 절대적으로 가치있다고 생각하는 바를 일관적으로 따르고자 자유롭게 스스로를 규정하는 의지이다(see Cavallaro & Heffernan 2019:365). 반면 ⟪선의 군림⟫ 속 머독에게 의지, 더욱이 자유로운 의지란 [..
20231124 십일월 힘겨운 한 달이었다. 매일 같이 내리는 비를 보며 울적함을 넘어 우울했고, 담배를 끊었음에도 불구하고 호흡 곤란과 흉통이 느닷없이 찾아와 일상을 괴롭게 만들었다. 어느 밤에는 내게 남아있는 미래의 나날들 가운데 단 하루도 행복한 날이 없을 것만 같아 엉엉 울기도 했다. 잠을 도피처로 삼아 매일 열두 시간 이상을 잤는데, 그러다 깨어나면 반드시 두통에 시달렸다. 금요일마다 읽는 ⟪선의 군림⟫이 그래도 희망이 되어줬다. 자아의 환상과 도취에서 벗어나,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정의롭고 사랑 가득한 눈길로 바라볼 수 있도록 우리네 주의를 돌려야 한다는 머독의 주장에 종종 울컥했다. 리딩 그룹 사람들과 함께하는 점심식사도 나를 불행에서 꺼내준다. 커리 한 그릇에 5유로밖에 받지 않는 태국 음식점에 항상 가는데, 사..
Anthony Steinbock, Moral Emotions : reclaiming the evidence of the heart 보호되어 있는 글입니다.
바다 망령의 숨(2022.4) 추위. 크리스마스가 지나자마자 불쑥 찾아왔다. 크리스마스 당일에도 날은 좋지 않았다. 거리가 쓰레기로 가득했기 때문에, 실내에 한참 박혀 있었다. 축제를 벌이지 않은 몸으로 한겨울을 맞았다. 그렇게 지금에 이르러서 불현듯,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의견에 지나지 않은지 의심했다. 나는 의견이다, 하고 말을 내뱉어 보았다. 내가 지금, 여기 있음은 진리가 아니라고. 오늘 내 말 상대는 차디찬 공기였으며, 입김이 마스크 너머로 퍼져 허공에 짧은 자취를 남겼다. 나는 일을 마치고 직장을 나와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코트를 입고 있었지만, 두껍지는 않았다. 보풀이 많이 일고, 주머니가 양 옆으로 큼직하게 달린 못생긴 코트였다. 겨울 내내 이것으로 버텼다. 돈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옷을 사..
최근에 읽은 것들에 대한 기록 이 도시에는 허구한 날 비가 내린다. 테라스에 나가 하늘을 가득 메우고 있는 구름 사이로 햇살을, 적어도 그것의 흔적이라도 찾아보려고 고개를 들면 머지않아 빗방울이 내 콧등을 때린다. 약하지만 끈덕지게 이어지는 빗줄기야말로 이 도시의 상징이다. 모두가 사진기를 꺼내게 만드는 고딕 양식의 오래된 시청 건물은 사실 지나치게 아름다워서 이 도시의 음습한 기운을 진실되게 반영하지 못한다. 도처의 음기를 겨우 상쇄시켜주고 있는 것은 대학생들의 다채로운 옷차림과 특히 밤거리에 은근하게 퍼져있곤 하는 담배 냄새, 돌길에 떨어져 깨진 초록색 맥주병, 카페로부터 새나오는 묘령의 여자의 웃음소리 정도다. 하지만 단 하루, 모두가 새까맣게만 입고 금연, 금주를 하고 웃음을 삼가도 좋으니 햇빛이 났으면 좋겠다. 해가 보고 싶..
20231014 오밤중의 생각 오밤중의 어지러운 생각. 논문 한 편을 쓰는 데 너무 많은 품이 든다. 석사논문이나 박사논문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일반적인 저널 아티클에 실리는 7000 단어 정도의 글을 쓰는 데 1년이 걸린다고 해도 이제는 별로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기존의 문헌을 소화하고, 자신의 생각을 명확하게 정리하고, 가능한 반박들에 대비하고, 세련된 글로 표현해내는 각 과정이 하나 같이 험난하다. 또 직관을 단순히 표현하는 일과 그것을 다수에게 설득력 있게 만드는 일, 그러니까 철학으로 승화시키는 작업은 전혀 다른 수준의 무엇이다. 나 자신의 한계가 느껴지고 힘에 부친다. 이 페이퍼 도대체 완성이나 할 수 있을까? 물론 고작 6월부터 준비했으니 4개월만에 구시렁거린다면 끈기 부족이다... 최근에 쓴 소설의 첫 문단을..
Stefano Micali, Phenomenology of Anxiety Micali, Stefano. (2022). Phenomenology of Anxiety, Springer. '다성학(polyphony)'의 방법론으로써 정신분석과 현상학, 문학 등 다양한 영감의 원천으로부터 불안의 특질(trait)들을 분석하는 책이다. 미래의 자아의 자율성을 주장한 사르트르에 반대해 불안 가운데서 과연 미래의 자아가 그만큼 견고한 것인지 물었던 2장의 비판이 특히 인상 깊었다. 5장에서는 불안에 대한 저자 자신의 현상학적 분석을 심화시키는데, 불안이란 자기의 타자화 가능성에 대한 불안일 수 있다는 통찰이 빛난다. 저자에 따르면 "불안은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변화에 대한 집착을 가리키며 그러므로 [우리가] 급진적인 변화를 겪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포함한다. 우리는 이 (열린) 미래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