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악과를 나온 H 언니를 위해 바빌로프(카치니)의 성악곡을 반주하게 되었다. 구성요소가 좀 더 많고 화려한, 그러니까 연주자가 더 돋보일 수 있는 그리그의 곡을 치는 데 시간을 보내다 그래도 언니에게 폐가 되지 않기 위해 부랴부랴 악보를 바꿨다. 그렇게 정말 간단한 화음을 연주하기 시작했는데, 예상치 못하게 얼굴에 열이 올랐다. 누군가에게는 신파로 들릴 수 있는 세련미 없는 화음들 위로 ‘아베 마리아’라는 단일한 가사가 덧입혀 들리는 가운데 갑자기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찬송가들이 흔히 억지스럽게 전달하는 슬픔이나 두려움과는 무관했다. 지상의 시련에 슬퍼하고, 그 이후에 펼쳐질 지옥에 대한 경고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려면 여전히 ‘나’의 쾌고가 중요해야 한다. 그 ‘나’가 물질성을 보존하든, 아니면 소위 몸을 벗은 영혼이든지 간에 말이다. 그러나 연주를 통해 일순 느낀 것은 내 존재의 작음이었다. 너무나 단순한 멜로디, 만져지지도 않는 소리들의 조합, 무게조차 없을 공기의 임의적인 흐름보다도 내가 하찮게 여겨지는 체험에 당황스러웠다. 나를 압도하는 나 아닌 세계의 존재감에 대해 본능적인 공포를 느꼈다. 그런 동시에 근육이 이완되고 몸이 편안하게 축 늘어졌다. 한순간에나마 자유로워진 것이다.
비아의 독보적인 무게와 그에 비한 자아의 황당한 가벼움. 그에 대한 자각이 주는 해방의 효과. 나와 내 주변의 여집합은 비어있으며, 내 불행은 아무리 작은 것일지라도 거대한 운석의 충돌에 비견될 수 있다는 환상이 깨지고, 내가 다만 익명적인 생명의 무리 가운데 하나라는 현실 인식이 괴롭지만은 않았다. 저 무리를 지켜보고 심지어는 보살피는 신이 있는지는 별다른 상관이 없었다. 세계는 오히려 나에게 무관심한 할 것 같았다. 섭리란 세계의 관심을 갈구하는 인간의 집단적인 자기위로의 산물일 것이다. 섭리의 부재에 절망한다면 자연스러운 일이겠지만, 그 또한 ‘나’의 특별한 지위에 대한 집착, 그리하여 내가 보살핌 받는 일의 중대성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비종교적인 태도이리라.
요컨대 내가 섭리에 의해 이끌어지고 있다는 감각은 진정한 초월성에 대한 체험, 엑스터시가 아니라고 주장하고 싶다. 초월성은 무대의 중심에서 ‘나’를 제거할 것을 요구하는 반면, 섭리에 대한 생각은 신적인 것, 나를 넘어서는 것 그 자체에 대한 겸허한 관조이기보다 나의 번영에 대한 염려의 연장선에 놓여 있다.
관찰에 천착한다면 세계는 질료적인 잡다의 임의적인 소용돌이로 드러난다. 우리가 제 아무리 그 잡다를 의미를 갖고 규칙에 구속되도록 종합할지라도, 그와 같은 종합의 규칙은 어디까지나 인간적인 노력의 산물이지 세계의 의도는 아니다. 종교적 수련의 의미는 인간에 대한 세계의 이러한 형이상학적 무관심에 절망하지 않는 것이며, 유신론과는 크게 개념적인 상관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