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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중] 한스-게오르그 가다머, <진리와 방법 1> 요약 보호되어 있는 글입니다.
화실 1장(2018.11) 1. 한가해진 안나는 한가해서 더욱 예민했다. 한가함에도 불구하고 예민한 것이 아니었다. 한가한 때에만 가능한 예민함이 그녀를 괴롭히고 있었다. 이를테면 안나는 단골 카페에서 일요일 오후마다 지켜지는 사소한 규칙에 지나친 신경을 쏟았다. 그녀는 3시 10분과 3시 15분 사이에 반드시 양복을 입은 남자 네 명이 카페에 들어오리란 것을 알고 있었다. 다리를 잘 꼬는 안나에 비해 그들은 늘 정자세를 유지했다. 자세가 흐트러지지 않으니 옷에도 구김이 없었다. 무더운 날에도 양복차림들을 고수했는데, 등 부분은 마치 갓 다림질되어 매장에 걸린 옷처럼 빳빳했다. 그들이 의자에 앉으면 양복바지의 밑단 네 쌍이 아주 얌전히 말려 올라가 왼쪽과 오른쪽의 발목을 정확히 동일한 크기만큼 드러냈다. 그렇게 드러난 살조차 꼼꼼..
화실 0장(2018.11) 유치하지만 진지했던 스물 네 살 가을의 추억. 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완성했던 장편소설. 총 15장까지 있었고, 안나를 행복하게 만들어주기 위해 마지막까지 노력했다는 기억이다. 0. 혼자 공책을 펴는 시간, 그때만큼은 테이블 위의 스탠드 불이 태양보다도 강력하다. 창문에 커튼이 쳐져 자연으로부터의 빛이 차단된 방 안에서, 안나는 얼마 전부터 배우기 시작한 프랑스어를 두 어절쯤 적어보았다. 그 사이 전구의 둥근 몸뚱어리가 눈꺼풀을 향해 인공의 열기를 쏘는 것이 느껴졌다. Je suis 알파벳들은 적히자마자 안나의 머릿속에서 제 음가를 연주했다. 그녀는 그 발음을 생각하면서 문득, 이 말들이 혹시 ‘Jesus’의 오타는 아닐까 하는 농담 같은 진담, 혹은 진담 같은 농담을 꾸며보다가 그만 두었다. 안나의 프..
<현상학적 정신병리학> 옥스포드 핸드북 일부 요약 G. Stanghellini, M. R. Broome, A. V. Fernandez, P. Fusar-Poli, A. Raballo, R. Rosfort (ed.), The Oxford Handbook of Phenomenological Psychopathology, Oxford University Press, 2019. 12장 현상학에 대한 비평과 받아들임 - 데리다, 푸코, 들뢰즈(Federico Leoni) 데리다, 푸코, 들뢰즈는 공통적으로 순수 주관의 불가능성, 곧 "초월론적인 것의 불순성"을 내세워 후설을 비판한 바 있다(88). 우선 데리다는 후설의 현상학을 가능케 하는 인간적 경험의 생동하는 현전도, 그에 대한 직접적(first-hand), 즉각적 기술도 불가능하다고 지적한다. "생동하는 ..
루돌프 베르넷, <현상학적 환원과 주체의 이중적 삶> 요약 T. Kiesel & J. van Buren (ed.), Reading Heidegger from the Start - Essays in His Earliest Thought, State University of New York Press, 1994, pp.245-267 14장 현상학적 환원과 주체의 이중적 삶 (Rudolf Bernet, Trans. by François Renaud) '현상학적 환원은 대체 무엇을 드러내주는가?'라는 질문에 현상학자들은 상이한 반응을 보여왔다(245). 후설은 초월론적 주관과 세계 사이의 구성적 상관관계를, 하이데거는 [인간적] 현존재의 실존에서 마주치는 존재를(e.g. 도구존재), 장-뤽 마리옹은 어떤 호소, 요구, 부름의 소여(givenness[donation])를..
버지니아 울프, <댈러웨이 부인> 버지니아 울프, 정명희 옮김, ⟪댈러웨이 부인⟫, 솔, 2019. "런던은 스미스라 불리는 수백만의 젊은 청년들을 삼켜버렸다. 부모가 그들을 특색 있게 하려고 생각해냈던 셉티머스 같은 별난 그리스도 교도다운 이름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유스톤 거리에서 떨어진 곳에서 하숙하면서 핑크색의 순진한 타원형 얼굴이 마르고 찌푸린 적개심에 가득 찬 얼굴로 변하는 것 같은 경험들을 되풀이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에 대해서 가장 빈틈없는 친구라도 정원사가 아침에 온실 문을 열고 화초에 새로 핀 꽃을 발견하고는 하는 말 외에 할 수 있는 말이 또 무엇이 있을 수 있을까--꽃이 피었어. 허영, 야심, 이상주의, 열정, 외로움, 용기, 게으름 따위의 평범한 씨앗들에서 꽃이 피었단 말이야. 이 모든 것들이 뒤섞여 (유스톤 ..
에드문트 후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2판 §13-14 번역 E. Husserl (Hrsg. von W. Biemel), Phänomenologische Psychologie, Springer, 1968(Hua IX), s. 298-299, 모든 강조는 필자. 사진만 한길사 판본으로 찍었다. 형상적 환원이 사용되지 않은 사실적 현상학에 대한 자료를 모으고 있다. [298] 13. 사실학문들과 경험적 현상학의 현상학적 정초 아프리오리의 완전한 우주를, 그것이 자기 자신과 초월론적으로 되돌아가-관련됨(Rückbezogenheit) 가운데서 그리고 그로써 그것의 특유성과 완벽한 방법적 명료성 속에서 현시한다는 이러한 무한한 과제는 제 나름대로(ihrerseits) 보편적인 그리고 그때에 완전히 정초된 경험적 사실성에 대한 학문을 달성하기 위한 방법으로 기능한다[방법의 ..
미완 - 사과로부터의 푸른 빛(2022.2) 앙리 르 시다네르의 그림들은 견고해 보이는 우리네 세계가 실은 언제나 미세하고 부드럽게 진동하고 있으며, 매 순간 예측할 수 없는 색깔의 빛을 입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런 세계에 대해 고정불변하게 타당할 인식을 찾고자 한다면 실패할 수밖에 없을 뿐만 아니라 세계의 아름다움까지 훼손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인식은 일종의 반달리즘이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처음에는 인식의 효용에 대한 강박적인 기대와 그것의 덧없음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런데 이야기의 뒷부분으로 갈수록 인물이 메시지를 육화하지 못하고 단지 예시로 전락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사상이 조금이라도 배어있는 소설을 쓰고 싶은 사람이 맞닥뜨릴 수 있는 가장 흔하고 치명적인 실수가 아닌가 생각한다. I 오빠가 정성스럽게 피드백을 해줬음에도 불..